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규명 참회없는 용서, 강요하지 말라"[오영길 칼럼, 문학평론가 겸 충남대 교수] 후회도 반성 없는데...나는 주로 학부에서 비평이론/문화이론을 강의한다. 그 수업의 입문시간에서 먼저 하는 말이 있다. 원래부터 좋거나 나쁜 개념은 없다는 것. 예컨대 자유, 평등, 애국, 사랑, 국가, 민족 등이 개념이 그렇다. 이들 개념을 이해하려면 그 개념의 사회역사적 의미를 구체적으로 따져봐야 한다. 그리고 이 개념들은 맥락의 변화에 따라 그 함의가 달라질 수 있다고 가르친다. 하나의 개념이 어떤 맥락에서는 좋은 의미를 지닐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맥락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태어날 때부터 좋은 개념은 없다. 비평의 기본은 개념이 사용되는 맥락의 역할을 이해하는 것이다. 용서, 화해, 통합 등의 개념도 마찬가지다. 통상 이들 개념은 좋은 말이라고 여겨진다. 그렇지 않다. 역시 맥락이 문제다.
탄핵이 끝나자마자, 용서, 화해, 통합 등의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위임된 최고권력자의 탄핵이 끝나자마자, 용서, 화해, 통합 등의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런 말들을 들으면서, 오래전 영화가 생각났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이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의 핵심적 주제는 용서의 문제다. 자신의 의도하지 않은, 부주의한 말실수 때문에 주인공은 아들을 잃는다. 그 사소한 말실수 때문에 어린 아들이 유괴당해 살해당한다. 엄청난 자책감과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그럴 때 아이를 살해한 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 이 영화의 힘은 이 어려운 질문에 손쉬운 답을 내놓지 않는다는 데 있다. 마음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종교에 귀의한 주인공은 어려운 결심 끝에 살인자를 용서하겠다고 교도소를 찾아간다. 거기서 발견한 놀라운 사실. 살인자는 이미 종교에 귀의했고, 자신이 믿는 신에게 용서받았다고 편안한 얼굴로 말한다. 그 말을 듣고 주인공은 하늘에 삿대질을 하며 절규한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당신이 먼저 용서할 수 있느냐고, 이런 장면들 때문에 이 영화는 반종교적인 영화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던져야 할 질문은 그게 아니다. 관건은 인간의 용서와 신의 용서 사이의 관계와 차이다.
신의 용서에 대해서는 우리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다. 그건 인간인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개입할 수 없는 신적 영역이다. 하지만 인간의 용서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영화 〈밀양〉의 질문이 그것이다. 아들을 잃은, 절대적 절망감으로 고통받는 엄마/피해자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과연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은 가능한가. 그것은 용납될 수 있을까. 신은 그럴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그럴 수 없다. 영화 〈밀양〉의 강력한 메시지다. 한국사회의 문제 중 하나는 이 어려운 용서와 화해라는 말을 너무나 쉽게 내놓는다는 것이다.
용서, 화해, 관용 등의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탄핵으로 권좌에서 쫓겨난 위임권력에 대해서도 다시 그런 말이 나온다. 용서와 화해라는 좋은 말을 읊조린다. 마치 그런 말을 더 많이 할수록 좋은 시민, 좋은 정치인이 되는 것처럼. 그러나 신의 용서가 아닌, 인간의 영역에서 용서, 화해, 관용 등의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특히 힘 있는 가해자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혹은 그 일에 직접 개입되지 않은, 제3자가 할 수 있는 말도 아니다. 아무나 떠들면 되는 좋은 말이 아니다.
진실규명과 참회가 없는 용서는 앞뒤가 뒤바뀐 것이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입니다." 무슨 의도로 말했는지 짐작이 가지만, 나는 이 말을 애써 선의로 해석하고 싶다. 앞으로 다양한 경로를 통해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진실"을 명확히 밝히고 엄중한 책임을 묻기 위해 사법기관은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 어떤 의혹도 남겨서는 안된다. 그렇게 "진실"이 만천하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다음에야, 그때 비로소 시민들은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기 전에 정치인들이나 언론이 나서서 국민통합 운운하며, 섣부른 용서와 화해를 주장해서는 안된다.
후회의 표시를 보이고, 적으로 남아 있기를 포기할 때만 용서는 가능하다. 나치의 박해로 간신히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의 자서전 〈주기율표〉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레비는 분명하게 용서의 조건을 말한다. "후회의 표시"를 보이고, "적으로 남아 있기를 포기"할 때만 용서는 가능하다. 여전히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참회하지도 않고, "남에게 고통을 가하려는 고집스러운 의지를 고수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용서"해서는 안된다. 그럴 때 "의미 있는 일은 그를 심판하는 것"이다. 함부로 용서와 화해를 말하는 이들이 기억해둘 말이다.
출처: 오영길 문학평론가, 충남대 교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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