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는 ‘파로호’ 잔잔한 수면위 참회눈물

정전 60주년 DMZ평화기행, ‘화천전투’ 수만명 사망자 위령제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13/06/01 [01:25]

말없는 ‘파로호’ 잔잔한 수면위 참회눈물

정전 60주년 DMZ평화기행, ‘화천전투’ 수만명 사망자 위령제

최방식 기자 | 입력 : 2013/06/01 [01:25]
한국전쟁 당시 남한·미군과 북한·중공군 사이 치열한 공방전에 수만명이 전사한 화천댐(파로호 또는 대붕호)전투 현장에서 포성이 멎은 지 60년만에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제가 열렸다. 해원 살풀이굿과 참전 군인들의 영상증언, 그리고 일제강점기 댐 건축 때 강제노동을 했던 한국인 징용자의 증언이 이어졌다.

‘화천댐과 한국전쟁 희생자 한중미일 시민공동추모위’와 ‘아시아평화시민네트워크’(대표 이대수)는 지난 24일부터 사흘간 강원도 화천댐과 양구 비무장지대(DMZ) 일원에서 한일 역사학자와 평화운동가, 그리고 일반 시민 4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평화투어를 가졌다. 한국전쟁 60주년 겸 화천전투(5월) 62주년을 기념한 행사다.

이번 투어의 가장 중요한 행사는 첫 날인 24일 화천댐에서 시작됐다. 파로호(破虜湖, 화천호) 전망대 마당에서 한국전쟁 희생자 및 일제강점기 댐 건설에 징용됐다 희생된 수만명의 원혼을 위로하는 합동 위령제가 열린 것이다.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 뵈는 곳에 제단을 차리고 대금과 해금 및 기타 합주 속에 살풀이가 시작됐다.

전통무용가인 이혜경 군포 수리무용예술단 대표와 신애자 선생이 아픔을 치유하는 몸짓으로 살풀이를 이어간다. 원한을 씻고 해원상생을 바라는 간절함이 묻어난다. 화천전투 참여자인 김달육 선생을 비롯한 참석자 대표의 헌향과 헌주에 이은 여행단 전원의 헌향과 절이 뒤따랐다.
 
▲ 한국전 당시 중공군 2만2천여명을 포함해 수만명이 전사한 ‘화천전투’의 현장 화천댐(파로호). 아픈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희생자 위령제가 현지에서 열렸다.     ©이대수
▲ 일제가 대륙침공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려고 1944년 완공한 화천댐. 조선인의 수많은 공물과 징용(사망·부상) 위에 세워진 108MW 발전용량의 수력댐.     ©이대수

호수동산서 해원상생 살풀이춤

이어진 세분 악사의 위령 연주, 그리고 ‘화천평화선언’이 파로호 위로 울려 퍼졌다. 해원과 화해, 그리고 평화를 염원하는 참배자들의 염원이 전해졌을까? 한 여성 참여자(불성사 보살)는 위령제 때 굵은 초가 떨어뜨리던 촛농을 보고 “죽은 혼령의 눈물”이라고 말했다. 말없는 파로호 그 위로 떨어지는 참회의 눈물이리라.

파로호 얘기 좀 더 하자. 이름에서 풍기듯, 전쟁 중 이승만 대통령이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며 그리 부른 이후 바뀌었다고 한다. 전쟁 중인 1951년 5월 20일 댐을 차지하려고 총공세를 편 중공군 20군단 예하 3개 사단의 ‘춘계대공세’에 맞서 한국군 6사단과 미군 17연대가 치열한 접전 끝에 승리하고 생긴 일이다.

국방부에 따르면, 중공군 2만2천여명이 이 호수에 수장됐다고 한다. 한국전쟁사를 뒤져보면 이보다 1달 앞선 용문산전투와 연결된다. 중공군 3개 사단은 용문산에서 한국군 6사단과 ‘4월공세’ 접전을 벌였는데, 거기서 밀려 화천에 다다라 대패를 한 것. 한국군은 전적을 화려하게 포장해놓았으면서, 화천전투(643고지전투) 피해는 기록해놓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반공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는 ‘파로호’를 옛 이름 그대로 ‘대붕호’라 불러야겠다. 일제의 강압과 거짓에도 꿋꿋하게 살아남은 이름이니까. 일제는 강점기 때인 1939년 대륙진출을 위한 에너지원을 마련할 취지로 화천댐 건설을 시작했다. 5년간 재화를 공출하고, 징용자를 끌어 모았다.

댐을 만들며 ‘대붕이 살아있다’는 전설을 간직한 수하리·수상리 1백여 가구가 물에 잠기게 됐다. 두 마을에는 대붕(대=수봉황, 붕=암봉황)이 날아와 날갯짓을 하면 대풍년이 든다고 해 이를 섬겼는데, 잠기게 되면서 일제에 댐 이름을 ‘대붕제’(大鵬堤, 대붕호)라 부르면 이주하겠다고 맹세했고, 일제 역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643고지전투’ 기록의 허와 실

민족말살 정책을 써왔던 일제는 ‘대붕’이라는 원대한 이름 대신 ‘대명제’(大䳟堤)라고 ‘붕’자 한자 변 ‘月’을 ‘日’로 바꿔버렸다. 이런 사실은 1986년 드러났다. 그들 약속만 믿고 ‘대붕제’라 쓴 줄 알았는데, 평화의 댐 건설 때 파로호를 방류해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명패를 확인한 결과 거짓이 밝혀졌다. ‘조선전업주식회사’라는 이름과 함께 ‘소화 19년 10월’이라 기록된 전쟁 당시 수장 명패에 그리 쓰여 있었던 것.
 
▲ 한일 평화 활동가와 시민 40여명이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기념해 화천댐과 비무장지대 평화여행에 나섰다.     ©이대수
▲ 평화여행 첫날 화천전투 참전 군인(남한측)과 당시 중공군 지휘관, 그리고 화천댐 건설당시 징용 한국인의 증언(영상)이 이어졌다.     ©이대수

이날 평화여행단이 위령제를 올린 곳은 파로호 전망대 안보기념관. 그런데 그 곳 행정이름이 ‘구만리’(화천군 간동면)이니, 대붕이 한 번 날갯짓을 하면 구만리를 간다는 그 기상과 전설이 살아 있는 마을 아닌가. 이런, 증거이자 아이러니가 또 어디 있을까.

화천댐은 108MW의 발전용량을 가진 높이 81미터, 길이 435미터에 39만 평방킬로미터의 넓이와 5만톤의 저수용량을 가진 수력발전용 댐이다. 소양강댐 등 다목적이 아닌 발전목적 댐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란다. 일제가 운영하던 1·2호기는 분단 전 북한에 넘어갔다 한국전쟁 때 파괴됐고, 현재 3·4호기만 분단 이후 남한이 설치한 것이다.

여행자의 눈길을 끈 또 하나의 행사는 합동위령제에 앞서 진행된 희생자(관련자) 증언. 첫날인 24일 밤 숙소인 화천댐 인근 아쿠아틱리조트 수상홀에서 오후 2시부터 화천댐 피해 관련 증언과 역사고증 조사(연구)결과가 발표됐다.

먼저 일제강점기 때 화천댐 건설과 관련한 증언과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당시 징용돼 강제노동에 참여한 이용교 옹의 증언이 영상으로 발표됐다. 이대수 대표가 행사 열흘 전 논산 자택에 들러 채집한 것. 그는 행사에 참여하겠다고 약속했는데, 갑작스럽게 건강이 악화돼 20일 세상을 떴다. 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東京學藝大) 교수의 조사결과가 이어졌다.

‘파로호’ 대신 이젠 ‘대붕호’로

이대수 대표가 연길까지 가 영상 인터뷰한 항미원조(抗米援朝)전쟁에 중공군 장교로 참여한 이태길씨 증언도 나왔다. 그는 화천전투와 직접적 연관은 없지만, 전쟁당시 중공군 지휘관으로 참여했고, 휴전회담에도 얼굴을 내비쳤던 이. 화천전투 참전군인 김달육씨도 참여해 당시의 참혹함을 전했다.

위령제를 마친 첫 날 밤. 저녁식사 뒤 숙소에서 긴 여흥의 시간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귀농자 몇이 찾아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숙소 마당에서 공연과 노래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고르바초프가 숙박했다는 문구도 눈에 띄었다.

둘째날은 아침 뒤 ‘꺼먹다리’를 건넜다. 화천댐 수력발전소 관리용으로 일제가 기초를 다지다 패망해 중단한 것을, 한국전쟁 때 소련군이 교각을 세웠고, 정전 뒤 화천군이 상판을 마감한 파란만장한 근대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곳. 상판이 검은색 콜타르를 먹인 목재라 그리 불렸다고.

▲ 여행자들이 ‘파로호’(破虜湖, 오랑캐를 물리친 호수)라는 독재자 이승만 친필 기념비 앞에 앉았다.     ©이대수

▲ 남북한과 미소중 대결로 250만여명이 사망한 한국전쟁. 정전 60년이 흘렀지만 사과도 반성도 없다. 되레, 더 해보자고 으르렁거리니... 인간과 권력의 탐욕 및 그 잔혹함의 끝은 어딜까?    ©이대수

이어 ‘평화의 댐’으로 향했다. 화천댐 상류에 전두환 정권이 건축한 분담 시설물. 북한은 1986년 금강산 일원에 임동댐이라는 담수능력 12억톤의 수력 발전소를 착공했다. 그러자 전 정권은 ‘수공작전 속셈’이라며 담수능력 7억톤의 대응댐을 구상한 것. 하류에 있는 담수능력 5억톤의 화천댐과 분담해 임동댐의 수공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는 선전홍보로 시작된 이 댐은 전국민의 주머니를 긁어내 1987년 착공해 이듬해 완공됐다. 2002년 북한이 임남댐 보수를 이유로 물을 방류해 존재가 한 번 부각한 적이 있지만 국민기억에서 잊혀진 ‘권력안보 시설물’일 뿐이다. 지나는 길에 댐주변 ‘비목공원’에도 들렀다. ‘비목’은 비무장지대를 순찰하던 한 장교의 눈에 띈 무명용사의 돌무덤을 노래한 것이다.

‘권력안보 시설물’ 평화의 댐...

양구로 이동해 전쟁기념관을 돌아보며 한국전쟁 당시 전투상황을 파악했다. 안내를 맡은 장근세 이장 수고로 을지전망대와 제4땅굴도 둘러볼 수 있었다. 사진촬영 제한 등 필요 이상의 통제는 여행자를 불편하게 했다. DMZ생명평화동산에 도착해 여행 둘째날 짐을 풀었다.

셋째날엔 아침을 들자마자 정성헌 DMZ생명평화동산 이사장의 '한국 DMZ 60주년과 동북아 평화' 주제강연이 시작됐다. 동산은 인제군 서화리 30만평에 조성된 타운. “DMZ는 우리민족의 아픔과 좌절이며 세계평화의 위협이며 인류문명의 부끄러움”이라며 ‘생명사회 건설’을 취지로 건립된 마을.

활동과 사업방식이 재밌다. 주민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더 나아가 주민이 주인 되는 사업을 하는 것이다. 식당은 마을 부녀회가 맡아 운영한다. 공사는 주민들이 직접 나서서 한다. 군대와 지역주민 그리고 생명동산 모두가 도움 되는 협력사업을 하는 것. 아무쪼록 ‘생명 열쇠로 평화의 문을 연다’는 취지를 실현하길 바란다.
 
▲ 대리전에 목숨을 바친 자들. 그들을 역사는 과연 기억하기는 하는 걸까?     ©이대수
▲ 여행자들이 DMZ생명평화센터에 들러 운영진의 소개를 받고 있다.      ©이대수


춘천역으로 향하는 길에 파프리카 농장에도 들렀다. 인제산촌박물관·박인환문학관도 돌아보고 역에 도착하니 오후 4시. 막국수 한 그릇씩 먹고 헤어졌다. 지친 여행자들. 몸은 파김치가 돼 가는 데 기억은 더욱 또렷해져 간다.
 
1950년 6월 25일 시작해 3년 1개월간 한국·미군·연합군 94만여명과 북한·중공군 107만여명이 치열하게 싸웠던 한국전쟁. 250만여명의 사망자를 낸 한반도 최대 살육전. 정전 60년이 며칠 안 남았건만 어느 누구도 반성·사과하지 않는다. 되레 ‘어디 한번 해볼 테면 해보자’고 신경전을 벌이는 전쟁광들. 그들의 오판이 21세기에 또 어떤 참화를 부를지 몰라 몸은 곤해도 눈이 감기지 않는 밤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 도배방지 이미지

화천댐 파로호 평화의댐 한국전쟁 중공군 일제 DMZ 관련기사목록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