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르강 유씨가, 오늘로 그 이름을 망각한다"

[연재소설] 홍매지숙명 피다, 16장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16-2)

이슬비 | 기사입력 2018/03/03 [09:46]

"아무르강 유씨가, 오늘로 그 이름을 망각한다"

[연재소설] 홍매지숙명 피다, 16장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16-2)

이슬비 | 입력 : 2018/03/03 [09:46]

<지난 글에 이어서>

제16장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16-2)
   
유씨가는 한씨가의 방계가문으로, 한씨가의 시조인 훌란의 막내딸이며, 한씨가의 2대 가주 여릉의 막내누이동생인 청아가, 한씨가의 가신가문인 사씨가와의 정략혼인을 거부하고, 자신의 시종이었던 테무르를 남편으로 선택 하겠다 선언한 후, 가문에서 파문당한 뒤 세운 가문이었다.
 
당시, 테무르와의 아이를 회임 중이었던 청아는 후계 작위를 박탈당함과 동시에, 테무르와 함께 가문에서 맨몸으로 쫓겨났다. 두 사람은 그렇게 가라고루성을 떠나 가유 땅 곳곳을 떠돌아다녔고, 그러는 사이에 청아의 산달이 코앞에 닥쳐왔다.


테무르는 만삭이 된 청아를 데리고 아이를 낳기 적당한 곳을 찾다, 때마침 아무르강 유역을 지나게 되었다. 때는 이른 봄이었고, 얼음이 녹은 아무르강 근처에서는 어부들이 고기를 잡고, 강가에 웃자란 약초며 식용 풀을 채집하고 있었다.

 

현지인들은 산달을 코앞에 둔 청아 부부를 따스하게 맞이해 주었고, 그곳에서 첫째딸 자미를 낳은 청아는 테무르와 정식으로 혼례를 올림과 동시에, 자신의 성을 유씨라 칭하고, 새로운 가문을 세운 후, 이를 승인해줄 것을 한씨가에 요청하였다.
 
한씨가에서는 청아가 세운 가문을 유씨가라는 이름으로 승인한 후, 아무르강 유역을 유씨가의 영지로 인정하고, 독자적으로 군사를 키우고 조세를 거둘 수 있는 권한 또한 부여하였다. 이에 더해, 청아의 언니인 여릉이 테무르에게 한신영(韓 新 永)이라는 삼백족식 이름까지 내려줌으로써, 한씨가의 방계가문인 유씨가의 새로운 출발을 축복했다.
 
그러나 그랬던 유씨가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은 물론, 모두가 그 이름을 애써 망각해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다.
 
아무르강의 영주 유씨가, 오늘로 모두가 그 이름을 망각한다. 가주 유문원과 부인 탁문군, 후인영, 요차희, 독고문군, 차기 가주 유초옥과 부군 유여의, 그 외 유씨가의 종자들을 모두 참수형에 처한다. 시종과 노예, 사병들을 비롯한 사용인들 또한 모두 사형에 처한다. 이들은 한 구덩이에 모두 생매장한다.”
 
12년 전, 막부의 명령과 함께 멸문지화(滅 門 之 禍)를 당했다 하여도 유씨가는 한씨가의 방계가문이었고, 아무르강의 영주였다. 하여, 유씨가의 영지였던 아무르강은 도로 한씨가의 영지가 되었고, 아무르강 유역의 백성들은 여전히 유씨가를 자신들의 주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아무르강의 영주 유씨가, 오늘로 모두가 그 이름을 망각한다.”
 
12년 전, 막부의 명에 따라 세상은 유씨가의 이름을 망각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씨가의 이름이 망각되지 않은 것은, ‘제화족은 절대로 유씨가의 이름을 망각할 수 없었기때문이었다.
 
제화족과 삼백족, 부상국의 두 종족은 모두 죽은 조상들이 신이 되어 후손들을 지켜준다는 조상신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신앙의 정도는 삼백족보다 제화족이 한층 더 깊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화족이 수렵민이기 때문이었다.


농사를 지을 만큼 자연환경이 풍족한 곳에서 한가로이 농사를 지으면 되는 삼백족과는 달리, 제화족은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이곳저곳을 떠돌며 물고기와 짐승을 잡고, 식물의 잎과 열매, 뿌리, 꽃을 채집해야만했다.


그렇기에 제화족은 수시로 죽음의 위협을 느껴야 했고, 자연히 조상들에게 자신의 목숨을 지켜달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 제화족에게 있어, 조상신 신앙은 삶과 죽음의 문제이니, 조상이라는 존재는, 어쩌면 카무이신보다 더 절대적인 존재일지도 몰랐다.
 
막부는 이러한 제화족의 조상신 신앙을 간과했고, 유씨가 영지였던 아무르강의 백성들은 유씨가를 자신들의 조상신으로 여겼다.


그렇기에 한씨가는 아무르강 백성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아무르강을 한씨가의 영지인 가유의 한 강역으로 포함시켰고, 그 이후로 아무르강의 백성들은 한씨가 외에 그 어떤 가문도 자신들을 다스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예부터 내려오는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가문이 영주가문으로서의 자격을 오래 유지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해이안교 시대의 말기부터 시작된 백성들의 분규는 해이안교 시대의 막을 내리고, 양소막부의 문을 닫고, 목협막부의 힘을 약화시킬 정도였는데, 지금까지도 종종 일어나고 있어 늘, 영주들을 긴장케 하였다. 하여, 백성들의 분규가 무서워 영주들이 함부로 군사나 군수물자를 징발하지 못할 정도였다.
 
만약, 한씨가 외에 다른 가문이 아무르강 유역을 다스리려 든다면 백성들의 분규가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그래서 김씨가의 역대 가주들은 아무르강의 풍부한 어렵자원을 탐내면서도, 아무르강 유역에서 전면전을 일으킨 일은 없었다.


그런데 김서인이 감히 아무르강 유역에서 전면전을 일으키다니. 이 일은 김서인이라는 한 사람이 정신이 나갔다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었다.
 
어찌되었든, 현재 중요한 것은 이 전쟁을 이길 승산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번 전쟁의 승산을 묻는 가주의 물음에, 유흔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서란을 돌아보았다.
 
우리는 이번 전쟁에서…….”
 
유흔이 입을 열었다. 가주 정옥을 포함한 모두가 유흔의 입가로 시선을 가져갔다. 유흔은 슬그머니 뒤로 손을 뻗었다. 서란의 작은 손이 유흔의 거친 손을 잡아왔다.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그러한가? 동생은 어떤 근거로 그리 판단하는 것인가?”
 
유흔은 씁쓸하게 웃음을 지으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거칠고 메마른 입술에 붉은 피가, 살짝 맺혔다. 서란은 유흔의 손에 깍지를 걸어왔다. 유흔의 손이 깍지를 걸어오는 서란의 손가락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가두었다.
 
아니, 반드시 이겨야만 합니다.”


동생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나는 지금 어떤 근거로 동생이 이번 전쟁의 승산에 대한 판단을 내린 것인지, 그 근거를 물었네만.”


반드시 이겨야만하기 때문입니다."


동생?”
 
유흔의 말마따나, 이 전쟁은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전쟁이었다. 힌씨가를 위해서든, 서란을 위해서든 이 전쟁은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전쟁이었다.

 

<다음 글에 계속>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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