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잿빛하늘, 간혹 드물게 비치는 햇빛도 의식하지 못할 만큼 분주한 생활을 뒤로 하고 곧 한국으로 귀국하게 될 지인의 가족들과 함께 스키 장비들을 챙겼다. 아이들은 함성을 지르고, 어른들은 나이를 의식해서인지, 제대로 탈 수 있을까 조심스레 설레어 본다.
눈이 내린 겨울이지만 하얀 눈 아래로 초록빛을 잃지 않는 드넓은 초원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꼬불꼬불한 길을 달린 자동차가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해발2000m 높이의 알프스 스톡클리(Stockli) 설원에서 펼쳐지는 광대한 백설의 자연을 누비는 스키어들의 경쾌한 몸짓이 즐겁다.
눈 덮여 새하얀 ‘산의 바다’, 그 산의 계곡을 덮은 ‘구름의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저 설산에서, 그 운해의 위아래에서 스키를 탄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다. 운해 아래의 잿빛 삶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옷 위에 앉은 눈을 털어내듯 무거운 일상을 털어버리자 저 푸른 하늘 만큼 마음이 맑아지니, 백 번 이곳에 오기를 잘 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차가운 바람에도 아랑곳 없이 혈기서린 몸은 덥고 무거운 스키와 장화의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눈을 헤치고 허벅지까지 빠지는 깊은 눈 속을 헤치는 터프 함, 나무 사이를 헤치며 나아가는 스릴감, 아무도 손대지 않은 고운 설 면을 처음으로 지치는 설렘...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감춰진 채 전혀 때 묻지 않은 자연의 속살을 두루 감상하는 즐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