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여행, 고마리·개망초가 꽃이 됐다

[45.7km 북한산둘레길①] 소나무숲길~순례길 5.3km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12/09/16 [17:26]

느림보여행, 고마리·개망초가 꽃이 됐다

[45.7km 북한산둘레길①] 소나무숲길~순례길 5.3km

최방식 기자 | 입력 : 2012/09/16 [17:26]
북한산 둘레길에 들어섰습니다. 서울성곽여행에 이은 또 다른 여정에 오른 것이죠. 여전히 느림보 여행입니다. 이웃마을 울타리 아래 곱디고운 꽃들이 눈인사를 건넵니다. 달릴 때 보지 못했던 물봉선, 고마리, 개망초가 관능미를 뽐냅니다. 너머, 수유리에서 올망졸망 살아가는 반가운 이웃도 만났습니다. 백로(白露)를 막 보낸 여행자들은 빨갛게 고추 익어가는 팔월 어느 주말을 또 그렇게 황홀하게 보냈습니다.

‘비가 오면 십리 천석(千石)을 늘인다’는 백로. 하루 종일 비가 내리더니 여행자 아홉이 우이동 골짜기에 모인 이튿날은 막 그쳤습니다. 우이암이 고즈넉하게 올려다 뵈는 계곡 끝자락 숲 향기가 싱그러운 주말. 막 들어선 가을, 초록의 억새들이 살랑살랑 제 몸을 흔들어 댑니다. 잿빛 연기를 내뿜는 흉물스런 도시의 재촉에도 아랑곳 않고 망각의 깊은 골짜기는 여행자를 유혹합니다.

소귀처럼 생긴 산봉우리, 그 아래 남쪽으로 흘러내린 깊디깊은 골. 우이동에 온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도선사의 눈매 선한 주지 스님 인터뷰한다고 몇 년 전에 한 번 들른 적이 있는 데 그 기억도 가물가물합니다. 청년 시절 수련회 한답시고 오가고, 정상에 서보겠다고 몇 차례 백운대를 밟고 산성을 돈 게 언제였던지...

망각의 깊은 골짜기 여행자 유혹하고

계곡 깊숙이 여행객을 실어 나르는 버스. 전철이 대중화하면서 마을버스 노선이 헛갈리기 일쑨데, 잘 오지 않는 우이동을 들락거리는 버스를 제대로 알 리 없죠. 153번과 120번 종점에서 만나자고 한 게 그만 사람들에게 혼동을 주고 말았습니다. 기억나는 데로 도선사 오르는 삼거리 부근이 종점인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전화가 울려대고 하나 둘 찾아오더니 어느덧 아홉이 모였습니다. 프랑스인 다비드가 친구와 함께 오기로 해놓고는 나타나질 않습니다. 좀처럼 약속시간을 어기지 않는 그인데, 궁금해 전화를 해보지만 받지를 않습니다. 내 문자질에 뜸을 들인 답신이 왔는데, 글쎄 버스를 잘못 탔다지 뭡니까.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며 방해될지 모르니 그냥 가라는 군요.

▲ 둘레길을 막 시작하는 데 거대한 리조트단지가 눈앞을 막아섰습니다. 이름이 ‘더파인트리’(소나무). 8만평방미터에 10층짜리 14개동의 건물이 들어서고 골프연습장·피트니스센터·수영장·스파·레스토랑·와인바·프라이빗스튜디오·산악박물관 등의 부대시설이 들어선다는 군요. 이토록 아름다운 계곡에...     ©이규호
▲ 싱그러운 수다, 경쾌한 발걸음이 시작됐습니다. 갈증을 푼 숲 속 소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 향 가득한 길. 더위도 한풀 꺾었는지 제법 가을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 이규호

‘그린파크’ 담장 곁 계곡을 따라 오릅니다. 기억 속 그 호텔은 오간데 없고 거대한 리조트단지가 눈앞을 막아섰습니다. 이름이 ‘더파인트리’(소나무). 8만평방미터에 10층짜리 14개동의 건물이 들어서고 골프연습장·피트니스센터·수영장·스파·레스토랑·와인바·프라이빗스튜디오·산악박물관 등의 부대시설이 들어선다는 군요. 이토록 아름다운 계곡에...

누가 이런 짓을 하는 지 알아보려고 기업 홈피에 들어가 봤더니 홍보문구가 가관입니다. “한그루의 나무도 베지 않겠다. 나무보다 높게 짓지 않겠다. 북한산 그대로를 누리게 해다오. 그렇게 서울에서 서울을 잊게 해다오. 문득 서울에도 자연의 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북한산에게 이야기했다.”

‘더파인트리’는 콘도 및 스파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분양가 40억대의 초호화 개인 아파트. 2008년 오세훈 시장이 강북 균형발전 및 관광사업 활성화 취지로 허용한 사업. 알고 보니 사업허가를 받고 공사가 시작될 때부터 각종 편법과 특혜, 비리의혹이 불거졌고, 올 초 서울시 감사결과에서도 이런 사실이 확인됐다고 합니다.

공사 초기부터 자연환경 파괴, 조망권 훼손 우려가 끊이지 않았고, 이에 주민들은 ‘북한산 호화콘도 건설 중단촉구 대책위원회’(공동대표 김일웅)를 꾸려 인허가 과정에 대한 의혹 등을 꾸준히 제기해 왔답니다. 대책위는 “공공 인수 뒤 주민편의시설로 활용, 중장기적으로 국립공원에 재편입시킬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하네요.

‘서울을 잊게 해다오’ 파과현장에 서니...

이틀 비 그친 뒤 우이동 계곡의 맑은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 둘레길 초입에 마주한 황당한 풍광에 여행자들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둘레길 첫 여행에 가이드를 자처한 김서진 선생은 우이동에 사는 이웃인데 서울시민들이 이런 환경파괴를 막지 못하면 아름다운 자연자원을 가질 자격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1코스 ‘소나무숲길’에 들어서기 전 손병희 선생과 동학(천도교) 정신이 살아 숨 쉬는 봉황각에 먼저 들렀습니다. 산 중턱에 비잔틴 양식의 작은 건물이 들어선 것도 흥미로운데 건물을 돌아서니 자그마한 전각 몇 개가 옛날 옛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3·1운동을 주도했던 천도교 선각자들이 생활했던 공간이랍니다.

▲ 소나무 숲 울창한 고요하고 조그만 길. 아, 이런 길에 도대체 얼마 만에 와보는 건 지 모르겠습니다. 소나무 사이로 위용을 자랑하는 적송. 그 아래 생강나무. 빈 하늘을 뚫고 비상하는 굴참나무. 울창한 그 어딘가에서 ‘술참’을 들었습니다.     © 이규호
▲ 숲은 화합입니다. 조화이고. 그러니까 아옹다옹 하는 세상의 일도 숲에 들어서면 다정한 이웃인 것이죠. 절간 곁 교회, 그들도 이웃이고...     © 이규호

싱그러운 수다, 경쾌한 발걸음이 시작됐습니다. 갈증을 푼 숲 속 소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 향 가득한 길. 더위도 한풀 꺾었는지 제법 가을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거실에선 담소를 나누는 부부, 앞마당엔 늦여름 햇볕을 쬐며 졸음에 겨운 고양이. 텃밭엔 검푸름이 더해가는 푸성귀. 교회 곁 고요한 절. 모두가 영락없는 일상입니다.

숲 속에선 감탄이 저절로 터져 나옵니다. 소나무 숲 울창한 고요하고 조그만 길. 아, 이런 길에 도대체 얼마 만에 와보는 건 지 모르겠습니다. 보통의 소나무 사이로 위용을 자랑하는 적송. 그 아래 여기저기 생강나무. 빈 하늘을 뚫고 비상하는 굴참나무들. 그 나무 그늘 울창한 어딘가에서 ‘술참’을 들었습니다.

여행자들이 저마다 싸온 음식들을 꺼내놓습니다. 과일에, 찐 고구마·옥수수, 막걸리에 커피까지. 음식을 막 꺼내놓던 여행자 한 분이 “오늘은 내 생일”이라고 합니다. 김명희 선생은 다른 두 산행계획이 있었는데 둘레길에 왔다고 했고, 일행은 박수로 환호했습니다. ‘만고강산’ 약수터 쉼터인데 시를 새겨놓은 팻말을 보더니 그가 낭송을 시작합니다. 그는 백석의 시를 좋아한다고 했고 다음엔 백석 시 한 수를 낭독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앞산의 다래나무가/ 호랑나비 날갯짓에 꽃술을 털면/ 아기 다래가 앙글앙글 웃는다/... 다랑논에서 올벼가 익어갈 때/ 청개구리의 젖은 눈알과/ 알밴 메뚜기의 볼때기에/ 저녁노을 간지럽다/ 된장독에 쉬 슬어놓고/ 앞다리 싹싹 비벼대는 파리도/ 거미줄 쳐놓고/ 한나절 그냥 기다리는/ 굴뚝빛 왕거미도/ 다 사랑하고 싶은날.”(오탁번시 ‘사랑하고 싶은날’)

‘술참’ 들다 ‘다 사랑하고 싶은날’ 시낭송

서울성곽여행 네 번째부터 생태해설로 인기를 끌고 있는 김명희 선생은 북한산 둘레길에서도 단연 인기 최고. 벌개미취, 고마리, 물봉선, 일본목련, 옥잠, 둥굴레, 중국단풍, 굴참나무, 버드나무로 이어지는 생태이야기가 끝이 없습니다. 한번은 나뭇잎을 따 “맛있어”라기에 일행은 모두 씹었습니다. 2초도 안 돼 모두가 쓰다고 내뱉는데, 그가 “맛이 써”라고 합니다.

솔밭근린공원에 오니 점심을 마친 주민들이 나와 한가한 주말을 즐기는 중입니다. 넓은 적송군락지인데 포장을 하고 광장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좋은 숲이 상당부분 훼손된 듯 해 좀 아쉬웠습니다.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 우물가 의자에 앉아 한담중인 노인들, 공원 옆 자그마한 텃밭을 가꾸는 이들. 모두가 행복한 웃음입니다. 일상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들이죠.

▲ 고마리입니다. 습한 곳을 좋아한다는 군요. 거기서 오염물질을 정화하는 반가운 이웃이고요. 그러니 제발 ‘이름 모를 꽃’이라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 이름 없는 꽃이 어디 있으리까?     © 이규호
▲ 저 멀리 북한산 정상이 보입니다. 백운대와 인수봉 그리고 만경대가 영롱하게 보이는 삼각산이죠. 우이동 이웃들에게는 이제 익숙할 테지요?     © 이규호

 
이어지는 2구간 ‘순례길’. 가는 곳마다 이름이 꽤 알려진 분들의 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과거 서울에서 왕족들의 음택을 빼면 아마도 우이동 계곡이 국가에 몸을 바친 분들을 위한 명당으로 가장 좋은 터라서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양일동, 김창숙, 서상일, 김도연, 신숙, 이시영, 이준 등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4·19선열들까지.

이준 열사 묘역에서 둘레길 첫 여행을 마쳤습니다. 왜인들의 총칼 앞에 굴욕스럽게 국권을 넘겨주겠다고 서약한 고종 황제. 그 치욕에 잠 못 이루던 황제는 마침내 진실을 알리려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단을 파견했지만, 일본의 보호를 받는 속국으로 참가자격이 없다고 거부당하고. 결국 그들은 죽어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두 번째 구간을 순례길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말을 어디에선가 들어본 듯합니다. 이 계곡에서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또 하나 이름 아카데미하우스. 사회선교에 관심을 둔 기독교인들이 사회문제연구회를 조직하고 사회적 대화와 소통, 그리고 인간화·민주화 운동을 벌일 터전으로 지은 건물. 준공식에는 주교, 스님까지 참여해 축사했다죠.

북한산 둘레길에서 여행자들이 한 발 다가선 느림의 미학. 그 건 ‘존중’입니다. 목표를 향해 전력 질주한 이들.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모르고 그저 결과만 따지는 사회. 그 자리에 서기까지 거친 수많은 인연들은 기억조차 없습니다. 상처로, 배신으로, 분노로 남아있을 그들은 환호소리에 파묻혀버렸으니까요.

‘올라갈 때 보지못한 그 꽃’ 존중으로

짧은 환호와 정상 한번 서보고 끝나는 경주. 그 어리석음을 깨달으니 그제야 인연이 하나둘 보입니다. 원망이나 분노를 삭인 그들이지만 이제 그들이 이웃이 되어 손을 내밉니다. 뒤늦게 철든 바보에게도 그들은 존중하는 것입니다. 부추겨주고. 지상낙원이라면 바로 이거겠죠? 깨달음이 곧 낙원이라는 선승 말씀을 알아차린 걸까요?

느림 끝에서 느림보 선수를 또 한명 만났습니다. 연성수 선생. 수유리 이웃이었습니다. 문화운동을 했던 민청학련 세대, 그를 보니 반가웠습니다. 요즘은 건강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어서 명상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맙게도 다음번 여행자들에게 맛보기 명상을 알려주기로 약속했습니다.

▲ ‘순례길’. 가는 곳마다 독립운동가 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이동 계곡이 국가에 몸을 바친 분들을 위한 명당으로 가장 좋은 터라서 그랬나요? 양일동, 김창숙, 서상일, 김도연, 신숙, 이시영, 이준 등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4·19선열들까지.     © 이규호

▲ 느리게 간다는 건 ‘존중’입니다. 목표를 향해 전력 질주한 이들. 수많은 인연을 기억조차 못합니다. 상처로, 배신으로, 분노로 남아있을 그들. 어리석음을 떨치니 하나둘 보입니다. 이웃이 되어 손을 내밉니다. 느림 그 끝에서 느림보 선수를 또 한명 만났습니다.     © 이규호


여행, 그 길에서 무위자연을 만나고 스승을 만나니. 여행을 마칠 때면 늘 가슴속 떠올리는 시 한 구절이 있습니다. 백담사 마당 한 귀퉁이 시비에도 쓰여 있죠. 바빠서, 성공을 위해 내달려온 지난날을 회한하며 마침내 깨달은 아름다움. 후배 스님과 시인, 그리고 여행자 모두에게 울림을 주는 싯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한 후배 시인은 고은의 ‘그 꽃’을 읽고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지난날의 분노와 후회, 결단의 산행과 깨달음... '꽃'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서로 얼마나 반가웠을까.” 그러니 제발 ‘이름 모를 꽃’이라고는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게으르거나 무식하거나 아님 무관심이니까요. 세상에 이름 없는 꽃이 어디 있으리까?

시인 김춘수의 ‘꽃’도 바로 ‘그 꽃’입니다. 존중하고 서로가 반가운. “내가 그대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대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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