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속 호젓한 여행길에 ‘불타는 고혹’

[북한산둘레길④] 7구간 ‘옛성길’과 8구간 ‘구름정원길’ 8km 4시간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12/11/06 [14:39]

가을비속 호젓한 여행길에 ‘불타는 고혹’

[북한산둘레길④] 7구간 ‘옛성길’과 8구간 ‘구름정원길’ 8km 4시간

최방식 기자 | 입력 : 2012/11/06 [14:39]
가을비 속 여행은 색다른 맛이 있습니다. 어깨 부딪칠 일 없이 호젓해 좋고, 비와 운무가 범벅된 사색 속에 유열이 있기에 그렇죠. 이별이 아쉬운 낙엽의 타는 마음이 애달프지 않은 건 아니지만, 꼭 그리 서러운 건만도 아닙니다. ‘회자정리 거자필반’이니까요. ‘불타는 고혹’이 뜨겁게 다가오는 까닭이죠. 차가운 가을비로도 식히기 어려운.

시월 넷째 토요일. 상강(霜降)을 막 보낸 완연한 가을. 가을걷이를 끝낸 이모작 농가가 보리파종을 하는 철이죠. 때를 놓치면 이듬해 나락농사까지 망칠 수 있어 노심초사한다는 데, 때 아닌 비가 내립니다. 타들어 가는 건 단풍만이 아닐 테지요.

상강 철 보름 초후(初候)엔 승냥이가 산 짐승을 잡고, 중후엔 풀과 나무가 누렇게 떨어지며, 말후엔 겨울잠 자는 동물이 땅에 숨는다고 하죠. 농가월령가는 추수의 기쁨을 이렇게 노래하죠. “들에는 조·피 더미, 집 근처 콩·팥 가리, 벼 타작 마친 뒤 틈나거든 두드리세.”

‘부지깽이도 덤빈다’는 가을인데, 도시인들에겐 그리 바쁠 일이 없습니다. ‘대부인 마님이 나막신짝 들고 나선다’는 가을 들판이 사라져 버린 회색도시이니까요. 잊힌 습성이라지만 가슴 한구석 애처로움이 여전합니다. 우산을 받쳐 들고 둘레길에 나서는 걸 보면 말입니다.

“나뭇잎 하나 어깨에 툭 내려앉아”

길을 나서며 이성선 시인을 떠올렸습니다. 그에겐 낙엽이 우주였죠. 연인이었고. 생전 설악산 자락 어딘가에서 살았다는 시인은 ‘미시령 노을’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뭇잎 하나가/ 아무 기척도 없이 어깨에/ 뚝 내려앉는다/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너무 가볍다.”
 
▲ 탕춘대성 암문 앞길이 휑뎅그렁합니다. 가을비에 찾는 이 적어 그렇지요. 숙종이 한양도성을 보강한 뒤 북쪽 수비를 강화하려고 쌓은 성입니다. 창의문에서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에서 북한산성 보현봉 능선으로 이어진 성곽.     © 최방식

▲ 한북정맥 능선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시집가는 색시 족두리를 닮은 봉우리, 향로를 닮은 정상,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있어 붙여진 비봉, 석가의 제자모습을 본 딴 나월·승가·나한봉, 부처 곁 좌우에 자리한 문수봉·보현봉.     © 최방식



시인의 애틋함은 또 다른 절창을 만들었습니다.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외로워 쳐다보면/ 눈 마주쳐 마음 비쳐주는.../ 나도 꽃이 될 수 있을까/ 세상 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나서는 날에/ 가슴에 화안히 안기어/ 눈물짓듯 웃어주는/ 하얀 들꽃...”<‘사랑하는 별 하나’ 중에서>

가을이면 행사가 많은데 비까지 쏟아져 그런지 여행자는 셋뿐입니다. 한명은 뒤늦게 왔으니 북한산둘레길 7구간 ‘옛성길’을 출발한 건 정확하게 둘입니다. 서울성곽길부터 이번까지 여덟 번의 여정에 한 번도 빠진 적 없는 두 여행자. 도종환 시인은 그 맘을 이렇게 읊었죠.

“공연한 자신감으로 들뜨지 않고/ 가파른 숨 몰아쉬다 주저앉지 않고/ 자만의 잰걸음으로 달려가지 않고.../ 고갯마루에 올라서 걸어온 길 뒤돌아보며.../ 나뭇가지 하나도 세심히 살펴 길 찾아가게.../ 언제나 여유 잃지 않으며.../ 정상에 오르는 일에만 매여 있지 않고.../ 올라온 곳에서는 내려와야 함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산을 오르며’ 중에서>

구기터널 앞 버스정류장에서 산자락을 돌아 접어드는 데, 빗속에도 불타는 숲은 뜨겁습니다. 빨강, 노랑, 초록의 향연. 마지막 에너지를 태우며 이별을 준비 중입니다. 긴 침잠일 테지요. 억겁의 길을 지나 초록의 새순으로 돋아날 테니까요. 길고 긴 환희의 시작은 이토록 짧은 이별인 셈입니다. 생명은 그렇게 돌고 도는 것이고.

터널 위 산등성이 암문이 휑뎅그렁합니다. 비에 찾는 이 적어 그랬을 테지요. 숙종이 한양도성을 보강한 뒤 북쪽 수비를 강화하려고 쌓은 탕춘대성의 문. 창의문에서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에서 북한산성 보현봉 능선으로 이어진 성곽. 연산군이 봄이면 야외연회를 즐겼다는 ‘탕춘대’(蕩春臺)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헤어짐과 재회의 약속이 처연하게...

암문을 지나는데 바위와 목재가 산길 한가득 쌓였습니다. 나뭇가지들이 부러져 널려 있는 걸 보니 헬기로 운반한 게 분명합니다. 인간에게 밟히고 파이고 찍힌 길. 그 길을 보존하겠다고 이젠 그 위에 계단을 쌓으려는 것입니다. 병 주고 약주는 약탈자들이죠.

▲ 길을 가다가 새빨간 열매를 봅니다. 거기서 잃어버린 옛 얘기를 듣지요. 어릴 적 멀리 날아가 버린 노래도 즐기고요.     © 최방식

▲ 가을비 속 여행은 색다른 맛이 있습니다. 어깨 부딪칠 일 없이 호젓해 좋고, 비와 운무가 범벅된 사색 그 속에 유열이 있기에 그렇죠.     © 최방식


산, 숲, 등산로를 망가트리는 건 자연을 존중하지 않는 인간의 이기심이죠. 어디나 널려있다고 막 대하는 어리석음. 수천, 수만, 아니 수억년을 거기 있어온 산과 바위, 그리고 나무와 풀. 불과 수십년 만에 그 자연을 부셔버리는 걸 보면 인간은 파괴본성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할 정돕니다.

제발, 등산지팡이 좀 삼갔으면 좋겠습니다. 노약자라면 어쩔 수 없겠지요. 아니라면 산에 돌이킬 수 없는 생채기를 내고 다니지 말아야지요. 그 구멍으로 물이 흘러들어 등산로가 무너지거든요. 비상시를 대비해 가지고 다니지만, 늘 사용하지는 말았으면...

암문을 지나 20여분 걸었을까요? 족두리봉에서 보현봉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 능선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시집가는 색시 족두리를 닮은 봉우리, 향로를 닮은 정상,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있어 붙여진 비봉, 석가의 제자모습을 본 딴 나월·승가·나한봉, 부처 곁 좌우에 자리한 문수봉·보현봉.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올라 다니며 살폈다는 삼각산 봉우리들. 500년 왕조의 도읍을 내줬던 한북정맥의 터줏대감들은 언제부턴가 무학(성자, 불교적 이름)처럼 저마다 성스러운 제 이름을 가지고 거기 꿋꿋하게 버티고 서있습니다.

가을비에 체온이 떨어져 비를 피하고 요기도 할 겸 능선 어딘가 빈 정자를 찾았습니다. 저와 둘이 산행을 하게 된 장석희씨. 오늘도 맛좋은 음식을 준비해왔습니다. 찐 달걀과 주먹밥. 따끈한 커피에 점심을 마쳐가는 데, 뒤늦게 출발한 여행자가 곧 도착한다고 합니다.

여행자 셋이 발을 맞춘 8구간 구름정원길. 북한산생태공원 상단(불광동 근처)에서 불광중~선림사~진관생태다리 앞까지 이어지는 5.2km(2시간 30분 소요) 여정은 가을 나무와 잎사귀, 그리고 바람과 색깔의 조화가 매혹하는 곳입니다.

처연함을 머금은 가을색조. 이별을 눈앞에 두고도 애써 슬픔을 참아내는 생명들. 헤어짐과 약속이 가여워 눈물을 뿌리는 하늘. 묵묵히 제 살의 헤어짐을 감내하는 땅. 여행자는 슬프디 슬픈 북한산 연가를 그렇게 마음속 깊이 새겼습니다. 다시 만날 약속의 징표가 된 것입니다.

부추전 한입 물고 고개 절레절레

‘깐죽’(?)의 대가로만 알았던 장석희씨. 가을 빗길에선 감성이 넘쳐납니다. 한마디 한마디. 무궁화 밑동이 얽힌 걸 보더니 “제대로 꼬였네”, 개나리꽃이 핀 걸 보고는 “이를 어째”, 노란 색동옷을 입은 산초를 보곤 “이 나무 잎 좀 봐, 형광색이네”, 싸리나무를 보곤 “어쩜 이렇게 노랄까”...

▲ 빗속에도 숲은 뜨겁습니다. 빨강, 노랑, 초록의 향연. 마지막 에너지를 태우며 이별을 준비 합니다. 억겁의 길을 지나 초록의 새순으로 돋아날 때까지 긴 침잠을 위해.     © 최방식


바닥에 흩날린 나뭇잎을 보곤 “이것 좀 사진으로 찍어놔요” 그럽니다. 예쁜 가을 색과 모습만 찍으려 했던 기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어디, 가을색이 빨강 노랑만 있으리까? 뒤섞이고 말라 비뚤어져가는 갈색, 짓밟혀 뭉개진 흑갈색...

진관사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곳입니다. 족두리봉을 삥 돌아 향로봉과 비봉의 뒤쪽으로 감아 도는 어디였을 겁니다. 강북, 성북, 종로에서 봤던 북한산과 또 다른 자태의 산. 네 시간 여 만에 이렇게 다른 앞모습과 뒤태를 보여주다니 놀랍습니다.


▲ 예쁜 가을 색과 모습만 찍다가 문뜩 발견한 흙길 겹겹이 떨어져 내려 쌓인 나뭇잎들. 어디, 가을색이 빨강 노랑만 있으리까? 말라 비뚤어진 갈색에 짓뭉개진 흑갈색까지...     © 최방식

고생 끝에 낙이라 했는데... 웬걸, 숨이 턱 막힙니다. 그토록 빼어난 풍광을 헐어내고 잘라낸 자리에 거대한 콘크리트더미를 켜켜이 쌓고 있습니다. ‘은평뉴타운’을 세워놓았습니다. 황홀한 자태를 뽐내던 무위자연을 엉망진창으로 흩뜨려놨으니까요.

뒤늦게 합류한 동글씨. 사색의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어떤 프랑스 의사가 쓴 수필. 인생을 통해 깨달은 23가지 생활철학을 담았다는 책이야기를 진지하게 전합니다. 그 중 하나. ‘행복은 서로 비교하는 게 아니다’라네요. 공감백배죠?

빗속 수다와 사색의 발걸음은 4시간여 만에 끝났습니다. 진관동 생태다리를 내려오는 데 아직 개발이 덜 된 은평뉴타운 한가운데로 난 도로 한 쪽에 ‘쑥부쟁이’가 군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벌개미취, 구절초와 늘 헛갈리는 야생국화. 구별할 수 있게 사진까지 찍어뒀습니다.

휑한 아파트촌. 정다운 구석이라곤 찾을 길 없는 낯선 도시. 아파트 한 귀퉁이 국수집에 들렀습니다. 자매로 보이는 쥔 둘. 손님으로 온 자매. 살펴도 달리 갈 데가 없어 들어왔는데, 이건 아닙니다. 막걸리는 손수 사다 마셔야 했습니다. 음식맛을 잘 아는 여행자 한명은 부추전을 한 입 물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글쎄, 넌 예쁜 여자애 밝히잖아”

‘1차’로 마감이 안 되고 다시 ‘2차’. 좀 더 정겨운 데로 가자며 걷고 또 걸었습니다. 30여분을 걸었을까요? 은평경찰서 너머 허름한 시장으로 보임직한 곳 어딘가, 해장국집을 찾았습니다. 맛이 괜찮을 성 싶은 곳. 다시 인생사 수다가 이어졌습니다.

별의 별 이야기 끝에 주제가 성(性)까지 흘러갔더이다. 초식남·건어물녀, 결혼찬반 논쟁을 거쳐 해묵은 이야기가 튀어나옵니다. 캐나다 취재여행 때 기자가 스님과 목사를 데리고 나체쇼 유흥가에 갔던 스토리도. 이어지는 성에 솔직해야 한다는 공감(?)까지.

▲ 개발이 덜 된 은평뉴타운 한가운데로 난 도로 한 쪽 ‘쑥부쟁이’가 군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벌개미취, 구절초와 늘 헛갈리는 야생국화. 구별할 수 있게 사진을 찍어뒀습니다.     © 최방식

▲ 네 번째 북한산둘레길 여행은 그렇게 수다 속에 희미해져 하나의 시로 남았습니다. 신경림의 싯귀처럼. 빈 가지에 앉아 우는 하얀 새를 봅니다. 내 가슴 속에서 퍼덕이는 하얀 새...     © 최방식

각설하고, 솔직한 술자리이야기 하나. 영국에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막 귀국한 한 여성 축하연. 그는 자신의 친구를 데리고 와 소개하며 예쁜 애 데려왔다며 건너편 남자에게 “너, 예쁜 애 밝히잖아”라고 합니다. 그 남자 “로망이 그렇다는 것이지 꼭...”이라 변명하다 말고 되묻습니다. “그럼 넌 어떤 남자가 좋은데. 노처녀가 되도록 왜 여태 미혼이야.” 그 여자 글쎄 이러네요. “난 딱 하나밖에 없어. 잘생기기만 하면 돼.” 조소 작렬입니다. “너도 밝히네.”

네 번째 북한산둘레길 여행은 그렇게 수다 속에 희미해져 하나의 시로 남았습니다. “길을 가다가.../ 눈 속에 맺힌 새빨간 열매를 본다/ 잃어버린 옛 얘기를 듣는다/ 어릴 적 멀리 날아가버린/ 노래를 듣는다.../ 갈대 서걱이는/ 빈 가지에 앉아 우는 하얀 새를 본다/ 헤어진 옛 친구를 본다/ 친구와 함께/ 잊혀진 꿈을 찾는다.../ 내 가슴 속에서 퍼덕이는 하얀 새/ 그 날개 소리를 듣는다/ 그것들과 어울어진 내/ 노래 소리를 듣는다/ 길을 가다가.”<신경림의 길 중에서>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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