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백귀야행(百鬼夜幸)(30-1) "두려워"

이슬비 | 기사입력 2019/12/14 [10:11]

[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백귀야행(百鬼夜幸)(30-1) "두려워"

이슬비 | 입력 : 2019/12/14 [10:11]

 <지난 글에 이어서>두려웠다. 지금 이 상황이 두려웠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두려웠고, 지금 일어나는 일들과 앞으로의 일들을 위해 준비해왔던 것들이 두려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서란은 지금 자기 자신이 가장 두려웠고, 지금껏 해왔고, 지금 하고 있고, 앞으로 해야 할 모든 일들이 두려워 견딜 수 없었다.

 

하하.”

 

두려움을 느끼면 눈물이 난다고 누가 그랬던가. 그러나 그 말을 한 사람은 필경, 극한의 두려움에, 자기 자신을 향한 두려움에 몸서리쳐본 적이 없을 것이었다.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아하하. 아하하하. 아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 서란은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넋을 놓고 웃었다.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와 서란은 허리를 잡고 깔깔 웃어댔다.

 

이렇게 웃으면 천한 기생년 같아 보인다고 유흔이 그랬는데.’

 

서란은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연희에 종사하는 기생들이나 몸을 파는 창기들은 모두 이렇게 웃었다.

 

내가 진짜 넋이 나갔군.’

 

모든 함정은 계획대로 파두었다. 추을이 반드시 후계살해모의라는 혐의를 뒤집어쓰도록, 그 혐의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도록 만에 하나의 만에 하나까지 대비한 함정을 파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주도한 사람은 바로 다름 아닌 서란 자신이었다.

 

하아.”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짧은 순간, ‘이럴 바에야 차라리 후계혈전에서 자여의 손에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서란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털어냈다. 아무래도 자신이 미쳐도 단단히 미친 모양이었다. 서란은 유흔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다 그만두고 안으로 들어가 유흔의 무릎이나 베고 누워 있고 싶었다.

 

하지만 살아야 유흔과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잖아.’

 

서란은 문득. 어머니를 떠올렸다. 후계혈전에서 패배하고 후계의 작위마저 박탈당한 채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도 그 여자는 정후계라서 그렇게나마 살아 있을 수 기회라도 얻은 거잖아.’

 

서란은 또다시 자신의 처지를 떠올렸다. 윤희가 죽고 자신이 한씨가의 제2후계가 된 지 몇 년이 지났다 하나, 그녀가 방계출신의 후계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언제까지나 그녀는 방계 출신의 후계였고, 한씨가의 37대 제2후계였던 유란의 딸이었다.

 

한하연이라 했던가.’

 

서란은 자신의 사촌이모였으며, 한씨가의 37대 제3후계였던 하연의 위패를 본 적이 있었다. 모든 방계출신 후계들이 그러하듯, 한하연 그녀 또한 후계혈전에서 가장 먼저 스러졌으며, 모두의 기억에서 그 이름을 망각해야 했다. 그러나 서란 자신은 다를 것이었다. 자신은 반드시 살아남아 가주가 될 테니까.

 

유흔.”

 

서란은 유흔을 불렀다.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유흔의 열 손가락 사이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었다. 맞닿은 손가락 사이사이가 든든하게 느껴졌다. 서란은 그 손가락에 자신을 기댔다.

 

화야.”

 

유흔이 서란을 불렀다. 서란은 유흔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기댄 자신을 내려놓았다. 유흔이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서란이 익히 알고 있는, 가라고루성에 금지된 노래가 연무장을 수놓았다.

 

kIirie, kirie, kirie, eleision

kirie, eleision,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eleision, christe, eleision

kyrie, elei, kyrie,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서란은 손가락 사이사이에 더욱더 자신을 기댔다. 지금 이 순간, 서란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유흔과 자신, 단 둘만 이 세상에 존재할 뿐이었다.

 

유흔.”

 

서란을 유흔을 불렀다. 유흔이 손가락 사이사이에 힘을 주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손가락들 사이사이를 통해 느껴지는 체온과 맥박, 그리고 심장의 고동에 서란은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하얀 꽃잎이 떨어지던 날

꿈같은 사랑이 찾아왔고

그의 사랑에 가슴이 아파

삼켰던 눈물이 얼마 만큼인가

내 눈물이 강물이 되어

저 바다로 흘러간 뒤에

비가 되어 그대 얼굴을

단 한 번만 보고 싶어라

 

거친 바람이 나를 떠밀며

이 모진 세상을 떠나라하네

비가 내리고 내 어깨를 만지며

가슴 속 깊이 묻으라하네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못 다했던 내 말 들어준

그대 품에 안겼던 그 날

나는 다시 태어났노라

 

아픈 나의 사랑아

그리운 나의 사랑아

그대 눈빛 그대 손짓 그대 목소리

하나만 내게 남겨줘

사랑했던 나의 사람아

못 다했던 내 말 들어준

그대 품에 안겼던 그 날

나는 다시 태어났노라

못 다했던 내 말 들어준

그대 품에 안겼던 그 날

나는 다시 태어났노라

그대를 사랑했었노라

 

서란은 노래를 불렀다. 유흔은 언제까지나 자신의 편일 것이었다. 그리고 항상 자신의 곁에 있을 것이었고, 절대로 자신을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었다. 서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흔이 곁에 있는데 두려워할 이유가 무엇일까. 서란은 유흔에게 말했다.

 

유흔, 나 이제 안 무서워.”

 

화야.”

 

유흔이 곁에 있잖아. 그러니까 나 안 무서워. 그러니 유흔…….나 혼자 두고 어디 가지 마.”

 

나 혼자 두고 어디 가지 마. 그 말을 하는 서란의 손가락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제 서란의 곁에는 보현도 있고, 오늘 얻은 비화, 구향, 소하, 자영, 화요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그 누가 곁에 있다 해도 유흔이 없다면 서란은 혼자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화야.”

 

…….”

 

너는 반드시 살아남을 거야. 내가 그렇게 할 거야. 그러니까 너무 두려워하지 마.”

 

유흔의 시위장의 뒤를 따라 연무장으로 들어설 추을을 기다리는 동안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아.”

 

서란은 지금 방계 출신의 후계 주제에 정후계를 제치고 한씨가의 38대 가주가 되려 하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정후계 자여의 아버지이며 지지자인 추을의 세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자여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입지를 굳혀 후계정쟁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려는 것이었다. 그래야 후계혈전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질 테니까.

 

나는 반드시 살아남을 거야.’

 

여태까지의 후계혈전에서 방계출신 후계가 살아남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방계출신 후계는 모두 살아남을 단 한 명의 정후계를 위한 제물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자신은 다를 것이었다. 자신은 반드시 살아남아 가주가 될 것이었다. 서란 자신은 고작 자여 따위의 손에 죽기 위해 다섯 살 어린 날에 어미가 주는 독을 삼키고도 한동안 숨이 붙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다음 글에서 계속>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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