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자 자리는 결국, 그 자체가 검인 것이다"

[연재소설]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피다' 맹호은림(猛虎隱林)(4-2)

이슬비 | 기사입력 2017/03/20 [10:43]

"지배자 자리는 결국, 그 자체가 검인 것이다"

[연재소설]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피다' 맹호은림(猛虎隱林)(4-2)

이슬비 | 입력 : 2017/03/20 [10:43]

제4장 맹호은림(猛虎隱林)(4-2)

 

밤새 무서리가 하얗게 내린 신아절의 아침은 요 며칠보다 유독 추워져 있었다. 간밤에 내린 무서리로 인해 커다란 정원석과 연못, 그리고 나무와 꽃들로 장식된 한씨가 저택의 정원과, 화강암을 깔아둔 넓은 마당은 마치 설국(雪 國)을 보는 듯, 하얀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한씨가의 시종들과 노예들은 두꺼운 모피옷을 껴입고 종종걸음을 치며 부엌과 마당을 부지런히 오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 없이 오늘은 서란의 사촌동생들이며, 각각 한씨가의 1후계와 2후계인 자여와 윤희가 신아절을 치르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가자. 화야.”
 
유흔은 곤히 자고 있는 서란을 깨웠다. 서란이 으응, 하는 소리를 내며 졸린 눈을 뜨자 유흔은 서란을 안아들고 내욕탕(內 浴 湯)으로 향했다. 유흔은 따뜻한 물이 담긴 욕탕에 국화와 쑥을 달인 물을 붓고, 서란과 함께 물 속으로 들어갔다. 서란이 서툰 솜씨로 자신의 몸을 씻는 것을 바라보다 말고, 유흔은 에이구, 하는 소리와 함께 서란의 등을 씻겨주었다.
 
등은 혼자 못 씻겠지?‘


혼자 할 수 있다니까!”
 
유흔은 이구, 하는 소리와 함께 서란의 머리를 감겨주었다. 가슴까지 닿는 서란의 긴 머리를 팥비누로 감긴 유흔은 서란의 몸과 자신의 몸을 수건으로 닦고 말리화기름을 발랐다.


유흔은 옷가게에서 나들이옷을 찾아와 서란에게 입혀주었다. 자잘한 꽃무늬가 들어간 검은 바탕에, 옷깃과 소매, 등판에 은빛 카이문이 수놓아져 있는 나들이옷을 입은 서란은 어딘지 모르게 당당하면서도 슬퍼보였다.
 
그리고 이건 우리 화야 선물.”
 
유흔은 서란을 앞에 앉혀놓고 참빗으로 머리를 빗겨주었다. 찰랑거리는 검은머리가 가슴까지 내려와 쏟아져 유흔의 손등을 간질였다. 유흔은 서란의 머리를 말아 올려 비단끈으로 묶고, 은으로 만든 나비 떨잠을 꽂아주었다.
 
예쁘지?”
 
서란은 면경(面 鏡)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구리거울 속에는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슬프다고도, 담담하다고도 할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란과 유흔은 서란의 일곱 살 신아절을 신들께 고하기 위해 사당을 찾았다. 사당 안에는 이미 자여와 윤희가 자신들의 다섯 살, 세 살 신아절을 신들께 고하고 있었다.
 
동생도 왔는가?”
 
자여와 윤희의 뒤에는 한씨가의 가주이며, 서란의 이모 겸 어머니인 정옥이 가주의 예복을 차려입고, 자신이 자여와 윤희의 어머니가 될 자격이 있음을 신들께 고하고 있었다. 유흔은 정옥에게 고개를 숙여 목례를 하고, 서란을 자여와 윤희의 오른쪽 자리에 세웠다. 서란이 나이가 가장 위라고는 하나, 후계 서열은 가장 낮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신들께 마키리와 차, 그리고 술을 바치고, 제단 앞에 향불을 피우는 내내 서란은 한씨가의 시조신이며 1대 가주인 훌란, 한정의 상을 마치 노려보듯이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거울에 비친 서란 자신의 모습을 노려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사당을 나와 무녀가 있는 소도(蘇 塗)로 향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서란은 끝내 우주의 주신인 카무이 신과, 키야트 아이누의 조상신인 푸른 늑대 치노와 하얀 암사슴 보르테의 상 앞에서도 아까와 같은 눈빛을 하고 서 있었고, 무녀는 그런 서란의 어깨를 비쭈기나무 가지로 탁탁 내려치는 시늉을 하며 조금 더 공손한 자세를 취할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서란은 끝내 아까와 같은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신아절 제사가 끝나고, 유흔은 서란을 목마 태워 가라고루성 곳곳을 돌아다녔다. 유흔은 목덜미에 앉은 서란의 양 발목을 붙잡고 서란이 일곱 살이 됐노라 큰 소리로 자랑을 하며 돌아다녔고, 서란은 늘어뜨린 두 손으로 어느 죽마 파는 상인이 선물한 죽마를 들고 허공에 휘둘러댔다.
 
에그, 우리 화야는 좋겠다. 죽마도 선물 받고.”
 
그러나 이러한 두 사람의 행렬은 곧,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자여와 윤희, 그리고 정옥과, 정옥의 남편 추을의 행렬에 묻히고 말았다. 저잣거리에 모인 사람들은 네 사람의 행렬이 지나는 곳마다 일제히 길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올렸고, 상인들은 저마다 가게에서 가장 품질이 좋은 물건을 가지고 나와 자여와 윤희에게 선물하기에 바빴다.
 
우리는 저쪽으로 돌아가자, 화야.”
 
그러나 옷가게가 모여 있는 거리로 들어선 두 사람의 행렬은 곧, 가주 일행의 행렬에 따라잡히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누구도 서란에게는 선물을 건네려 하지 않았다.
 
이제 그만 가자, 화야.”
 
이때였다. 돌아서는 유흔의 등 뒤로, 서란의 옷을 맞춰준 비단가게 여주인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유흔이 다시 몸을 돌리자, 여주인이 서란에게 종이로 싼 꾸러미 하나를 건네고 고개를 숙였다.
 
……?”


엿입니다.”


……?”


신아절에는 앞으로 오래오래 살라는 의미로, 하얗고 붉은, 긴 엿을 먹지 않습니까.”
 
유흔은 서란에게서, 여주인이 건넨 꾸러미를 받아 풀어보았다. 꾸러미 안에는 하얗고 붉은 색의 긴 엿들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유흔은 여주인의 손을 덥석 붙잡고 흔들었다. 가주 일행의 행렬이 지나는 곳에서 서란에게 이런 선물을 건넨다는 것은 그 자체로 커다란 용기가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
 
고맙소. 내 오늘 일은 잊지 않으리다.”
 
유흔은 그 길로, 서란을 데리고 한씨가 저택으로 돌아가, 서란의 귀를 뚫어주었다. 불에 달군 바늘이 여린 귓불을 꿰뚫는 고통과, 귓불에서 떨어지는 붉은 피에 서란이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유흔은 서란의 입에 조금 전, 여주인이 선물한 엿을 물려주었다.
 

 
사실, 제화족에게 있어, 신아절은 또 다른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벼농사를 주업(主 業)으로 삼는 농경민인 삼백족과는 달리, 제화족은 천렵(天 嶺)과 채집을 주업으로 삼는 수렵민이었다. 풍족한 자연환경 속에 살며, 평소에는 그저 평화로이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면 되는 농경민과는 달리, 척박한 환경 속에 살며, 늘 사냥감을 찾아 헤매야만 하는 수렵민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기에 스스로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무슨 일이 닥쳤을 시에는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 단 한 명의 전투력이라도 살려서 종족 전체를 위험에서 지켜내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러니 수렵민은 종족 전체가 하나의 전사 집단이요, 종족의 구성원 하나하나가 훌륭한 전사여야만 했다.

무엇보다 제화족의 주신(主 神)이며 창세신(創 世 神)인 카무이 신은 자신의 두 눈을 뽑아 어둠 속으로 던짐으로써, 해와 달을 만들어 어둠을 밝힌 빛의 전사이지 않은가. 하여, 카무이 신의 자식들이거나 후손들인 다른 신들 또한 모두 전사일 수밖에 없었고, 푸른 늑대 치노와 하얀 암사슴 보르테의 후손이며, 신들의 후손인 키야트 아이누와 모든 제화족의 구성원들 또한 신들과 마찬가지로 전사가 되어야만 했다.
 
그러니 제화족에게 있어, 신아절은 종족의 한 구성원이 훌륭한 전사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재현하는 날이기도 하였다. 제화족은 그중에서도 일곱 살 신아절을 가장 중시하였는데, 이날, 제화족의 아이들은 태어나 처음으로 활이 아닌, 검이나 창 같은 무기를 잡아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흔은 서란의 일곱 살 신아절이 다섯 달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서란에게 검을 쥐어주지 않고 있었다. 유흔은 그저 서란이 소학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를 시험하며, 앞으로 서란이 배우게 될 검법서를 새로 정리할 뿐이었다.
 
이에 대해, 한씨가 방계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시종들과 노예들까지도 유흔이 제화족의 전통을 어기고 있다고 수군거리고 있었지만, 유흔은 이에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만의 생각을 끝까지 관철할 뿐이었다.
 
검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다른 사람을 베고, 그로 인해 종내는 자기 자신을 베게 되는 흉기가 아니던가. 지배자의 자리라는 것은 결국, 그 자체가 검인 것이나 마찬가지. 하여, 지배자는 법이라는 검으로 다른 사람들을 베어내면서, 종내는 자기 자신을 베어내게 된다. 그렇게 검을 쥔 자가 스스로가 쥔 검에 베여 쓰러져 피를 흘리며 죽어가듯이, 지배자의 자리에 있는 자 또한 자기 자신이 만든 법에 의해 짓밟혀 서서히 죽어가게 된다.’
 
유흔은 서란이 이와 같은 사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검을 가르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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