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고 뉴스] 이진우 /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센터 소장 = 1960년 4월 19일, 한 달 전 치러진 3.15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으로 학생과 시민들이 궐기했습니다. 그 결과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하와이로 갔습니다. 시민이 스스로의 힘으로 주권을 찾아온 것이죠.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1년 후 1961년 5월 16일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에 의해 권력은 시민으로부터 탈취되었습니다. 그 후 시민이 주권을 되찾기까지 무려 26년이 걸려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첫 번째 시민혁명은 미완의 혁명으로 역사 속에 기록되게 되었습니다.
1987년 6월, 고문으로 희생당한 박종철, 최루탄 맞고 현장에서 쓰러진 이한열, 그리고 이를 조작하고 은폐하려는 군사정권에 맞서 학생과 시민들이 또다시 궐기했습니다.
광주 민주항쟁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던 전두환 정권은 서울 한복판 명동에서 벌어지는 시민항쟁에 대해 더 이상의 강경기조는 불가능하다고 판단, “노태우의 6.29선언”이라는 승부수를 던집니다.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하면서 김대중-김영삼-김종필 등 3김 씨에 대한 정치활동 규제를 전격적으로 풀어줍니다. 양김의 후보단일화가 어렵다는 전제 하에 어부지리 승리를 노린 거죠. 그 예상은 정확하게 적중하여 노태우가 36%의 지지만을 얻고도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두 번째 시민혁명은 또다시 미완의 혁명으로 역사 속에 기록되게 되었습니다.
2017년 3월 10일, 최순실 국정농단과 세월호 부실 대응으로 국회로부터 탄핵소추를 당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탄핵 인용 및 파면 결정을 내렸습니다.
작년 10월 29일 첫 촛불집회가 열린 후 134일간 20차례에 걸쳐 누적 참가자수 1600만 명이 모였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사망자도 부상자도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4.19 혁명 당시에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희생되었고, 6월항쟁 때에도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무고하게 목숨을 잃었지만, 이번 촛불시위는 평화적으로 진행되면서도 권력을 남용한 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결과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야인 신분이 되어 청와대에서 축출되었고, 끝내 유신정권의 잔재가 걷혔습니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세 번째 시민혁명이 되어서야 ‘미완’딱지를 뗐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난 60년간 권력과 시민이 어떻게 변화해왔냐는 것입니다. 이승만의 하야, 전두환의 꼼수, 박근혜의 억지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권력은 전혀 변화하지도 진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은 각각의 30년을 사이에 두고 조금씩 역량을 키워나가면서 완전체로 진화해갔습니다. 사법부와 언론이 더 이상 권력의 편에 설 수 없도록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낸 것이야말로 가장 놀랍고도 주목할 만한 변화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틀 안에서도 충분히 권력을 벌할 수 있고 주권을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야말로 한국 역사는 물론 세계사 속에서 불멸의 기록으로 남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진우 /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센터 소장 원본 기사 보기:신문고뉴스 <저작권자 ⓒ 인터넷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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