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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01.17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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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부도 아버지도 스승도 아냐, 그냥 유흔이야"
[연재소설] 홍매지숙명 피다, 제24장 폐월수화(閉月羞花)(24-1)
 
이슬비

<지난 글에 이어서>

“왜 그러느냐? 유흔은 네 숙부이니, 그가 예쁜 여인을 만나 혼인을 하면, 너에게는 어여쁜 숙모가 생기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한 번 열린 입은 쉬이 닫힐 줄을 몰랐다. 기어이 백연은 또다시 입을 열고 말았고, 서란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 더욱 더 심각해져 있었다.

 

“숙부 아니야.”

 

한동안 심각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서란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서란은 백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버지도 아니야. 나는 유흔이 아버지 같은데, 유흔은 나에게 자신을 아버지라고 여기지 말래. 하지만 스승도 아니야. 자신이 나에게 이것저것 가르친 것은 맞지만, 스승이라고 여기지는 말래. 내가 배우고자 해서 배운 것이니까.”

 

“……?”

 

“그러니까 나에게 유흔은 그냥 유흔이야.”

 

말을 마치자마자 서란은 몸을 일으켜 지하감옥을 빠져나갔다. 감옥 안과 밖을 잇는 돌계단을 올라가는 서란의 발소리를 들으며 백연은 옥사의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댔다. 자신이 짐작하는 것이 맞다면, 서란은 유흔에게 ‘어른이 된 자만이 온전히 품을 수 있는 감정'을 품기 시작하고 있는 것일 터였다.

 

제24장 폐월수화(閉月羞花)(3)-1

 

“숙부라고 하지 마. 나는 본래 한씨가의 사람이 아니야.”

 

서란을 키우게 되었던 그날, 유흔은 서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했다. 자신은 본래, 한씨가의 사람이 아니니 숙부라고 부르지 말라고.

 

그러면 숙부를 숙부라 부르지 무엇이라 부르냐는 서란의 질문에, 유흔을 서란의 양육자로 지정한 정옥은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어떻겠느냐”는 말을 내던졌고, 서란은 눈만 되록되록 굴리며 그 말을 맞받았다.

 

“아버지요?”

 

그때, 서란은 어떠했던가. 갑자기 생긴 아버지에 당황스러웠던가. 아니면 나도 아버지가 생겼다 생각하며 기뻐했던가.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유흔은 서란에게 아버지라고 불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네 아버지가 아니야.”

 

시종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서란의 물건을 유흔의 처소로 옮기는 사이, 유흔은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라다니는 서란에게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갑자기 차가워진 유흔의 태도에 놀란 서란이 유흔의 옷자락을 잡아왔고, 유흔은 그런 서란을 가만히 품 안에 끌어안았다.

 

“그러니까 나를 네 아버지라고 여기지 마. 나는 네 아버지가 될 수 없어.”

 

그리고 서란에게 처음 가림토문자를 가르치기 시작한 그날, 유흔은 서란을 처음 키우던 날과 마찬가지의 차가운 태도로 말했다.

 

“스승이라고도 부르지 마. 나는 너를 가르치는 게 아니야. 그저 네가 스스로 배우는 것뿐이야. 그러니까 나를 스승이라고 부르지 마.”

 

그 후에도 이따금씩 서란이 유흔을 사부라고 부를 때마다, 유흔은 평소의 유흔답지 않게 급격히 차가워진 태도로 ‘나는 너의 스승이 아니다’라고 말했고, 서란은 더 이상 유흔을 그 무엇으로도 호칭하지 않기로 했다.

 

 

그때는 괜찮았는데. 그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그저 유흔만 곁에 있으면 다 좋았는데. 다 행복했는데.

 

백연을 만나기 전까지는 몰랐던 감정이었다. 갑작스레 찾아든 혼란스러움과 당황함, 그리고 알 수 없는 묘한 기시감은 서란을 여태 느껴본 적 없는 이름 모를 어떤 감정의 도가니로 밀어 넣었다.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부여잡았다. 여태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의 도가니 한가운데에서 두근거림이 느껴짐과 동시에, 온몽을 휘어잡는 거대한 격통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그러나 서란은 격통을 참아내며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에 가서 활이나 암기를 쏘거나, 검을 수련하면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감정도, 참기 힘든 격통도 잠잠해질 것 같았다.

 

서란은 연무장 한가운데에 과녁판을 세우고 활을 쏘았다. 양손 엄지에 깍지를 끼우고, 팔에는 아대를 찬 서란은 활 몸체를 얼굴 앞으로 가져갔다. 깍지 낀 손으로 활시위를 잡아 턱을 스쳐 귀 뒤까지 팽팽히 당기고, 한 번 비틀었다 앞으로 놓은 서란은 한동안, 활시위를 당긴 손을 뒤로 한 채 서 있었다.

 

쐐애액! 하고 바람을 찢는 파열음과 함께 날아간 화살이 홍심원에 꽂혔다. 서란은 허리에 찬 전동에서 화살을 여러 개 꺼내 입에 물고 하나씩 시위에 걸었다. 전동에 든 화살이 줄어들 때마다 서란의 하얀 손등에는 푸른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사라졌다.

 

서란은 계속해서 화살을 쏘았다. 유엽전도 쏘고, 편전도 쏘고, 연무장의 모든 화살을 다 없애기라도 할 것처럼 서란은 미친 듯이 화살을 쏘아댔다.

 

“아가씨.”

 

헉헉, 하는 거친 숨소리와 함께 보현의 목소리가 곁에서 들려왔다. 서란은 화들짝 놀라며 시위에 겨누고 있던 화살을 뒤로 겨누었다.

 

“아가씨, 저예요. 저예요, 보현.”

 

서란은 활시위를 내렸다. 자신이 연무장에서 화살만 미친 듯이 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인지 보현의 얼굴은 온통 땀에 젖어 있었고, 턱 끝에까지 땀방울이 매달려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보현……?”

 

저택 밖으로 나갔다 오는 길이었는지, 보현은 한씨가의 시종들이 입는 자수 놓인 연청색 포가 아닌, 밖에 나갈 때 그가 즐겨 입는 붉은색 포를 입고 있었고, 손에는 함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보자기로 감싸 들고 있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왜 갑자기 활만 몇 시진 째 쏘고 계세요.”

 

‘몇 시진……?’

 

벌써 시간이 그리 흘렀던가. 서란은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활시위에 쓸리고 찢긴 손가락과 손바닥에 붉은 피가 굳어져 딱지 지고 있었다.

 

“아가씨, 손이…….”

 

보현이 소매 속에서 하얀 비단손수건을 꺼내 서란의 손을 감싸주었다. 서란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신수가 훤해진 보현을 바라보았다. 한씨가에서 받는 새경을 모아 산 것인지 백금으로 된 귀고리와 목걸이까지 하고 있는 그는 매우 아름다워 보였다.

 

“보현.”

 

서란은 보현의 이름을 불렀다. 보현이 서란의 기분을 살피며 대답해왔다.

 

“예, 아가씨.”

 

“보현이 보기에, 나에게 유흔은 어떤 존재일 것 같아?”

 

“예? 갑자기 무슨…….”

 

“백연 아카포가 그러더라. 나에게 유흔은 숙부가 아니냐고.”

 

서란은 백연과 있었던 일을 보현에게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생각하던 보현이 이윽고, 서란을 가만히 끌어안아주었다.

 

“제가 일곱 살 때, 고향에 큰 기근이 들었어요. 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죠. 형들이며 누나들은 배고프다 울고, 갓 난 동생은 젖이 없어 어머니 젖꼭지를 깨물어 피를 빨아먹었으니까요.”

 

“…….”

 

“그 해, 제 또래 아이들 중 상당수가 노예나 동기로 팔려갔어요. 집집마다 자식이나 아내를 내다 팔지 않는 곳이 없었죠. 그래야만 모두가 살 수 있었으니까요.”

 

백연은 품 속에서 끈에 꿰어 걸고 있던 구리가락지 한 쌍을 꺼내 보여주었다.

 

“제가 그렇게 팔려가던 날, 저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납채물로 받았던 이 가락지를 쥐어주었어요.”

 

“…….”

 

“그리고 저를 꼭 안아주며 ‘아프지 말고 건강해라’라고 말했죠.”

 

“…….”

 

“그때,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어차피 나를 팔자마자 뒤돌아서 돈부터 셀 건데 왜 이렇게 다정한 척을 하지?’”

 

“…….”

 

“하지만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아 동생과 아버지, 어머니가 굶어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저를 판 돈으로 여비를 마련해 형들과 누나들을 그나마 형편이 조금 나은 다른 지역의 친척집에 보내놓고, 두 분은 먹을 것도 없어 갓 난 동생과 함께 굶어 돌아가신 거예요.”

 

보현에게서 여태껏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그동안 보현은 단 한 번도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고, 서란 또한 보현에게 굳이 가족 이야기를 물어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슬프다 못해 처참한 가족사가 있었다니.

 

“혹시 형제들 소식을 들은 적은 있어?”

 

서란의 물음에 보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모님에 의해 기방의 동기로 팔려가던 그날에 이미 가족과의 인연은 끝이 난 것이고, 또 부모님도 돌아가셨는데 형제들의 소식까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보현의 대답에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보현의 허리를 휘어 감았다.

 

“그렇게 저의 부모님은 저를 기방의 동기로 팖으로써 저는 물론이고, 갓 난 동생을 제외한 형제들 모두의 목숨을 살린 거예요.”

 

“그렇구나…….”

 

“그래서 저에게 미안하고 고마우니까, 그 마음을 구리가락지와 ‘아프지 말고 건강해라’라는 말로 표현하셨을 거예요.”

 

백연은 자신의 허리에 감긴 서란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서란은 활과 전동을 내려놓고 백연을 조용히 끌어안았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알게 된다는 건 이런 거예요, 아가씨.”

 

“……?”

 

“제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부모님의 마음을 알게 됐듯, 아가씨도 그럴 거예요. 아가씨도 유흔 공자님에 대한 아가씨의 마음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알게 될 거예요.”

 

그러나 보현은 그 다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고작 시종에 불과한 자신조차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그 마음에 대해 알아가는 일은 오직 서란의 몫이기 때문이었다.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기사입력: 2019/01/03 [10:43]  최종편집: ⓒ 인터넷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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