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키야트-아이누의 후손이다"

[연재] 소설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 피다' 푸른 늑대의 후손(1)

이슬비 | 기사입력 2017/02/19 [11:57]

"우리는 키야트-아이누의 후손이다"

[연재] 소설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 피다' 푸른 늑대의 후손(1)

이슬비 | 입력 : 2017/02/19 [11:57]

본지가 이슬비 작가의 소설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 피다'를 연재한다. 작가 이슬비는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를 전하는 일을 한다고 스스로 소개한다. /편집자 글

 

우리는 키야트-아이누의 후손이다. 부상국의 북쪽 끝, 온통 눈으로 뒤덮인 땅, 북해도의 제화족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으레 그런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고는 했다.

 

아이들이 긴 겨울밤을 지새우기 위해 지루해도 억지로 듣는 조상들의 이야기라든가, 키야트-아이누의 시조신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또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두 눈을 반짝이며 듣는 무녀 훌란의 이야기라든가, 제화족과 삼백족 사이에 있었던 7년 전쟁의 이야기를 시작할 때는 물론이고, 키야트-아이누라는 이름과 하등 상관 없어 보이는 제화족의 시조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나, 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도, 제화족의 어른들은 으레 그런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고는 했다.

 

우리는 키야트-아이누의 후손이다. 그 말이 제화족의 삶에 무슨 영향을 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시작할 때마다 으레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제화족에게 있어서 그 말은 단순한 되뇜이 아닌, 어떤 중요한 주문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서란은 생각했다.

 

 

부상국의 북동쪽, 부상국의 북쪽 끝에서도 가장 끝에 위치한 가유의 겨울밤은 무척이나 차갑고도 길었다. 때는 겨울이니 시리디 시린 차가운 밤공기에 손발이 얼어붙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 그러나 이 추운 날씨에도 한씨가의 37대 가주 정옥의 조카 서란은 밖에 나와 홀로 나무인형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kirie, kirie, kirie, kirie, eleison……

 

가유의 영주 가문 한씨가의 본성, 가라고루성에서는 불릴 수 없는 노래가 서란의 귓가에 들리고 있었다. 서란은 노래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래가 들려온 곳은 서란의 등 뒤. 동쪽 회랑이었고, 그곳에는 한 남자가 두툼한 양털을 누벼 만든 망토를 들고 서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kirie, eleison…….”

 

서란은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나 회랑의 나무 난간에 발을 디뎠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넘기에는 너무 높은 난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자꾸만 다리를 위로 걸치려는 서란의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고, 이제는 난간의 가장 아랫부분에 디뎌져 있는 서란의 한쪽 발마저도 위태롭게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잡아.”

 

난간 너머로 서란의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가 망토를 한쪽 어깨 위에 얹고, 두 손을 내밀었다. 서란은 남자가 내민 두 손을 잡고 난간 위로 끌어올려졌고, 남자는 그런 서란을 얼른,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애그, 우리 화야.”

 

화야. 남자가 은밀한 목소리로 서란의 또다른 이름을 불렀다.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은밀한 목소리에 서란의 입가에는 점점이 미소가 번져가기 시작했다.

 

유흔.”

 

서란의 입에서 남자의 이름이 불려나왔다. 서란의 입에서 유흔이라고 불린 남자는 얼굴을 숙여 서란의 볼에 입술을 맞췄다.

 

들어가자.”

 

서란의 몸에 양털 외투가 둘둘 감겼다. 마치 갓난아기가 강보에 싸이듯, 온몸을 둘둘 감싸인 서란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회랑을 지나는 발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내내, 서란은 품속에서 꺼낸 목각 인형을 망토 밖으로 내밀어 흔들고 있었다.

 

 

유흔이 방을 비우고 있었던 시간이 꽤 오래되었던 것인지, 등불 하나 밝혀져 있지 않은 유흔의 방 안에는 냉랭한 한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 까닭에, 차가운 겨울 날씨 속에 오랫동안 밖에 있었던 서란의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추워?”

 

유흔은 서란을 안고 있는 팔에 더욱더 힘을 주며, 서란을 품 안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 유흔은 탁자 위를 더듬어 부싯돌을 찾아 등과 화로에 불을 밝혔다.

 

이제 화로에 불을 밝힌 탓에, 방 안은 아직도 쌀쌀하기만 했다. 유흔은 화로의 불을 더욱 더 높이고는, 동글동글한 경단 여러 개를 긴 꼬챙이에 끼우기 시작했다.

서란은 자리에 앉아 유흔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유흔은 설탕물을 경단에 바르고, 화롯불에 구웠다.

 

긴 겨울밤을 지새우기에는 옛날이야기와 경단만한 것이 없었다. 겨울이 되면 유흔은 제화족의 다른 어른들이 하는 것처럼, 밤마다 서란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며, 설탕을 바른 경단을 화롯불에 구워주었고, 서란은 제화족의 다른 아이들이 하는 것처럼 유흔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경단이 다 구워지기가 무섭게 먹어치우기에 바빴다.

오늘도 유흔은 서란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지에 대해 고민하는 듯한 눈빛으로 화롯불 위에 올려진 경단 꼬치를 바라보고 있었고, 서란은 그런 유흔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탁자 위를 톡톡 두드렸다.

 

이윽고, 유흔이 서란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지 결정했다는 듯이, 서란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서란 또한 유흔이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지 알겠다는 듯한 눈빛으로 유흔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마치 눈빛만 보아도 통하는 사이인 것 마냥 서로 미소를 지어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은 한없이 평화로워보였다.

 

유흔이 다 구워진 경단꼬치를 서란에게 건네주었다. 서란은 경단을 받자마자 꼬챙이 끝에서부터 하나씩 빼먹기 시작했고, 유흔은 조금 천천히 먹으라며 서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란이 경단꼬치 하나를 다 먹어치우는 사이, 유흔은 큼큼,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 옛날, 아주 오랜 옛날에, 하늘도 없고, 땅도 없고, 바다도 없고, 해도 없고, 달도 없고, 빛도 없던 시절에, 이 세상에는 끝도 없는 어둠밖에 없었어.”

 

어느 날, 그 끝도 없는 어둠 속에서 한 신이 태어났다. 신은 태어나자마자 스스로의 이름을 카무이라 짓고는, 자신이 태어난 어둠의 심연을 바라보았다.

 

이 어둠을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나는 절대 이 세상을 다스릴 수 없겠구나.’

 

이 세상을 다스리고 싶었던 카무이 신은 빛을 만들어 어둠을 물리치기로 하였다. 이윽고, 카무이 신은 자신의 두 눈을 뽑아 어둠 속으로 던졌다. 어둠 속에 던져진 카무이 신의 두 눈은 각각 해와 달이 되어 어둠을 밝혔고, 어둠은 해와 달을 피해 저 멀리 달아나 숨어 바다가 되었다.

그때, 어둠은 도망치면서 아주 자잘한, 스스로의 잔해들을 길게 뿌렸는데 그것이 별이 되었고 하늘에 박혔고, 이제 세상은 하늘과 바다로 나뉘게 되었다.

 

하늘과 바다로 나뉜 세상을 바라보며 흐뭇해하던 카무이 신은 문득, 하늘과 바다 사이를 이을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다. 비록, 자신이 만든 해와 달에 패해 도망쳐 바다가 된 어둠이지만, 결국, 자신을 낳아준 것은 어둠이라는 사실을 카무이 신이 부정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늘과 바다 사이를 이을 무언가를 만들기로 결심한 카무이 신은 할미새를 불러, 하늘과 바다 사이를 이을 무언가를 만들라 명령하였다. 카무이 신의 명령을 받은 할미새는 사흘 밤, 사흘 낮을 고민한 끝에, 커다란 숭어를 바다 위에 띄우고, 부리로 조금씩 진흙을 물어다 숭어의 등 위에 쌓아 땅을 만들었다.

하늘과 바다 사이에 생긴 땅을 보고 카무이 신은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숭어가 너무 심하게 요동을 치는 바람에 땅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을 위기에 처하였고, 이를 본 카무이 신은 두 명의 신들에게 명령해, 바다 밑으로 들어가 숭어의 머리와 꼬리를 잡고 있게 하였다.

하지만 신들도 이따금 지칠 수밖에 없는 나머지, 잡고 있는 숭어의 머리와 꼬리를 놓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땅이 크게 흔들려 지진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유흔.”

?”

 

이야기를 듣던 서란이 유흔을 불렀다. 유흔은 서란이 먹어치운 꼬챙이들에 다시 경단을 끼우며 서란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유흔을 불러놓고도 서란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어느새 방 안의 공기는 급격하게 가라앉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뿐인 방 안에는 한동안 화로의 불꽃이 타닥이는 소리만이 들릴 뿐, 자그마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흡사 무덤과도 같은 깊은 침묵이 방 안을 감싸고 있었다.

 

어느새 설탕물이 다 떨어져가고 있었다. 유흔은 장식장 안에 넣어둔 설탕그릇을 들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설탕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탁자 위에 놓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방 안을 감싸고 있던 침묵도 사라지고 있었다.

 

할미새는 어떻게 생겼어?”

 

쿵쿵, 하고 막자사발에 막자가 부딪치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유흔은 설탕그릇에서 각설탕을 몇 개 꺼내 막자사발에 넣고, 막자로 잘게 부수어 가루로 만들었다.

 

서란이 유흔에게 할미새는 어떻게 생겼느냐 물어왔지만 유흔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응? 응? 유흔, 할미새는 어떻게 생겼냐니까?” 

 

대답 대신, 방 안에 울리는, 쿵쿵, 하고 막자사발에 막자가 부딪치는 소리가 서란의 귓가에 들려왔다. 서란은 유흔의 팔을 잡아 흔들며 묻기 시작했다. 

 

“유흔, 유흔, 나 좀 봐.”

 

“…….”

 

“유흔, 유흔, 대답 좀 해줘.” 

 

“…….” 

 

“유흔, 유흔, 할미새는 어떻게 생겼냐니까?” 

 

대답을 종용하는 서란의 끈질긴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유흔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유흔은 그저 각설탕을 잘게 부수어 가루로 만드는 데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설탕그릇에 담긴 각설탕이 모두 고운 가루가 되자, 유흔은 곱게 빻아진 설탕가루를 그릇에 담고 주전자에 담긴 뜨거운 물을 부었다. 유흔이 빈 설탕그릇을 다시 장식장 안으로 들여놓으려는 순간이었다, 서란이 다시 유흔의 팔을 잡아 흔들기 시작한 것은. 

 

그리고 그 순간, 쨍그랑,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설탕그릇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하얀 사기 바탕 위에 그려진 푸른 용이 파편이 되어 이리저리 흩어지자, 서란은 그제야 붙잡고 있던 유흔의 팔을 놓아주었다. 

 

“깨지기 쉬운 거 들고 있는 사람한테는 장난치면 안 된다고 했지?” 

 

“나 장난한 거 아니야.” 

 

“화야.” 

  

유흔의 목소리가 무섭게 변했다.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겁에 질린 표정으로 몸을 잔뜩 움츠렸다. 

 

“네가 다칠 뻔했어.”

 

“……?”

 

“네가 다칠 뻔했다고. 화야, 네가 다칠 뻔했어. 네가.”

 

허리를 숙여 깨진 그릇조각을 주우려는 유흔의 손에 서란의 작은 손이 얹혔다. 마치 고사리처럼 작은 서란의 손을 들여다보던 유흔이 피식, 웃으며 서란의 몸을 품 안에 끌어당겨 안았다. 

 

“위험하니까 저리 멀리 떨어져 있어, 응?” 

 

유흔은 서란을 한 번 꼭 안아주고, 품에서 떼어내려 하였다. 그러나 서란은 더욱 더 유흔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어깨에 얼굴을 비벼대었다. 유흔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나는 너의 고집을 당해낼 재간이 없나보다고 중얼거리며, 유흔은 다시 한 번 큼큼,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야 카무이 신이 만들었지. 카무이 신은 하늘과 바다를 만들고 난 뒤에 문득, 이 세상에서 생명을 가지고 살아 숨 쉬는 존재가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이 무척 외롭게 느껴졌어. 그래서 카무이 신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가지고 살아 숨 쉬는 존재를 만들기로 했어.” 

 

카무이 신은 자신의 등에서 피부를 벗겨내 몇날 며칠을 잘게 부수고 갈았다. 카무이 신은 그렇게 갈아낸 자신의 피부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피부라고 보기에도 어려운, 피에 젖은 고기반죽들을 바라보던 카무이 신이 이윽고, 팔을 베어 자신의 피를 그 위에 떨어뜨렸다. 그렇게 살점들이 모두 피에 젖도록 피를 흘린 카무이 신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뜬 카무이 신은 눈앞의 세상이 빙빙 도는 것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살점들을 찾았다. 그러나 피에 젖은 살점들은 온데간데 없었고, 카무이 신의 곁에는 ‘진흙’이 놓여 있었다. 

 

“카무이 신은 진흙으로 풀이며 나무며 꽃이며 하는 온갖 식물들과, 곰이며 호랑이며 표범이며 하는 온갖 동물들의 형상을 빚어 만들고, 자신의 눈물을 떨어뜨려 형상들이 살아 숨 쉬게 했어. 그렇게 세상에는 살아 숨 쉬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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