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여신의 춤(26-1), "내일 오세요"

이슬비 | 기사입력 2019/06/24 [10:37]

[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여신의 춤(26-1), "내일 오세요"

이슬비 | 입력 : 2019/06/24 [10:37]

<지난 글에 이어서>

1년이나 지속된 경제학수업은 만만치 않았다. 무역과 전쟁, 그리고 지금 서구에서 새로 태동하는 신흥세력인 자본가들과 그들의 밑천인 자본, 또 산업과 중상주의정책 등에 이르는 모든 수업과정은 수업이 진행될 때마다 서란의 이해도를 시험하는 단계가 되었고, 수업을 잘 이해하지 못할 때마다 서란은 몇 번이고 그 수업 내용을 다시 들으며 이해할 때까지 피에드르의 혹독한 질책을 받아야 했다.

 

당신은 저를 시험하십니까?”

 

마치 자신이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 시험하는 듯한 피에드르의 태도에도 서란은 억울하다는 기색 한 번 없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그 모든 과정들을 견뎌냈고, 그럴 때마다 피에드르는 서란 몰래 유흔에게 나를 가르칠 때의 당신과 똑같다는 볼멘소리를 들어야 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니까요. 십수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하여 사람이 한순간에 변한다면 그는 진실 된 마음이 없는 이일 것입니다. 아니면,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르고 있다 이제야 찾아가는 사람이거나요.”

 

그리고 1년여의 수업이 끝난 어제, 피에드르는 네덜란드로 돌아갈 계획을 밝혔고, 언제 돌아갈 것이냐는 서란의 물음에 가장 빠른 배편으로 떠날 테니 작별인사 따위는 필요 없다 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어디 그렇던가. 서란은 결국, 책거리를 겸한 작은 환송식을 열기로 하고, 늘 수업을 하던 살롱을 하루 동안 통째로 빌렸다.

 

도미구이와 연어조림이네요.”

 

테이블에 펼쳐진 생선요리에 피에드르는 젓가락을 들고 환히 미소 지었다. 부상국에서 도미는 축하와 좋은 일을 뜻하는 생선이었다. 그러니 도미구이는 생일이나 백일, , 혼인, 명절, 연회 때 빠지지 않고 상에 올리는 음식이었다. 또 제화족 식의 연어조림인 치치미도카사이는 북방의 키야트 아이누의 음식인데, 북방에서는 쉽게 얻을 수 없는 여러 채소들과 간장, 소금, 설탕, 정향 등의 갖가지 향신료를 연어와 함께 넣어서 몇 시간 동안 조린 것으로, 키야트 아이누들이 설이나 경사, 혹은 장례식 때 늘 만들어 먹는 음식이었다.

 

제가 가는 것이 기쁜가봅니다, 서란?”

 

이제는 레이디라고 부르지 않는다. 1년 사이에 서로를 편히 여기게 되었음을 새삼 떠올리며 서란은 푸흐흐,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 슬퍼해야 하나요? 제가 슬퍼하면 피에드르 당신도 슬피 울며 떠날 텐데요.”

 

그런가요.”

 

맛있는 생선요리와 함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서란은 시종을 시켜 작은 목함을 가져오게 했다. 반들반들 윤이 나게 옻칠한 검은 나무상자의 바닥에는 부드러운 비단천이 깔려 있고, 그 위에 특이한 모양의 나무판에 실을 매단 것이 놓여 있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 피에드르는 이런 것 처음 보나 봐요? 이건 뭇크리라는 거예요. 우리 제화족의 전통악기인데, 연주하면 바람소리가 나요.”

 

서란은 나무판의 가운데부분을 물고, 실을 셋째와 넷째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잡아당겼다 놓았다 하며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 총총총총 하는 소리와 함께 피에드르에게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랜 벗은 잊혀져야만 하고,

결코 떠올리지 않게 되어야 하는 것인가요?

오랜 벗은 잊혀져야만 하는 것인가요?

그리고 좋았던 옛 시절도……!

 

지나간 시절을 위해, 벗이여

지나간 그 시절을 위해,

우리 이제 이별의 정을 나누세

지난 시절을 위하여

 

스코틀랜드의 민요가 아닙니까?”

 

피에드르의 말에 서란은 환히 웃으며 뭇크리를 내려놓았다. 피에드르가 의아하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네덜란드 사람인 제가 스코틀랜드 민요를 알 것이라 어찌 장담하셨습니까?”

 

피에드르 당신이라면 알고 있을 것 같았어요. 그뿐입니다.”

 

사실은 당신을 위하여 이별의 정한을 담은 시를 지어 연주해주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어 이곳의 서양인들에게 급하게 수소문해 이별의 정한을 담은 노래를 골라 연주했노라는 말을 서란은 하지 않았다.

 

저는 단가나 한시도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렇습니까?”

 

부상국의 단가와 한시는 부상국인들의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지요. 저는 부상국인들의 정서를 담고 있는 부상국의 문학작품이 참 좋습니다.”

 

피에드르의 말과 함께 화재는 어느새 가화전에 대한 것으로 옮겨갔다. 서로 가화전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과 가장 안타까운 인물을 이야기하는 내내 두 사람은 해이안교의 시대의 정서에 대한 격론을 벌이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저는 리타가 가장 안타깝습니다. 서른이 넘은 가화가 자신의 첩으로 삼기 위해 몰락한 귀족가의 아이를 사오다시피 하여 집안에 가두어 키웠지요. 그리고 가화가 그녀를 자신의 첩으로 삼으려던 날 밤, 가화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화지아가 가화인 척 그녀의 방에 들고요. 가화의 첩이 되기 위해 일평생을 살았던 그녀는 스스럼없이 지아에게 몸을 허락하고, 지아는 그녀를 범한 것을 만천하에 알려 자신의 첩으로 삼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에 충격을 받은 리타는 끝내 자결하고 말았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해이안교의 시대까지 삼백족에게는 여자를 겁탈해 혼인하는 일이 잦았으니까요. 물론, 저희 제화족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만.”

 

서란, 당신의 말은 마치 삼백족이 제화족만 못한 야만인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만?”

 

그렇게 들으셨습니까? , 그리 들으셨다면 어쩔 수 없지요. 적어도 제화족은 삼백족처럼 여인을 천하게 여긴 적이 없으니까요.”

 

환송식은 화기애애하게 끝이 났다. 자신이 선물로 준 뭇크리를 소중히 챙기는 피에드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서란이 피에드르의 손을 붙잡아 자리에 앉혔다.

 

이제 그만 가봐야 합니다. 짐도 정리하고, 이래저래 떠날 준비도 해야 하니까요.”

 

잠시만이면 됩니다.”

 

서란?”

 

악기를 선물로 드렸는데 운지법을 가르쳐주지 않고 보내드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서란은 뭇크리를 피에드르의 손에 쥐어주고 운지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피에드르의 입가에 가져간 뭇크리를 입술로 물게 한 서란은 작은 나무 조각을 매단 실을 오른쪽 셋째와 넷째 손가락 사이에 끼워주었다. 서란은 이제 당신이 직접 해보라 말하고는 짓궂게 웃었다.

 

아직 소리가 나지 않네요?”

 

서란은 실을 위로 감아올리듯이 돌려야 한다며 몇 번이나 운지법을 수정해주었다. , 뭇크리에서 미약한 쫑, 쫑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우와.”

 

왜 그러십니까?”

 

서란이 감탄하는 기색을 보였다. 피에드르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야 이렇게 빨리 소리를 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까요. 간단해 보여도 소리 내기가 어려워서 몇 년이 걸려도 못 익히는 사람들을 수없이 봤거든요.”

 

서란의 말에 피에드르는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야 당연한 일이 아닌가. 제화족의 모든 악기는 우주의 주신인 카무이신이 어둠에 맞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봉헌물이었다. 하니, 소리를 내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인간이 쉽게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라면 그것은 신을 위한 봉헌물이 아닐 테니까.

 

내일 다시 이곳으로 오십시오.”

 

피에드르는 서란을 바라보다 눈을 내리깔았다. 나이답지 않게 침잠한 눈을 보고 있으면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착잡해지는 것을 피에드르는 어찌할 수 없었다.

 

이런 것을 받고 그냥 떠날 수는 없으니까요.”

 

…….”

 

그러면 기다리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살롱을 나서는 피에드르의 등을 바라보다 말고,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볼우물에 미소를 머금었다. ‘기다리겠습니다.’ 이 말을 들어본 적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다음 글에 계속>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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