"서란에게 말차는 결코, 도가 될 수 없었다"

[연재 무협소설]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피다, '꽃이 시들어도'(9-2)

이슬비 | 기사입력 2017/06/25 [11:54]

"서란에게 말차는 결코, 도가 될 수 없었다"

[연재 무협소설]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피다, '꽃이 시들어도'(9-2)

이슬비 | 입력 : 2017/06/25 [11:54]

제9장 꽃이 시들어도(9-2) 

 

<지난 글에 이어서>
이모님, 저와 자여는 격이 다르지요. 저와 자여 모두, 이모님의 딸이라 하나, 언제까지나 저는 방계 출신, 그것도 후계 혈전에서 패한 이후로 광인이 되어버린 유란의 딸이고, 자여는 이모님의 직계 후계이니까요.”


잘 알고 있구나. 그래, 내 딸로 입적이 되었으면 그 정도 분수를 아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어디 계속 말해보아라.”


그러니 저는 지금 죽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서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란은 귓불에 달린 곡옥 귀고리를 만지작거렸다. 백금으로 고리와 보요를 만들고, 청옥으로 곡옥을 만들어 단 귀고리는 유흔이 서란을 위해 구하 출신 상인에게 특별히 주문해 만든 것이었다.
 
저는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먀오족의 문화에 빠진 정신 나간 년. 그러니 이런 저의 존재는 자여가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크게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


어릴 적부터 먀오족의 문화에 빠지더니, 어른이 되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저는 이 한씨가문은 물론이요, 다른 가문들의 지지 또한 얻지 못하겠지요. 그런 제게 기다리는 것은 오직 하나, 죽음 뿐. 그러나 자여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요.”


…….”


자여는 그런 저와 비교대상이 됨으로써, 저와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목숨을 건지겠지요. 그것만으로도 자여가 후계 혈전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충분히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다른 누군가의 생()을 명분으로 내세워 목숨을 구걸하는 일은 세상 그 무엇과 비할 수 없는 비굴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서란은 오직 죽기 위해 키워지고, 죽기 위해 살아가는 아이. 그런 서란이 정옥에게 목숨을 구걸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정옥의 첫째 딸 자여의 생()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일 뿐이었다.
 
유흔…….’
 
서란은 마음 속으로 유흔을 불렀다. 이 모든 것은 유흔이 없어서 생긴 일일 터였다. 유흔이 있었다면 감히 춘심 따위가 자신의 찻잔에 독을 넣을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또 유흔이 있었다면 이렇게 자신이 자여의 생() 따위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정옥에게 목숨을 구걸할 일이 있었을까.
 
유흔…….’
 
서란은 다시 한 번 마음 속으로 유흔을 불렀다. 유흔이 온다면 자신은 더 이상 자여의 생()을 명분으로, 목숨을 구걸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유흔, 어디 갔어?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나 여기 있어. 빨리 와, 유흔. 빨리 와.’
 

 
유흔이 가주의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는, 서란이 품 속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정옥에게 내보이고 있을 때였다. 정옥은 주머니 끈을 푸르고, 안에 든 것을 책상 위에 꺼내놓았다. 주머니 안에서 나온 것은 다름 아닌, 찻잔 조각이었다.
 
제 시녀 중에 춘심이라는 이가 있었지요.”


……?”


가주님께서는 그이가 내는 차를 마셔보신 적이 없으시지요?”
 
정옥에 대한 호칭은 어느새 이모님에서 가주님으로 바뀌어 있었다. 정옥은 시종을 불러 차를 따르게 했다. 방 안에 들어서던 시종이 유흔이 왔음을 고하려 하였지만, 유흔은 손을 들어 시종의 입을 막았다.
 
이도다완이군요.”
 
서란은 마치 찻잔을 감상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정옥은 찻잔을 들어올리고, 찻잔받침으로 받쳤다.
 
역시 가주님이십니다. 천자께옵서도 쉬이 구하지 못하는 이도다완을 쓰시다니요.”


사비국 상인들이 예물로 바친 것이다. 사비국에서는 이토록 훌륭한 찻잔을 만드는 사기장을 천하게 여긴다 하더구나. 멍청한 것들. 제 나라 사기장들이 만드는 찻잔이 이 가유는 물론, 부상국 전체에서 인기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말이다.”
 
다도에 대한 이야기 속에 어떠한 칼을 품고 있는지 어디 한 번 꺼내놓아 보거라. 정옥의 말이 유흔에게는 그렇게 들리고 있었다. 유흔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께를 꼭 움켜쥐었다.


서란은 지금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정옥은 이제 서란이 무슨 말을 할지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러고서 마치 수풀에 숨어 먹잇감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맹수처럼, 찻잔에 대한 이야기로 교묘하게 자신을 숨기고, 서란이 제 입으로 이야기를 꺼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흔은 눈을 감았다. 지금으로서는 서란이 정옥의 덫에 걸렸을 때, 자신이 나서서 서란을 꺼내주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말차란, 차 중에서도 가장 거친 차를 말함이지요. 말린 찻잎을 짓이기고 가루 내어 만든 탓에, 씁쓸한 맛은 그 어느 차에도 비할 수 없고, 거칠기 또한 덜 걸러진 모래와 같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차를 마시는 것은, 삶의 쓴 맛을 되새기며 스스로의 삶에서 중심을 잡고자 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래, 말차의 도()에 대해 무척 잘 알고 있구나.”


또한 거친 말차를 소박한 잔에 담아 마시는 것은, 겉모습의 허영보다 내면의 삶에서 중심을 잡는 일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되새기기 위한 것이지요.”
 
말차의 도(). 자신이 즐기는 것에는 무엇이든지, 길이나 방법, 혹은 어느 경지를 의미하는 도()를 붙이기 좋아하는 부상국인들의 관습은 참 많은 도를 만들어내고는 했다. 그러나 서란에게 말차는 결코, 도가 될 수 없었다. 서란은 말차를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서란은 말차를 즐기는 정옥에게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말차의 도를 운운하는 것뿐이었다<다음 글 계속>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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