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여신의 춤(29-2) "죽은 자는 말 없어"

이슬비 | 기사입력 2019/11/29 [10:39]

[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여신의 춤(29-2) "죽은 자는 말 없어"

이슬비 | 입력 : 2019/11/29 [10:39]

<지난 글에 이어서>

그런데 나는 그 세 가지를 모두 다 해보려 한다.”

 

……!”

 

후계이되 정후계가 아닌 내가 정후계인 자여를 공격하고, 지지자들이 나를 준동하게 만들어 분쟁을 일으키고, 자여가 죽으면 그 지지자들을 모두 죽일 테다.”

 

…….”

 

물론, 도박이다. 하지만 오늘 죽을까 내일 죽을까, 하루하루 죽을 날만 기다리며 숨을 죄여오는 두려움에 떨고 있느니, 단 한 번이라도 그 두려움에 맞서 싸워봐야 하지 않겠나.”

 

…….”

 

그러니 너희들도 나와 함께 도박이라는 걸 해보는 것이 어떠하냐? 너희들은 이미 한 번 제 주인을 배신하는 도박을 해봤던 봐다. 그러니 조금 전 죽어간 셋처럼 내 손에 죽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너희가 나와 함께 하겠다면 나는 너희들이 나를 배신했다는 사실을 덮을 것이며, 자여나 추을, 자여의 시종장이 너희를 해치지 못하게 보호할 것이다.”

 

조금 전에 동료들을 죽여 놓고 함께 하자 손을 내밀다니. 스스로가 생각허기에도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싶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어느 쪽도 서란에게는 나쁠 것이 없는 일이었다. 이들이 자신과 함께 한다면 이들을 정옥과 추을의 앞에 증인으로 세우면 될 것이었고, 그렇지 않다면 이들을 죽여 증거로 삼으면 될 것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까.’

 

사람을 처음 죽이고 벌벌 떨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 아무렇지 않았다. 누군가를 죽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 그것이 이 한씨가이고, 더 나아가 작금의 전국이니까.

 

서란은 검을 공중에서 휙휙 돌리며 시위들을 바라보았다. 시위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대답을 하지 않을 셈인가?”

 

공중에서 돌아가던 검이 멈췄다. 서란이 칼자루를 단단히 고쳐 잡았다. 어차피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이 아니었다.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피가 꽃잎처럼 후두둑 떨어졌다. , 잘린 목에서 붉은 피가 강처럼 흘러 연무장의 모래에 스며들었다. 참으로 덧없어라. 이래서 사람의 목숨을 꽃 같다 하던가. 보아라. 저 모습이 꽃이 떨어지는 것과, 떨어진 꽃들이 강물처럼 빗물에 흘러다니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자비 깊은 아미타불의 검에 걸리는 몸에

무언가 다섯 개의 죄가 있네

 

서란은 즉석에서 지은 단가를 읊었다. 단가를 들은 것인지 유흔이 다가와 서란의 어깨를 잡았다.

 

나 이제 어린애 아니야, 유흔.”

 

서란은 다시 허공에 대고 검을 그었다. 검날이 한 번 허공에 그어질 때마다 붉은 피가 후두둑 떨어지고, 잘린 목들과 몸통들에서 피가 강처럼 흘러 모래에 스며들었다.

 

추을을 데려와.”

 

명령을 받은 유흔의 시위장이 추을의 처소로 향했다. 유흔은 서란의 피 묻은 손을 등 뒤로 잡아주었다. 참 손이 작구나. 새삼스레 든 생각에 유흔은 자꾸만 서란의 손가락 굵기를 가늠했다. 확실히 손가락이 가늘구나 생각하며 유흔은 서란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깍지를 꼈다.

 

*

 

같은 시각, 유란은 처소를 나서 정옥의 집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유란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은 시종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지만, 유란은 자신의 처소를 지키던 시위의 검집에서 검을 빼 들었다. 연금된 이후로 단 한 번도 잡아보지 않았던 검이었지만 곧, 예전의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비켜서라.”

 

유란님!”

 

비켜서라 하였다.”

 

안 됩니다, 유란님!”

 

명령이다!”

 

유란이 노호성을 내질렀다. 그 기세에 시종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시위들은 들어라. 지금부터 내 앞을 가로막는 자들은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그 누구든 베어버려라. 뒷일은 내가 책일 질 터이니 너희들의 목숨은 염려치 말라.”

 

정옥의 집무실 앞에 도착한 유란을 정옥의 시위들이 막아섰다. 조금 전 유란에게서 명을 받은 시위들이 검을 빼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란은 그런 시위들을 저지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당장 가주님께 고하여라! 한씨가의 37대 제2후계였던 가주님의 동생 한유란이 언니인 가주님께 문후를 여쭈러 왔다고!”

 

유란의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안쪽에 있는 정옥이 직접 문을 열고 나올 지경이었다. 정옥은 늦은 밤에 자신을 찾아온 광인 동생을 못마땅한 얼굴로 보다, 이내 눈을 한 번 깜빡이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 푸흐흐흐. 푸흐흐흐흐흐흐.”

 

오랜만에 뵙습니다, 가주님.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유란이 마룻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한 손을 꿇은 무릎 위에 올리고, 나머지 한 손을 바닥에 늘어뜨렸다. 완벽한 예법으로 인사를 올리는 유란에게서 광인의 기색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놀라지 않으십니까.”

 

너는 내가 놀라기를 바랐나보구나.”

 

제가 광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 지금 알았다. 그리고 네가 그동안 나를 속이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영악한 계집.’

 

후계혈전 날 삼백족의 옷을 입고 나타나 지지율마저 떨어진 주제에, 자신에게 목숨을 구걸해 살아남았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저 계집이 결코 자신의 명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래, 애초부터 자신의 명을 따를 생각이 없었으니 감히 와 주혼을 맺고 아이까지 낳을 생각을 했을 것이었다.

 

한데, 네가 어인 일이냐? 단순히 네가 미치지 않았음을 내게 알리러 온 것은 아닐 테고.”

 

첫 번째 연유는 그것이 맞습니다. 언니이신 가주님께 제가 광인이 아님을 증명하려는 것이지요. 제가 광인이 아님을 증명함으로써, 이제 저는 가주님께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 되었겠지요. 이것이 두 번째 연유입니다. 그리고 그런 위협적인 인물이 단순히 뒷방에만 갇혀 늙어 죽어가지 않고 한 명의 후계를 지지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세 번째 연유입니다.”

 

한 명의 후계를 지지한다.”

 

그리고 제가 지지하려는 한 명의 후계는 저의 딸 한씨가의 38대 제2후계 한서란, 카무라 프리 샤르휘나입니다. 이렇게 저는 한서란, 카무라 프리 샤르휘나의 지지자로 나서고자 합니다. 이것이 가주님을 찾아온 마지막 네 번째 연유입니다.”

 

유란은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어 또박또박 끊어내듯 말했다. 자신 또한 후계혈전에서 한 명의 후계를 지지함으로써 혈전에 가담하겠다 말하는 것이니 강해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 저는 이제 한서란, 카무라 프리 샤르휘나의 지지자로서 그녀를 살해하려는 자를 고변하고자 합니다.”

 

말을 마치며 유란은 정옥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마치 당신의 딸에게 내 딸을 잃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다음 글에 이어짐>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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