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여전히 검붉고, 호방한 맘 거두지 않으리"

[연재소설] 홍매지숙명 피다, 제21장 혈염산하(血染山河)(21-1)

이슬비 | 기사입력 2018/07/25 [10:52]

"피는 여전히 검붉고, 호방한 맘 거두지 않으리"

[연재소설] 홍매지숙명 피다, 제21장 혈염산하(血染山河)(21-1)

이슬비 | 입력 : 2018/07/25 [10:52]

<지난 글에 이어>

무계(無 計)의 계().

 

김씨가와 신씨가가 동맹을 맺고, 각각 아무르강 유역의 가유 제1방어선과, 나고현에서 사린현으로 이어지는 신씨가 접경지역을 침범한 것은 누구나 예상 가능한 한 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서인과 신다희, 두 사람이 그런 눈에 빤히 보이는 수를 쓴 것은 어쩌면 도유향을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도유향. 그녀는 한 인간으로서는 더없이 훌륭한 사람일지 모르나, 한 지휘관으로서도, 한 군현의 태수로서도 그리 바람직한 인물은 아니었다.

 

난세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람.’

 

유흔과 한씨가는 물론이고, 천하의 사람들 모두가 그녀를 그리 평했다. 한씨가의 가신가문인 도씨가의 사람으로서도, 키야트 아이누의 전사로서도 어울리지 않는 그녀는 자신보다 약한 이들의 죽음 앞에 한없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고, 그런 그녀가 있기에 신다희는 안심하고 신백연에게 선봉을 맡겼으리라.

 

미치겠군.”

 

성문을 향해 개미떼처럼 몰려오는 신씨가 군사들을 바라보다 말고, 유흔은 유향의 가녀린 어깨를 바라보았다. 두꺼운 판금갑옷을 걸치고 있다고는 하나, 그녀의 어깨가 유독 가녀려 보이는 것은 그녀의 여린 성정 때문이리라 생각하며, 유흔은 적진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신씨가 가주의 기를 바라보았다.

 

사실, 유흔으로서도 이번 전쟁에 대해서는 뾰족한 계책을 낼 수 없었다. 자신이 이끄는 5천 군대면 충분히 아무르강 유역을 지켜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갑자기 신씨가 접경 지역이 위험해지고, 처한 상황만 놓고 보자면 훨씬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을 아무르강 유역의 사정을 뒤로 하면서까지 달려온 이곳에서는 유향이 가용인원들을 전투에서 제외시키고, 이를 알아챈 신백연은 전보다 몇 배는 더 흉포한 기세로 나고현성을 공략하고.

 

이러한 일련의 일들 속에서 유흔은 아무런 계책도 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 지금 나고현성은 함락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죽으시려오?”

 

유흔은 지나가는 말로 유향에게 한 마디 가볍게 툭 던졌다. 예상한 대로, 유향의 길게 처진 눈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유흔은 다시 가벼운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성이 함락되면, 성을 지키고 있던 태수나 성주, 그리고 그의 정실부인이나 부군은 자결을 택하는 것이 보통이지. 두 부부는 살아서 적들에게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며, 스스로 목을 베어 자결하고, 측실들은 남편이나 아내, 혹은 정실을 따라서 목을 매달거나 독을 마시는 것이 보통이라.”

 

…….”

 

본래, 제화족은 자살을 금지해왔다지. 싸울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살아남아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종족 전체에 이로운 일이니 말이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삼백족의 영향을 받아, 치욕을 당하느니 자결을 택하는 것이 낫다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

 

나는 본래, 제화족이 아니었으니 어느 것이 옳은 일인지는 잘 모르겠소. 하나…….”

 

적어도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목숨을, 그저 내 아내나 남편이라는 이유만으로 거두게 한다는 것은 그 어느 것으로 포장한다 해도 옳은 일이 될 수 없음은 알고 있소. 말을 마치며 유흔은 백연이 있을 적진 깊숙한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 멀리에 있어도 선명하게 보이는 물개 같은 백연의 검은 눈동자가 유흔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백연은 신씨가 30대 가주 신다희의 남동생으로, 노예 출신의 첩을 아버지로 둔 친누나가 이부형제자매들과 어머니, 그리고 큰아버지들을 모두 죽이고 가주의 자리에 오를 때 세력을 합친 공을 인정받아 정실남편이 되었다.

 

그러나 어찌나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한지, 그의 누나는 그를 대놓고 옹고집 중에 옹고집이라 칭하며 찾지 않았고, 천하의 사람들 모두가 그의 고집에 학을 뗄 지경이었다.

 

한데, 그토록 계책이니, 모략이니 하는 것들을 모르는 이에게 한씨가 같은 유력가문과의 접경지역을 맡겼다는 것은, 처음부터 이 모든 상황들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유흔은 부서져가는 성문을 망연히 내려다보았다. 애초에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부터가 오만이었으리라 생각하며 유흔은 자신이 이끌고 온 교위들에게 급히 철수명령을 내렸다.

 

소속 가라고루성 전원, 지금 즉시 아무르강 유역의 제1방어선으로 간다! 목적지는 청화현이다!”

 

존명!”

 

교위들이 철수를 의미하는 깃발을 들어 올리는 찰나였다. 저 멀리 태수부 관저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끝도 없이 뛰쳐나오기 시작한 것은. 유흔은 설마, 하고 그들의 수를 세어보았다. 그들의 수는 지금쯤 태수부 관저에 있어야 할 이들의 숫자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무슨 일입니까?”

 

심상치 않은 유흔의 기색에 유향이, 유흔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입에서는 경악에 찬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안돼! 막아라!”

 

태수!”

 

막아라! 어떻게 해서든 막으란 말이다! 이대로……, 이대로라면 저들은 모두 죽는다!”

 

도유향!”

 

유흔이 노호성을 지르며 유향의 뺨을 내리쳤다. 검집으로 내리친 탓에 투구를 쓰고도 충격을 받은 그녀가 얼굴을 휘청거렸다.

 

성이 함락되어도 저들은 죽는다!”

 

…….”

 

아니, 성이 함락되면 저들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죽는다!”

 

…….”

 

그러니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라. 어차피 죽을 목숨들로 더 많은 목숨들을 살리는 일, 한씨가의 36대 제4후계였던 나의 선택은 그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것은 바로 나, 한유흔이다.”

 

말을 마치며 유흔은 성문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는 저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들이 가려는 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무엇을 하려 하는지 유흔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수천의 혈서를 들고 흐느끼며

비통한 노래를 끝까지 부르는

타고난 전사는 부서지고 다할지언정 쉬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붉은 불꽃으로 돌아가

군대를 정비하고 다시 처음부터

내 강산과 나의 사람을 지키네

긴 창 휘둘러 이별의 슬픔과 바꾸고

남은 생을 다하여 기개를 지키리니

이 피는 여전히 검붉고

이 몸의 호방한 마음은 거두지 않으리라

 

유흔은 군가를 부르며 그들을 배웅했다. 죽음을 향해 가는 전사들의 마지막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노래는 없을 터였다.

<다음 글에 계속>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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