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마지막(?) 정치 망명자 된 사연

[국제나그네의 독일 아리랑] 미전향 이인모와의 운명적 만남

조영삼 | 기사입력 2010/11/07 [15:23]

20세기 마지막(?) 정치 망명자 된 사연

[국제나그네의 독일 아리랑] 미전향 이인모와의 운명적 만남

조영삼 | 입력 : 2010/11/07 [15:23]
20세기 마지막 10년을 시작하는 1990년대 초, 서울에서 생활하던 나는 한겨레신문 지국장 일을 정리하고 부모님이 계신 부산집에 내려가 있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선박사업을 하고 있는 큰형님의 초청으로, 막 떠날 참이었다. 

<말> 지가 운명을 바꿔 놓을 줄이야
 
이런저런 준비를 하던 와중, 머리도 식힐 겸 해서 부산 서면에 있는 동보서적에 들러 오랜만에 <말>지를 사 보았다. 그런데 그 <말>지가 나의 운명을 바꿔놓을 줄이야. 신준영 기자가 쓴 아름다운 상술 최상근이란 기사를 읽다가 운명적 전율이 온 몸을 짜릿하게 감싸옴을 느꼈다. 
 
▲ 이인모 선생이 기록하고 <말>지 신준영 기자가 정리한 책  ⓒ 월간 말   
내용인 즉슨, 최상근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했으나 부속품시스템의 일부로 사는 것에 회의를 느껴 퇴직 후 부산 여러 곳에 전자오락실을 운영해서 큰 돈을 벌었다.
 
돈은 벌었지만 코흘리개들의 용돈을 갈취(?)한다는 찜찜함이 항상 가슴 한 구석을 짓눌렀다. 그래! 개같이 돈을 긁어모았다. 그러나 쓰기는 정승처럼 쓰자라는 생각으로 제대로 돈 쓸 곳을 궁리 하던 중 신념을 굽히지 않은 죄로 간난고초의 생을 살아온 비전향장기수의 실상을 접하게 되었다.
 
정승저럼 쓸 곳은 여기다라는 필이 꽂힌 최상근씨는 어렵게 생활하는 비전향장기수들을 후원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사를 접하고 난 후 나는 장고 끝에 아르헨티나 행을 포기했다. 그리고 <말> 지 부산지사를 통해 최상근씨를 만났다. 우리는 의기투합 했다. 그 즉시 최상근씨가 후원하고 있는, 비전향장기수 한창우 선생이 혼자 어렵게 운영하고 있는 경남 김해군 진영의 외딴 산 기슭에 외로이 자리잡고 있는 청둥오리농장을 찾았다.

나는 체질적으로 어떤 사상이나 이념, 또는 종교나 단체 등의 집단논리에 쉽게 경도되거나 몰입하는 성격이 아니다. 지천명을 넘긴 지금까지 딱 두 번 단체에 가입을 했지만, 질식사 할 것 같은 탁상공론과 집단상황논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내 뛰쳐 나왔었다(이곳 독일에서 10년 가까이 몸을 담았던 그린피스는 논외로 치자). 나는 온 몸으로 부대끼는, 실천이 배제된 탁상공론은 딱 질색인 사람이다.

아르헨티나 행을 포기한 건 그들의 신념때문

내가 아르헨티나 행을 포기하고 비전향장기수들에게 내 튼튼한 몸을 던지고자 했던 것은 그들의 사상에 경도 되어서가 아니다. 메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야만의 시절, 빨갱이라고 덧칠이 되면 곧 매장을 의미하던 시절에 수십 년 동안 갖은 협박과 공갈에도 굴하지 않고 험한 감옥살이를 견디고, 또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강철같은, 튼튼한 동아줄같은 신념이 나를 사로 잡았던 것이다.

생각과 사상의 자유가 강물처럼 흐른다는 이른바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자기와 다른 생각과 사상을 버리지 않는다고 해서 도를 넘어서는 핍박을 가하는 것도 있어서는 안 되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견뎌내는 그들이 나는 존경스러웠던 것이다. 사상은 사상의 자유시장에 맡겨야 마땅하다.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면.

나는 전장터에서 초개와 같이 산화해 간 이름 없는 국군병사나 인민군병사도 존경한다. 누가 옳고 그른지를 떠나 조국과 민족을 위한다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병사들도 분명 있었을 테니까.
 
마찬가지로 이른바 보주주의자들의 신념도 나는 존중한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나는 그들이 자기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기득권을 포기하고 목숨까지도 각오한다는 것을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말로는 만리장성을 못 쌓으랴.

단언컨대 진정성 있는 어느 보수주의자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수십 년 동안 목숨을 담보로 하는 핍박을 견뎌내고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가 내 앞에 있다면 나는 견마지로로서 그에게 헌신 했을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같은 선각자가 아니어도.

어쨌거나 그 후 나는 한창우 선생과 함께 농장 정상화를 위해 구슬땀을 흘리던 중 처음으로 이인모 선생에 대한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농장에서 백 여 미터 떨어진, 한때 정치를 했다는 김상원씨 집에 기거하고 있다가 고문으로 지병이 악화되어 부산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었다.

비전향장기수 이인모 선생과의 운명적 만남
 
나는 부산대학병원에 들러 병상에 누워 있는 이인모 선생을 처음 대면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피골이 상접한 얼굴, 퀭한 두 눈, 한 쪽 눈은 검은 눈동자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얗게 변색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마 한 쪽은 폭탄 맞은 자욱처럼 푹 패여 있었다. 그리고 다리는 맛이 간 오징어 다리처럼 흐느적 거렸다.

인민군 종군기자 출신 이인모! 신념이 무엇이기에, 무엇이 이 늙은 노인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가. 당시 나는 연민과 존경의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나는 선생을 보살피고 있는 부산 민가협 허운영 간사에게 상황을 물었고, 그는 퇴원을 해야 하는데 병원비 백만 원이 밀려서 아직 퇴원을 못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부랴부랴 은행에서 돈을 인출해 밀린 병원비를 지불했다. 그리고 이인모 선생과 동행해 김해 진영으로 돌아왔다. 다행히도 당시 나에게는 한겨레신문 지국을 정리하고 남은 금액이 상당히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농장 일을 하는 틈틈히 거동을 못하는 이인모 선생의 손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김상원씨 가족이 돌보고 있기는 했지만 흐느적 거리는 다리 때문에 언제나 축 늘어져 있는 이인모 선생이 화장실에 갈 때나, 특히 답답한 좁은 방을 벗어나 산책을 나갈 때면 나이 어린 자녀들이나 당시 오십대 중년인 김상원씨도 여간 벅찬 일이 아니었다.
 

▲ 1995년 8월 이인모 선생의 집을 방문해 평양 현관에서 함께 찍은 사진.  ⓒ 조영삼   

  
나는 항상 방에만 앉아 있어야 하는 이인모 선생에게 방에서라도 조금씩 운동하라고 목발을 사 드렸고, 최상근씨의 후원을 받아 평생 감옥살이 하느라 남쪽에서 변변한 추억거리하나 없을 이인모 선생을 위해 오직 그만을 위한 승용차를 사서 틈 나는대로 여기저기 함께 바람을 쐬러 다녔다.
 
어느샌가 공안 당국의 의심을 받고 있었던 나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내가 농장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 이인모 선생과 농장 사이에 직통으로 연결된 인터폰으로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이인모 선생의 에스오에스 전화가 걸려 왔다. 달려가 보니, 이인모 선생의 온 몸과 화장실 가는 길목인 복도는 분뇨로 떡칠이 되어 있었다.
 
당시 아이들과 김상원씨 부인은 학교에 가고 없었고 김상원씨는 외지에 볼 일 보러 장기간 출타 중이었다. 혼자서 높은 포복, 낮은 포복으로 끙끙 거리며 화장실을 기어가다가 고지를 바로 눈 앞에 두고 설사장군이 허술한 이인모 선생의 항문을 뿌지직 하고 박살 내 버렸던 것이다. 그것을 혼자 수습하려고 바둥거리다 일만 더 크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나는 이내 수습에 들어갔고, 다른 사람이 보기 전에 모든 흔적을 말끔히 지워버렸다. 이건 나와 이인모 선생만 아는 비밀인데 공소시효가 지난 비밀은 공개해도 무방하다는 어설픈 변명을 달아 슬그머니 내려 놓는다.

어쨌거나 이런 일련의 일들로 이인모 선생의 나에 대한 신뢰는 거의 절대적이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당시 나의 모든 것을 바쳐가며 농장 일과 이인모 선생 곁을 지키고 있을 때 나는 어느 틈엔가 운동권과 공안당국 양쪽에서 의심을 받고 있었다.

운동권에서는 아무 조직에도 속하지 않은 정체불명의 사내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자기 돈을 써 가며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 분명 미국 CIA나 KCIA 앞잡이인 것 같다는 것이었고, 공안당국에서는 혹시나 북한의 사주를 받은 자가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북한 당국도 당시 이것을 알고 있었다면 운동권과 같은 시선이었을지는 모르겠다.

허망하고 허탈했다. 당장 훌훌 털어버리고 형님이 있는 아르헨티나로 떠나 버릴까도 생각했었다. 색안경이라는 것, 참으로 편리한 안경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나는 하늘의 이치를 깨닫는다는 지천명의 나이를 넘긴 지금까지도 세상물정을 모르는 바보라는 소리를 종종 듣고 산다.
 
나는 잠시 흔들리기는 했지만 누가 뭐래도 내가 옳다는 이 길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간다라는 신념으로 색안경 너머의 시선들을 무시해 버리고 묵묵히 이인모 선생 곁을 지켰다.
 
그 후 1992년 5월 북의 연형묵 총리와 남의 국무총리가 회담하는 이른바 남북고위급회담 장인 신라호텔에 이인모 선생과 동행했다가 특수공무집행 방해 죄로 구속되었다.
 
당시 언론은 내가 이인모 선생과 남북고위급회담 북측대표단을 만나기 위해 신라호텔로 들어가려다 제지하는 경찰을 차로 떼밀어 상처를 입혀 구속됐다고 보도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신라호텔 정문에는 바리케이드가 겹겹이 쳐져 있었고 내가 차를 정차시킨 1미터 전방에는 검문을 받기 위해 대기중인 차량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차를 밀어붙여 경찰 등 7명을 다치게 한다는 것자체가 불가능했다. 나는 상고이유서에도 위와 같은 내용을 강조했었다. 
 
이인모 선생은 내가 안양교도소에서 사노맹의 백태웅, 전대협 의장 태재준, 한때 국회의원이었던 민애전의 이철우, <말>지 취재부장이었던 최진섭씨 등 그리고 조폭들과 징역살이를 하고 있을 때 판문점을 통해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갔다.

 
▲ 1993년 7월, 북으로 송환된 이인모 선생을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총비서가 접견하고 있다.  ⓒ <영광의 50년> 화면 캡처   

아르헨티나 행, 그리고 허가받지 못한 북으로의 여행
 
나는 만기 출소 직후 형님이 기다리고 있는 아르헨티나로 지친 심신도 달래고 형님 사업을 도우면서 돈을 좀 벌어 다시 내나라 내땅으로 돌아온다는 기약을 장기수 윤희보 선생, 민가협 의장 안옥희 여사, 양심수후원회장 권오헌 선생, 당시 전국참교육학부모협의회 회장이었던 김영만 선생, 인권운동사랑방 주인장 서준식 선생 등에게 하고 대양을 횡단하는, 지구의 땅끝 동네로 향하는 점보기에 몸을 실었다. 1993년 11월의 일이다.

그러나, 하마, 그때는, 정말, 내나라 내땅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막혀 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아르헨티나에서 한창 일에 열중해 있을 때 이북에서 이인모 선생 이름으로 초대장에 준한 엽서가 날아왔고, 나는 일생일대의 장고에 장고를 거듭한 끝에 이인모 선생이 타계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만나야 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인모 선생과의 마지막 이별은 너무나 서글프고 처량했었다. 남북고위급회담 진입 사건에 대한 조사를 받기 위해 안기부로 끌려가는, 싸늘한 이른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고속도로 선상에서 였다. 그것이 이승에서의 마지막일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아직 젊다.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이 선생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금지의 땅으로 나를 이끌게 한 동기였다.
 
결국 나는 독일을 거쳐 지구를 거의 정확히 한바퀴나 에돌고 돌아서 우리의 반쪽 땅을 밟았던 것이다. 1995년 8월 15일의 일이다. 국가보안법상 반국가 이적단체의 땅에, 허가받지 않고.

▲이인모 선생(오른쪽에서 두번째)이 비전향장기수 김종호 선생의 양로원을 방문해 함께 찍은 사진 
ⓒ 조영삼    


그뒤로 나는 독일에서 3년 가까운 망명수용소 생활을 거쳐 지금까지 남부의 자그마한 강변도시에서 가난한 노동자로 생활하고 있다. 수용소 생활 와중, 나는 아주 사악한 음모에 휘말려 이곳에서 악명(?) 높기로 유명한 쉬탐하임 교도소에서 국제빵잽이 생활도 해 보았다.
 
물론 8년 전 한국에서 비행기로 보쌈해온 엄지공주보다 쬐끔 더 큰 우렁각시와 늦깎이 결혼을 해서 지금 한국에서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나의 분신, 붕어빵 아들인 똥가리도 있다.
 
그러나 서글프게도, 나는 현재 이 시대의 마지막 정치망명자라는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인정하기 싫지만 현실이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이인모 선생과의 만남, 아직도 한국의 많은 이들은 우리들의 만남을 잘못된 만남이라고 낙인 찍고 싶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나는 우리들의 만남이 어느 작가가 말했듯이 완전한 만남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잘못된 만남은 아니며 분단비극이 빚어낸 운명적 만남이라고 생각하며 후회는 없다. 나머지는, 우리들의 만남이 잘못된 만남인지 완전한 만남인지는 독자들 개개인 생각의 자유에 맡긴다.
 
덧붙이는 글 | 새는 좌우의 날개가 건강해야 높고 멀리 날 수 있다. 반 쪽의 날개로는 단 1미터도 날 수가 없다. 나는 좌든 우든 맹동주의는 철저히 배격하는 사람이다. 극단적 맹동주의는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독이기 때문이다.
 




원본 기사 보기:신문고
  • 도배방지 이미지

조영삼, 이인모, 망명자, 장기수 관련기사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