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백귀야행(百鬼夜幸)(31-1) 레퀴엠 불러

이슬비 | 기사입력 2020/01/18 [11:23]

[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백귀야행(百鬼夜幸)(31-1) 레퀴엠 불러

이슬비 | 입력 : 2020/01/18 [11:23]

<지난 글에 이어서>   

홍녀의 교형은 그길로 집행되었다. 정옥의 명령과 함께 야음을 가로지른 그녀의 시위들은 잠자리에 들 채비를 하는 자여의 처소로 쳐들어가 방문을 열었다. 자여의 처소를 지키던 시위들이 검을 뽑아들려 했지만, 정옥의 시위들이 한 발 더 빨랐다.

 

홍녀를 당장 잡아들여 교형에 처하라는 가주님의 명이다. 당장 비키지 않는다면 가주님에 대한 항명으로 여기고 모두 베어버릴 테니 그리 알라!”

 

같은 시위라 해도 가주의 시위는 후계의 시위보다 격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가주의 명령을 가지고 오기까지 하였으니 자여의 시위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신지요?”

 

깨끗하게 손질된 새 침구를 들고 자여의 방으로 향하던 노예들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정옥의 시위들은 노예들을 한쪽으로 밀치고 복도를 지나 자여의 방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이제 막 침의로 갈아입으려던 자여가 옷을 반쯤 벗은 채로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자여가 벗어던지는 옷을 받고 있던 홍녀가 정옥의 시위들을 돌아보았다.

 

옷을 입을 시간은 드리지요.”

 

남자 시위들이 뒤로 물러서고 여자 시위들이 앞으로 나왔다. 시위들은 자여가 옷을 갈아입기를 기다려 입을 열었다.

 

홍녀를 내어주시지요, 공주님.”

 

홍녀를 내어달라니! 그 무슨 말이냐!”

 

 

당장 홍녀를 잡아들여 교형에 처하라는 가주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시위들의 목소리는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사형선고를 전하는 메마른 목소리에는 그 어떤 연민도,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어머니께서 홍녀를 왜……!”

 

홍녀는 한씨가의 제2후계이신 서란 아가씨를 살해하려 부군마님과 공모해 그분의 시위들을 매수하고, 그로도 모자라 암살자들까지 보냈습니다. 이는 명백한 후계살해모의 및 미수입니다. 마땅히 죽음으로 다스려야할 중죄이지요.”

 

……!”

 

홍녀……!”

 

자여가 홍녀를 돌아보았다. 홍녀는 고개를 숙이고 발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 어서 홍녀를 내어주시지요.”

 

시위들이 방 안으로 들어가 홍녀의 몸에 오랏줄을 채웠다. 붉은 오랏줄에 묶인 홍녀는 끌려가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시위들은 검은 천 조각으로 그런 홍녀의 두 눈을 가려버렸다.

 

홍녀! 홍녀! 홍녀어!”

 

자여가 홍녀의 이름을 부르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시위들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자여는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기 시작했다. 자여의 울음소리가 연무장에 있는 서란의 귀에도 들렸다. 서란은 귀찮다는 듯이 한 손을 휘휘 내저었다.

 

하여튼 자여는 너무 약해빠져서 큰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가주님?”

 

정옥의 두 눈썹이 부르르 떨렸다. 서란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러다 자여가 혼절할까 걱정이 되어 그럽니다. 사촌언니로서 그 정도 걱정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서란은 유흔의 손을 꼭 쥐었다. , 붉은 오랏줄에 묶인 홍녀가 눈에 검은 눈가리개까지 씌워진 채로 연무장으로 끌려왔다.

 

유흔.”

 

서란은 유흔의 손을 놓고 앞으로 나섰다. 홍녀가 끌려옴과 동시에 연무장에 교수대가 마련되었다. 사람 한 명의 몸무게를 지탱할 만큼의 거대한 기둥에 튼튼한 밧줄이 걸리고, 밑에는 평상이 놓였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목에 밧줄이 묶인 홍녀가 애원했다. 서란은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천천히 홍녀를 돌아보았다.

 

아직 공주님께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올리지 못했습니다. 한 번만, 단 한 번만 작별인사를 올릴 수 있도록…….”

 

작별인사라.”

 

별안간, 서란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서란은 진심으로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작별인사를 하게 해달라고? 그러는 홍녀 자신은 추을과 공모해 자신을 죽이려 하지 않았던가. 만약, 그들의 의도대로 자신이 죽었다면

 

나는 다시 유흔을 못 보는 거였잖아. 나는 다시 유흔을 못 볼 뻔했잖아.’

 

서란은 홍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목이 밧줄에 묶인 상태에서도 홍녀가 흠칫, 몸을 떨었다.

 

내가 죄인의 말 따위를 들어줘야할 이유가 무엇이지?”

 

서란은 홍녀의 발밑에 놓인 평상을 한 번 발로 걷어찼다. 평상이 움직이며 홍녀의 목에 걸린 밧줄을 더 세게 죄었다.

 

물러서십시오.”

 

형의 집행을 맡은 교위가 서란을 뒤로 물러나게 하고 평상을 치워버렸다. 홍녀의 몸이 허공으로 들리며 대롱대롱 매달렸다.

 

가자.”

 

정옥이 처소로 사라지고 나서도 서란은 한참을 더 연무장에 있었다. 서란은 눈앞에서 대롱대롱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는 홍녀의 시신을 아무 감정도 섞이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투둑. 투둑. 홍녀의 몸에서 배설물이 쏟아졌다.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혀 잘리신 분

우리 기도 들으소서 귀 먹은 분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당한 분

그래도 내게는 하나뿐인 민중의 아버지인 분

당신은 죽어버렸나

어두운 골목에서 울고 있을까

쓰레기더미에 묻혀버렸나 가엾은 분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당한 분

그래도 내게는 하나뿐인 민중의 아버지

 

서란은 민중의 아버지를 불렀다. 민중의 아버지는 유일하게 부상국에서 만들어진 성가로, 부상국의 가톨릭교도들이 당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야훼하느님같은 말들을 넣지 않고 불렀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한때 가톨릭만큼 탄압받았던 일련종의 승려들과 신도들이 즐겨 부르기도 한다고 했다. 그러나 서란은 마음속으로는 금지된 노래, 레퀴엠을 불렀다. 유흔이 항상 부르는 노래, 레퀴엠을.

 

Kyrie, kyrie,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eleision, chrieste, eleision

Kyrie, elei, kyrie, lyrie, eleision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레퀴엠은 죽은 자를 애도할 때 부르는 노래라 그랬던가. 그러나 서란은 홍녀를 애도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죽을 수도 있었던 자신이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에, 살아서 유흔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하는 것이었다. 서란은 바람에 흔들리는 홍녀의 시신을 노려보았다.

 

너 따위에게 죽기 위해 독을 먹고도 숨이 쉽게 끊어지지 않았던 게 아니야.’

 

서란은 아직도 처소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 어머니 유란을 노려보았다. 참 징글징글하기도 하지. 다섯 살 어린 자신에게 독을 먹였던 여자를 어머니라고 불러야 한다는 사실이, 그리고 어쨌거나 자신을 낳아주고 5년을 키워줬던 어머니라는 사실이 징그럽기 그지없었다. 서란은 홍녀의 시신을 두고 돌아서 유흔에게 다가갔다.

 

가자, 유흔.”

 

서란은 유흔의 손을 잡았다. 유흔이 서란의 손을 잡고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다음 글에서 계속>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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