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길흉은 사람 뜻에 달렸느니”

[김계유의 주역속으로⑥] 무망괘(无妄卦)와 하늘 형통한 이치

김계유 | 기사입력 2008/03/12 [11:33]

“세상의 길흉은 사람 뜻에 달렸느니”

[김계유의 주역속으로⑥] 무망괘(无妄卦)와 하늘 형통한 이치

김계유 | 입력 : 2008/03/12 [11:33]
전한의 경방(京房)은 자가 군명, 출신은 동군 돈구현이었다. 역을 익히기 위해 양나라 사람 초연수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자신을 찾아온 경방에게 초연수가 말했다. “우리의 역을 익혀 몸을 망칠 사람은 경방일 것이다.”

초연수의 역설은 재해나 변이를 예측해서 적중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60의 괘를 나누어 각각 1년의 날수에 해당하는 점을 쳐서 사용하였다. 오늘은 무슨 괘이기에 바람이 불고 혹은 비가 온다든가 그 외 추위와 더위, 길흉화복을 불러온다는 식으로 맞추는 점이었다.

그가 내린 판단은 각 점마다 표시가 있어서 판단이 확실했다. 경방은 이것을 이용한 역의 해석에 대단히 정통하였다. 그는 또 음률을 좋아하여 음악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효원제 때 효렴과에 추천되어 숙위관이 되었다. 당시 그는 석현, 오록총중과 틈이 벌어져 있어서, 그들이 나쁜 험담을 한 덕분에 좌천되어 위군태수가 되었다.
 
“경방은 역으로 몸을 망칠 사람”
 
그는 지금까지 대신들의 비리에 대해 자주 논박을 했었기 때문에 자신 또한 같은 처지에 놓일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천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것은 태수가 되어 자신이 부재중일 때 비난이나 듣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봉서를 받들어 천하에 재앙의 기운이 있다는 사실을 천자에게 고했다.

석현은 이것을 듣고 경방이 정치를 비난하면서 죄악을 천자에게 돌리고 제후와 임금을 속인다며 천자에게 고소를 하였다. 결국 그는 처형되어 시체가 시장에 내걸렸다. 그의 성은 본래 이씨였다. 그러나 음률에 비추어 맞지 않다고 하여 스스로 성을 경씨라 불렀다.

만학의 제왕이요, 천지자연의 이치를 포괄하는 역이라도 올바른 뜻으로 받아들여 활용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자기 자신의 몸을 망치는 지경에 이르는 예가 바로 이와 같다. 오직 세상의 모든 일은 사람의 뜻과 마음에 달려 있으니 역을 통해 본받을 바도 바로 그뿐임을 이 고사는 분명하게 일깨워주고 있다.

역에 있어서는 점으로 그 기능을 활용하더라도 그 점괘에 걸맞은 덕이 점을 치는 자에게 반드시 갖춰져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공자의 주장이었다. 공자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점서의 기능에 머물러 있던 역을 사람의 덕을 기르는 매개체로서 그 특징을 발전시켰다.

사마천의 사기에 보면 공자는 늘그막에 역을 좋아했다고 적고 있다. 또 마왕퇴에서 출토된 백서 요편에도 “선생께서는 늘그막에 역을 좋아하셔서 평소에는 자리에 두고 계시다가 길을 가실 때는 책자루에 역을 넣어 다니셨다”고 되어 있다.
 
“점괘에 걸맞은 덕을 갖춰야”
 
이처럼 역에 매료되어 살아가던 공자의 의중은 천지자연의 이치에 입각한 도덕 수양의 매개체로 역을 받아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논어 자로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점을 할 것도 없을 만큼 (덕이 항상해야 한다는 말은) 정말 틀림이 없다.”

사람의 덕은 항구하여야 한다.(뇌풍항괘 구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국 사람들 사이에 전해오는 말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으로서 한결같이 그 뜻을 고수하지 않으면 무(巫)도 의(醫)도 될 수 없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 덕을 항상하게 하지 않으면 남에게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된다.”

춘추시대 선공 12년이었다.(지수사괘 초육) 晉의 군대가 鄭을 구하러 나섰을 때 정나라가 이미 초와 화평을 맺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에 군대를 인솔하던 환자(荀林父)가 바로 군사를 되돌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체자는 환자의 말을 쫒지 않고 자기가 이끌던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넜다.

그때 체자의 무모함을 지장자는 지수사괘의 초육효에 근거하여 이렇게 비난하였다. “이 군사는 위태롭다. 주역에 있기를 군대가 전쟁에 나갈 때는 율령으로써 해야 하니, 그렇지 않으면 뜻이 좋더라도 흉하다고 하였다.”

이는 체자가 율령을 어긴 출진이니 필연코 실패하여 화를 불러들이리라는 혹평이다. 이것도 의미는 덕의 항상함에 있다. 체자가 어긴 율령이란 올바른 덕에 벗어났음을 비난한 것이다.
그러므로 역에 이르길 “처음으로 돌아가 바른 도를 따라 나아가면 무슨 재앙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춘추는 진목공을 어질다 하였는데, 그가 능히 과거의 잘못을 고쳐 바꿀 수 있었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순자 대략) (풍천소축 초구)
 
“바른 도로 나가면 재앙 있겠나?”
 
유시람(有始覽)도 마찬가지다. ‘돌아가 올바른 길로 말미암으니 무슨 재앙이 있겠는가? 길하다.’ 근본으로 돌아가 시종일관 다름이 없으면 끝내 기쁨만 있게 된다는 뜻이다.(有始覽, 務本편)

그렇다면 역에서 가르치는 교훈으로 보면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근본으로 돌아가는 길인가? 그것은 거듭 강조하듯이 계사전에서 말하는 인(仁)과 의(義)다.

“옛적 성인이 역경을 지으실 때 장차 성명(性命)의 이치에 따르고자 하심이니 이로서 하늘의 도(道)를 세워서 음(陰)과 양(陽)이라 하고, 땅의 도(道)를 세워서 유(柔)와 강(剛)이라 하고, 사람의 도를 세워서 인(仁)과 의(義)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사람의 도리가 인(仁)과 의(義)라면 이와 같은 인(仁)과 의(義)가 하늘의 변화하는 법칙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게 하는 내용의 설명이다.

따라서 맹자는 주장하기를 사람은 하늘에 근본을 두고 있는 까닭에 누구나 마음을 온전하게 드러내면 그 본성을 알 수 있고, 그 본성을 알게 되면 하늘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맹자에게 있어서 인간의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보존하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도리로 통한다는 점에서 그의 성품에 관한 시각은 성선설이 된다.

역에서 보면, 아마 천뢰무망(天雷无妄)이 그 원리를 충실하게 반영하는 괘상이 될 것이다. 천뢰무망이라고 하면 위가 하늘괘, 건(乾)이 되고, 아래가 우뢰가 진(震)이다.

하늘이 위에 있으면서 아래의 지향하는 바가 되어 우뢰로 힘차게 움직이는 모습이 흡사 하늘의 이치를 적극적으로 회복하고자 움직이는 괘상에 속한다고 여겨지므로 이것은 곧 그 의미에 있어서 망령됨이 없는 무망(无妄)이다.
 
본성을 알면 하늘의 뜻 알아
 
천뢰무망이 망령됨이 없는 무망이 되는 이유를 두 가지로 분류하면 이렇다. 첫째 바깥은 하늘의 굳세고 공정(公正)무사(無私)한 건(乾)이고, 안으로 강(剛)이 밖으로부터 와서 회복하고자 하는 우뢰의 괘상이니 역시 무망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둘째 하늘의 중인 구오에게 안의 육이가 서로 바르게 호응하는 이치도 또한 무망이 되는 또 하나의 이유다. 

하늘 아래 우뢰가 행해지고 있다면 이는 봄이 되어 만물이 무성하게 힘을 얻는 때다. 그 까닭에 상전에서는 일체 만물마다 무망을 준다(물여무망物與无妄)고 했고, 선왕은 이를 본받아 무성한 때를 대하여 만물을 양육한다고 하였다.

초구는 초구의 양강으로 회복해오는 아래 우뢰의 주효다. 이는 그야말로 무망이니 가면 길하다. 상전(象傳)에서는 무망(无妄)으로 나감은 뜻을 얻는다고 하였다. 그 까닭은 괘상에서 보여주듯 무망(无妄)의 본질이 사사롭지 않음에 있기 때문이다. 무망(无妄)의 두 번째 효사 육이(六二)는 밭갈지 않아도 수확을 하며 1년 된 밭을 만들지 않고도 3년 된 밭이 되니 갈 바를 두면 이롭다.

곧 하늘의 작용은 사람이 하고자 하는 바에 있지 않으니 밭 갈지 않아도 수확할 수 있음은 하늘의 형통함이요, 그 뒷부분의 의미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1년 된 밭의 풀을 갈아엎어 만든 밭이라는 뜻의 치(菑)라 하고 3년 된 밭을 여(畬)라 하니 치를 만드는 것은 사사로운 마음이요, 여(畬)가 되는 것은 六二가 구오의 마땅한 하늘의 법도를 쫓는다는 뜻이다. 대신 구태여 밭을 갈아 음식을 가꾸고자 하지 않아도 하늘은 절로 만물이 자라나게 그 덕을 베푸니 이야말로 만물을 길러 형통하게 계사전의 인(仁)과 의(義)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밭 갈지 않아도 수확하는 형통
 
그래서 천뢰무망의 상전(象傳)에 보면 하늘은 모든 만물마다 망령됨이 없는 덕을 부여한다고 하였다. 세상의 만물이 하늘과 땅의 이치를 벗어나서 존재하는 개체는 찾아볼 수 없고, 하늘의 기운을 내려 받아서 만물이 전개되고 있다면 이는 만물의 본질이 곧 하늘의 덕에 통해 있다는 뜻이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불교의 금강경에서도 제 삼장 대승(大乘) 정종분(正宗分)에서 세간의 모든 생명체가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모조리 열반에 들어 있노라고 세존께서는 선언하고 계신다.

또 기독교의 성경인들 다르랴.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 들에 피어나는 꽃, 어느 것 하나 하느님의 피조물 아닌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인간은 곧 하느님의 덕을 그대로 힘입고 있는 하느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역의 천뢰무망괘는 이와 같은 보편적인 세상의 이치를 그대로 보여주는 구체적인 괘상이다. 다만 역은 다른 종교나 철학체계와 달리 그 이치의 전개 양상이 음과 양의 형식에 의존하고 있다는 차이점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의존하는 음양(陰陽)! 그것은 죄악일까?

이는 보기 나름이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이를 죄악시한다면 죄악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을 만물이 전개되는 하늘의 고유한 법칙으로 파악한다면 음과 양의 작용은 죄악이라기보다는 신기한 하늘의 묘한 작용으로 이해되어진다.
 
병 같아도 약을 쓰지 말지니...
 
이를 병으로 본다면 우리의 모든 세상살이는 당연히 병든 모습의 결과로 여겨진다. 이를 병이 아닌 하늘의 묘한 작용으로 이해한다면 세상 만물의 일체 현상은 하늘의 묘한 작용의 결과로 받아들여진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이렇게 세상의 만물이 지닌 의미를 전혀 색다른 모습으로 이해하게 되는 출발점이 된다. 그래서 천뢰무망괘의 구오(九五)에서도 이를 병이 아닌가 여기더라도 약을 쓰지 말라고 말한다.

하늘의 운행 작용이 결코 병든 죄악의 형태로 전개되고 있지 않다는 확신 그것을 우리는 역의 무망괘에서 보아야 한다. 음과 양으로 모든 만물이 전개되지만 그것은 업(業)이나 원죄가 아니다. 오로지 하늘의 형통한 이치일 뿐이다. 그 밖에 무엇이 있겠는가? 역의 기능이 점치는 쪽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기능의 근본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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