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그 끝에서 다시 여행을 떠납니다

[북한산둘레길⑥] 충의길(12구간, 3.7km) 우이령길(21구간, 6.8km)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12/12/04 [11:39]

여행, 그 끝에서 다시 여행을 떠납니다

[북한산둘레길⑥] 충의길(12구간, 3.7km) 우이령길(21구간, 6.8km)

최방식 기자 | 입력 : 2012/12/04 [11:39]
북한산둘레길 여섯 번째 여행은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한북정맥이 마지막 용트림을 하는 소귀고개에서 황소걸음을 떼며 마쳤습니다. 천년의 기운이 살아 숨 쉬는 ‘오봉’ 아래 석굴암에 등기대고 앉아 넓디넓은 사해를 굽어보며 찰나의 삶을 잠시 내려놓았습니다.

뚜벅뚜벅 걷고 걸어 거대한 동그라미 ‘발그림’을 완성하던 날 여행자들은 비로소 그 더디고 느린 걸음걸이 큰 우주 자연을 품어 안을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서둘러 이웃을 제치고 달려가야 승리라고 큰 걸 얻는다는 맹신이 터무니없음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지요.

추수 끝내고 걱정 없이 놀 수 있는 ‘상달’.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공달’인 음력 시월. ‘소설(小雪) 추위는 빚내서라도 한다’는데. 소설을 쇠면서도 월동준비조차 못한 게으른 여행자들. 세탁도 안한 홑바지 방 한 귀퉁이에 내던진 채 솜바지 꺼내 입고 둘레길에 나선 것입니다.

유배 중인 부친을 도와 학술활동을 했던 정학유 선생이 철마다 알아둬야 할 세시풍속을 모아 엮은 ‘농가월령가’. 첫눈·첫얼음이 시작되니 김장을 하고, 곶감과 무말랭이를 준비하고, 시래기를 처마에 엮어다는 월동준비를 노래한 ‘시월(음력)령’을 들여다보면 이렇습니다.
 
▲ 그늘 없는 삶이 어디 있으리까? 그늘이 없다면 햇볕은 어찌 있고? 찬란한 게 좋다고요? 어둠 없이는 불가능하지요. 그러니 저 시들음은 하얀 그늘이지요. 빨간 소생이고요.     © 최방식


“나뭇잎 떨어지고 기러기 높이 난다/ 무 배추 캐어 들여 김장을 하오리라/ 방고래 구들질과 바람벽 매질하기/ 창문도 발라놓고 쥐구멍도 막으리라/ 수수대로 덧울하고 외양간엔 짚을 둘러/ 콩깍지도 묶어 세워 땔나무도 쌓아놓게/ 우리 집 부녀들아 겨울옷 지었느냐...”
 
땔감 쌓아놓고 솜바지 꺼내 입고... 

올 들어 최저기온. 영하 2도로 떨어진 지난 24일. 여행자 여덟이 구파발역에 모였습니다. 북한산둘레길의 마지막 구간을 가려는 것입니다. 9월 8일 강북구 우이동을 출발해 성북·종로·은평을 거쳐 마지막 구간인 교현리와 우이동을 이어 45.7km의 큰 족적을 완성하려는 거죠.

두 주 전 여정을 마감했던 ‘사기막골’로 들어서니 북한산의 늠름한 자태가 되살아옵니다. 화려한 가을 색조는 사라지고 없지만 이어지는 참나무 숲, 그리고 소나무향 진한 산길. 여느 숲 속 오솔길과 다를 바 없을 테지만, 나뭇잎 풀 한포기가 달라 보이는 건 왜 일까요?

인간은 참으로 이기적입니다. 자연과 생명은 그대로인 데, 늘 제 맘대로 그 대상을 쳐다보니까요. 정상엔 남보다 먼저 오르겠다며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마냥 달려만 가더니, 어느새 다시 돌아와 낙엽 수북한 그 길을 찬찬히 걸으며 말라버린 인연을 펴 듭니다.

▲ 생태 전문가 김명희씨가 ‘산고치’를 담느라 바쁩니다. 갈색 나뭇가지에 초록으로 열린 생명. 흔치 않은 아름다움입니다.     © 최방식


숲은 겨울채비를 마쳤습니다. 생명보존을 위해 질긴 인연을 정리한 거죠. 동장군에 버틸 준비를 끝냈습니다. 한데, 참나무 잎들은 떨어지지 않고 말라 가지에 붙어있습니다. 이별이 아쉬워 머뭇거리나 싶었지요. 생태 선생 김명희씨, 아니라네요. 봄에 틀 새싹을 추위로부터 보호하려고 그리 붙어 있다는 군요.

참나무 밑 둥을 수없이 감아 돌고 도는 숲길. 노간주나무 곁으로 바짝 달라붙은 좁은 오솔길. 가시에 찔려 아파하다가도 나뭇잎을 밟으며 사각거리는 만추 소리에 취해 아픔마저 잊고 마는 여행자들. 한적한 숲 속 쫄쫄 흐르는 시냇물마저 없었다면 적멸에 들 뻔 했습니다.

재잘대는 새소리와 계곡 물소리. 여행자들의 수다. 숲 속 성급한 생명들은 경계감을 드러내지만, 느긋한 자연은 말이 없습니다. 오든 가든 싫지도 좋지도 않은 그들. 객들은 통째로 내놓으라고 악다구니를 쓰며 득의양양해 하는데도. 좋아할 일은 아닙니다. 분명, 반격이 시작될 테니까요.

둘레길 개근 여행자 장석희씨. 모였다 하면 늘 입담이 넘쳐납니다. 하기야 숲, 개울, 나무를 보고 어릴 적 추억을 안 떠올리는 여행자가 어디 그리 흔하리까. 산들을 뛰어다니고 자연과 함께 자랐던 사람들. 여행자들 모두 그때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할 테지요.

▲ 여행자들이 오봉에 오릅니다. 셋이 셋이 줄지어. 저 언덕 끝엔 천년의 ‘무념무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찰나의 삶이 가벼워지는.     © 최방식


숲 속 ‘말라버린 인연’ 꺼내들고

“어릴 적 개구리나 뱀 정말 많이 잡았죠. 구워먹기도 하고.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내 말 안 듣는 애는 없었습니다. 거역하면 어떻게든 학급에서 왕따를 시키고야 말았거든요. 키는 가장 작았는데, 대장노릇 좀 했죠. 몸도 약했는데 어떻게 그리했는지 모르겠어요.”

숲에 취해 수다에 빠져 12구간 ‘충의길’을 어떻게 지나쳐 왔는지 모릅니다. 참나무 숲을 지나고 솔밭 길을 빠져나오는데, 송추 가는 국도입니다. 교현리까지 1천여미터를 자동차 씽씽 달리는 그 길 곁을 걸었습니다. 좋은 풍광은 군부대가 가려버려 짜증스럽기까지 하더이다.

교현리. 양주시 장흥면에 있는 고을. 언덕 높은 곳에 개울이 있어 다리를 만들어놔, ‘다리고개’(이후 다리현·달현)였는데 한자로 고쳐 불러 그리됐답니다. 군부대가 여럿 들어선 길목이라 그런지 가게도 꽤 눈에 띕니다. 거기부터 우이령길이 시작됩니다.

21구간 소귀고개(6.8km)는 교현리에서 강북구 우이동을 연결하는 도로. 태백에서 흘러온 한북정맥이 도봉산을 넘어 북한산까지 이어지는 곳. 도봉과 북한산을 경계 짓는 고개가 바로 우이령길. 68년 무장간첩 침투사건으로 민간인 출입을 금했다가 2009년부터 개방했죠. 자연생태계를 보존할 취지로 하루 1천명 예약출입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 천년고찰 ‘석굴암’(石窟庵). 의상대사가 깨달음이 있어 세웠다는 암자. 무학대사도 여기 들어와 5백년 왕조의 설계를 했다는데... 바로 오봉(五峰) 아래서.     © 최방식


관리사무소를 지나 숲으로 접어드니 멀리 큰 바위를 봉우리에 인 ‘오봉’이 눈앞에 다가섭니다. 새로 부임한 현감의 아름다운 딸. 연모하는 동네 다섯 총각 중 한명 배필 정하기. 상장능선에서 그 다섯 봉우리에 누가 큰 돌을 던져 올리는 지 경기가 벌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

우이령길을 따라 이어진 계곡도 참 볼만합니다. 보존이 잘 된 산림이니 ‘녹색댐’ 효과가 크겠거니 싶기는 한데. 고개를 오르는 내내 수려한 계곡이 눈길을 끄네요. 당장이라도 내려가 풍덩 뛰어들고 싶기도 하고. 상장능선에서 발원한 동천(洞天)이 임진강 수계인 곡릉천을 거쳐 교하에서 한수에 합류하죠.

40여분 걸었을까요. 허기진 이가 있는 모양입니다. 점심 하자는 이야기. 앉을 데가 마땅찮아 망설이는 데 길옆 의자가 보입니다. 햇볕이 들지 않아 춥긴 한데 시장기를 참는 게 더 고통인 모양입니다. 손이 시려 장갑을 끼고 음식을 먹었죠. 뜨거운 커피도 한잔 하면서.

“주나봐라” vs “가나봐라”

배를 두드리며 고갯길을 한참 오르니 오봉 바로 아래쪽으로 석굴암(石窟庵) 표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20여분을 오르니 거대한 바위 아래 암자. 일주문을 들어서는 데, 옛 자재를 재활용한 흔적이 역역합니다. 연유야 알 수 없고, 문화재복원이겠죠.
 
▲ 오봉 바로 아래 고즈넉한 바위 중턱. 멀리 사해(四海)가 발아래 굽어보이는 자리. 돌부처의 얇은 미소가 아름답습니다.     © 최방식


삼성각, 대웅전, 범종각, 그리고 한가운데 석굴. 그 아래쪽엔 요사채를 짓느라 공사가 한창. 세 개의 전각은 한국전 때 타 재건했다네요. 선묘낭자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진한 부석사를 건축한 의상대사. 원효와 함께 당으로 유학을 갔다가, 혼자 유학을 마치고 화엄종을 국내에 전파한 그가 창건했다는 군요.

석굴 앞에 서니 절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한북정맥의 기운을 받아 뻗어 오른 오봉이 있어 조선왕조를 5백년 유지시켰다는 설이 전해지는 곳. 조선왕조 창건에 간여한 무학대사, 그의 스승인 나옹선사 이야기도 남아 있는 사찰. 오봉을 등지고 남서쪽을 굽어보니 사해(四海)가 발아래입니다.


▲ 혼자 넘자니, 옛 님이 그리워 눈물 난다는 우이령고개. 고개위에 숨어 기다리던 님 그리워서. 이흥렬 선생의 ‘바위고개’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     ©최방식

산을 내려오는 데 장난기 발동한 장석희씨. 또 개구쟁이 시절 이야깁니다. 민가에 한 탁발승이 찾아와 곡식 좀 보시하라고 하니, 쥔장이 없다고 손을 흔들자, 스님이 안가고 버티는 상황. 쥔이 “주나봐라, 개겨봐라”고 외쳐댔고, 스님도 질세라 “가나봐라, 개겨봐라”고 응대했다나.

다시 우이령길에 들어섭니다. 알림판이 하나 서 있어 읽어보니 이흥렬 작사·작곡 ‘바위고개’이야깁니다. 바로 이곳 우이령길 이야기라는 군요. 고인은 생전 ‘바위고개’가 어디냐는 물음에 ‘그냥 바위가 있는 고개면 어디든’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죠.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님이 그리워 눈물 납니다/ 고개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님/ 그리워 그리워 눈물 납니다/ 바위고개 피인 꽃 진달래꽃은/ 우리 님이 즐겨 즐겨 꺾어주던 꽃/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옛님이 그리워 하도 그리워/ 십여년간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 진달래꽃 안고서 눈물집니다.”

지친 다리 이끌며 터벅터벅 고개 넘어 골짜기를 30여분 내려왔나 봅니다. 수려한 삼각산의 비경을 느릿느릿 살피면서요. 가지각색의 소소한 이야기를 재잘거리면서. 여기저기 휴양시설들. 청년시절 활동한답시고 수련회하면 곧잘 왔던 ‘사슴목장’이 자리한 골짜기입니다.

“그늘·흔들림 없는 삶 있으랴”

다섯 시간여를 걸어 마침내 우이동 버스종점 곁 한 편의점 앞에 도착했습니다. 석 달 보름 전 북한산둘레길 여행의 첫발을 뗀 자리. 삼각산의 정기가 서울의 마을과 고을로 퍼져나간 자락. 그 곳을 잇는 45.7km의 거대한 둘레길을 돌아 다시 그 자리에 온 것입니다. 느림보 여정을 시작한 곳인데, 끝난 곳이 됐습니다.

둘러서서 박수 한번 치고 버스종점 인근 뒤풀이 식당으로 이동했습니다. 그간의 여행소감을 한 마디씩 꺼내놓는데, 이날은 교사인 김명희씨가 여행자들 가슴에 큰 울림을 줬답니다. 몇 시간 전 우이령을 넘을 때도 그는 시를 두수나 읊었습니다. 걸으면서. 암송으로.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정호승의 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 중에서)
 
▲ 소귀고개를 넘어 우이동으로 내려가는 길. 험해서 령(嶺)이라고 했을 텐데 무뎌지고 넓혀진 군사도로를 걸으려니, ‘치’(峙)가 떨리는 깔딱고개의 감흥은 없습니다.     © 최방식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도종환의 시 ‘흔들리며 피는 꽃’ 중에서)

먹먹한 가족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청천병력 같은 남편의 간암통보. 그 때의 두려움. 애달픈 생명은 어떻게 살리며, 아이들은 또 어떻게 책임질지... 9년간의 노력으로 남편 건강을 되찾고 자녀들도 잘 키워낸 여인. 그 끝에 얻은 깨달음. “하루하루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잘 죽으려면. 늘 고마워하면서...”

오름이 있으면 내림이 있습니다. 길이 끝나면 거기서 다시 새 길이 시작되지요. 그 길 위에서 여행자는 벗을 만나고 헤어집니다.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고 슬픔과 노여움을 느끼면서. 어둠과 추위에 두려워 떨지만 곧 찬란한 햇볕에 뜨겁게 세상을 품습니다. 성급함에 달음질치던 이들이 이제 느림보 여행자가 돼 황소걸음을 걷습니다. 길을 나서는 건 어딘가를 가려는 것만은 아닙니다. 길은 인생역정이고, 삶이자 죽음이니까요.

“변하지 않는 것은 그저 길뿐”

신경림은 길을 이렇게 노래했죠. “길을 가다가.../ 잃어버린 옛 이야기를 듣는다.../ 잊혀진 꿈을 찾는다.../ 어우러진 내 노래 소리를 듣는다...”(‘길’ 중에서) 그 길에서 회한을 노래한 이도 있습니다. “...저쪽 멀리 걷는 누구도/ 큰 구도 안에서 모두 나의 동행자라는 것/ 그가 또 다른 나의 도반이라는 것을/ 이렇게 늦게 알다니/ 배낭 질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지금.”(이성선 시인의 ‘도반’ 중)

▲ 삼각산 아래 우이동. 45.7km의 먼 길을 돌아 석 달 보름만에 북한산둘레길 여행의 첫발을 뗀 그 자리에 당도했습니다. 여정을 시작한 곳. 그리고 끝낸 곳. 다시 여행을 시작합니다.     © 최방식


소설가(시인) 성석제의 길은 이렇습니다. “길은 저희들끼리 만났다가 헤어진다/ 헤어지고 다시 만난다.../ 길을 통하지 않고는 어디에도 이를 수가 없다/ 그 길의 끝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낯설고 새로운 길을 가려면/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가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낯선 길에 묻다’ 중) 그는 또 말합니다. “...길은 여전히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저 길뿐이다.../ 길만이 진실이다.”(‘어두운 길’ 중)

힘겨워도 즐거워도 걸음걸이가 이젠 제법 흐트러지지 않는 여행자들. 등짐 무겁고 오르는 길 가팔라도 피하지 않고 묵묵히 가는 순례자들. 여정 굽이굽이 제멋(?)에 겨운 것들을 하나 둘 반기며, 여행자들은 느리고 느린 발걸음으로 우주를 품었습니다. 그 끝에서 하나의 기쁨을 얻었습니다. 끝이 아니고 새 출발인 것도 깨달았지요. 그리고, 다시 여행을 떠납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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