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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07.16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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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에서 본 인간사, 달력이 필요해요
[서울둘레길12-2] 중곡동~용마산~망우산 능선길
 
최방식 기자
<지난 글에 이어> 어릴 적, 아마 중학교 때였을 겁니다. 집 앞 멀리 올려다 보이는 높은 산을 그리워했습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 그 산 속 산막에 살았다고 했습니다. 늘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그리 못했죠. 한해 겨울방학 눈이 소복하게 쌓인 날이었습니다.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습니다. 길도 알 리 없죠. 늘 보던 산이니 그냥 출발한 것이었습니다. 4시간여 만에 정상에 올랐을 겁니다. 어두컴컴해서 집에 돌아왔는데 무릎까지 눈 속에 빠지는 험한 산길을 털신 신고 오르내렸으니 발이 성할 리가요.

훗날 안 사실이지만, 집 앞 구황산(九皇山)은 고창과 장성군에 걸쳐있는 호남정맥의 영산기맥 서쪽 끝자락에 우뚝 솟은 뫼입니다. 거기 명당을 잡아 묘를 쓰면 9대에 걸쳐 임금이 나온다는 속설을 간직해 그리 이름 붙은 곳이죠. 지관들 발길이 끝이니 않았다는 군요. 이 산에서 발원한 물은 남해와 서해로 갈라져 흘러간다네요. 북쪽 계곡물은 줄포만을 거쳐 서해로 흐르고, 남쪽 계곡물은 영산강을 거쳐 목포 앞 남해로 합류한다고요.

▲ 산에 오면 숨이 트이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산은 생명의 젖줄이 발원하는 곳이니까요. 뭍 생명의 시작인 것이죠. 산에 오면 생기가 돌고 포근해지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것이죠.     © 최방식


무모한 산행으로 핀잔은 말할 것도 없고 몇 주간 생고생을 했습니다. 동상을 치료하느라고요. 하지만, 얼마나 시원하고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긴 세월 맘속으로만 간직해오던 동경의 땅을 밟아봤으니까요. 산자락에 안기고 높은 정상에 올라 바라본 세상. 동상이 그까짓 게 문제겠습니까? 그리움을 좇아 삶의 시원(始原)을 확인했는데요.

눈속 털신신고 오른 구황산

산에 오면 숨이 트이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산은 생명의 젖줄이 발원하는 곳이니까요. 뭍 생명의 시작인 것이죠. 인생도 마찬가지죠. 산에 오면 생기가 돌고 포근해지는 건 그 때문인 모양입니다. 생명이 움트는 어머니의 자궁인 셈이니까요. 상처받고 고통스러울 때, 산으로 가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것이죠. 시원에 와야만 뒤틀리고 왜곡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 테니까요.

용마산 헬기장 어딘가에서 점심을 한 여행자들은 망우 능선을 향합니다. 누군가 거기가 어디라고 알려주지 않아도 눈치 챌 수 있는 곳. 처음엔 여느 산과 다르지 않았는데, 묘지가 하나 둘 보이는가 싶더니 4km 남짓 늘어선 것을 보았습니다. 망우산에 들어온 것입니다. 시원이니, 생을 마치면 거기 다시 눕는 게 당연하지요. 생명의 끝에서 새 생명의 시작을 예고하는 윤회의 땅에 온 것입니다.

▲ 산은 생명이 움트는 어머니의 자궁입니다. 상처받고 고통스러울 때, 산으로 가는 건 그 때문이죠. 시원에 와야 뒤틀리고 왜곡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 테니까요.     © 최방식


태조가 ‘음택’을 마련하고 궁으로 가는 길에 이 고개에서 내뱉었다는 ‘어사오망우의(於斯吾忘憂矣, 이제야 근심을 잊게 되었노라)’의 뜻을 조금은 알겠습니다. 음택은 바로 시원으로 돌아가는 길목이니 ‘그냥 아무데나’ 자리할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옛 세상의 주인이 왕이었으니, 지금 여행자들보다야 훨씬 사치스러웠을 건 분명할 테고요.

동구릉(東九陵)은 검암산 자락 50여만평 땅에 태조·문종·선조·현종·영조·헌종 등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를 모신 왕릉군. 망우리공원은 50여만평의 땅에 3만여 기의 묘지가 들어선 일반인 묘지군. 망자의 한평반 칠성판이야 다를 리 없겠지만, 누운 땅 넓이는 비교할 수조차 없으니, 참... 하여튼, 도성 동쪽 그러니까 검암산, 망우산 일대를 음택의 최적지로 꼽은 건 맞는 모양입니다.


▲ 망우산에 들어왔습니다. 생명이 시작되는 시원에 찾아온 것이지요. 거기는 생을 마치고 누운 망자들의 땅이기도 합니다. 생명의 끝에서 새 생명의     ©최방식

죽음은 준비된 미래죠. 죽음 뒤엔 씨앗으로 그리고 유전자로 다시 부활하지만. 그러니 인간은 수만년의 나이를 사는 생명사슬이지요. 한 생명이 다하면 또 다른 생명이 뒤를 이으니까요. 한 생명도, 세포가 한쪽에선 끊임없이 죽어가고 또 다른 쪽으론 생겨나 생명을 영위하듯이. 그러니 망우산은 망자의 땅이자 새 생명이 움트는 땅인 것입니다. 거기서 태어나고 다시 거기 눕기를 거듭하는.

망자의 땅에 움트는 새 생명

망자들의 땅, 시원의 능선을 걷는데, 이 산 아래쪽이 고향이라는 김향숙씨 걸음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은 묘지가 어떻고 눈꽃이 어떻고 수다를 떠는데, 그는 사뭇 진지합니다. 혼자만 저만큼 떨어져 묵묵하게 길을 가는데 때론 씩씩하게 걷나 싶더니 어느새 쪼그리고 앉아 미끄럼을 탑니다. 20여분 하산 내내 그랬습니다.

길을 제대로 아는 이 없어 물어물어 산을 내려오는데, 향숙씨 한마디 합니다. 산 아래가 면목동인데 그 이름이 어떻게 생긴 줄 아느냐고 묻습니다. 모른다고 했더니, 전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네요. 옛날 한 임금이 망우고개 쪽에 백성이 살기 좋은 땅을 마련해 살도록 해주라고 하자, 산하가 이 땅을 샅샅이 살피고 가 임금께 보고했다죠. “살기 좋은 땅을 찾지 못해 면목 없습니다.”

고향길이 꽤나 그리웠나 봅니다. 어릴 적 첫눈 오던 날 발 시린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눈 쌓인 구황산을 해매고 다녔던 꼬마둥이처럼. 사실 그 땅을 특별히 그리워할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토록 그리워하는 걸 보면, 인간은 태어난 곳을 그리워하고 그 곳으로 돌아가려는 회귀본능의 정서를 가졌기 때문인가 봅니다.

망우산 묘지는 9천여기로 줄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산 길 내내 여행자들은 어디가 어딘지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눈 덮여 그런 것이려니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니 시원으로 가는 망자들의 길이어서 그런 것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거기 분명 방위가 있고 묘지마다 식별번호가 있지만 여행자들은 구별할 수 없었으니까요.

▲ 인간이 그토록 고향과 산을 그리워하는 걸 보면 분명합니다.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이죠. 그리워하는 그 곳으로 돌아가려는 회귀본능의 정서를 가졌기 때문이고요.     © 최방식


길을 못 찾고 그냥 샛길 하나를 선택해 무작정 내려오니 면목동 어디인 모양입니다. 한참을 걸어 식당 하나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행운이. 맛좋은 집이 딱 걸린 거죠.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행운이랄까. 쥔장 솜씨 좋은 증거 또 하나. 벽걸이 선풍기를 천으로 싸놨는데, 유성펜으로 그림을 멋지게 그려놨더군요. 모두가 감탄할 정도의 그림 실력이었습니다.

면목동에서 “면목 없습니다”

고향 그리움이 아직도 배어나는 향숙씨. 시부모를 모시고 맏며느리로 아이들을 키우며 사는 분인데, 긍정적인 태도가 늘 배나는 이입니다. “힘들지 않냐”고 물으니 “힘들 게 뭐 있겠냐”며 웃습니다. 시부모와 함께 사는 게 아무런 문제될 게 없다면서요. 칭찬이 터져 나옵니다. “복 받으려고 그래요.”


▲ 등산화가 미끄러울까봐 부츠 신고 왔다는 분. 결혼한 지 수년. 설거지 한 번, 방청소 한 번, 아이 빨래 한 번 해본 적이 없다는 분. 그의 숲 속     ©최방식

요즘 딸 둘을 다 키워놓고 새로운 일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회적기업을 배우느라 열심이라고 하네요. 일자리를 창출하거나 서민복지를 챙기는 등 공익적 역할을 하는 법인을 만들어 사회적으로 기여하기 위해 창업을 공부하고 있다고요. 맘씨 곱고 솜씨 좋으니, 할 일 참 많을 듯 싶습니다.

수다삼매경에 푹 빠졌나 싶은데, 그의 전화가 울립니다. 집에서 걸려온 모양인데, 오늘 밤 가족 몇이 모이기로 했다며 얼른 들어가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네요. 먼저 일어나 미안하다며 서둘러 배낭을 메는 그에게, 저녁때가 다 됐는데 언제 저녁음식을 준비하려느냐고 묻자 “면 삶고, 고기 다듬어 끓이고... 그럼 뚝딱 금세 만들어요.”

이번엔 송선민씨가 주인공입니다. 등산화가 미끄러울까봐 부츠 신고 왔다는 분. 남의 인생을 들추거나 엿보는 것이니 누구 삶인들 재미없으리까만, 이 분 삶도 흥미롭습니다. 결혼한 지 수년. 아이가 뛰어다닐 정도로 컸는데, 지금까지 설거지 한 번, 방청소 한 번, 아이 빨래 한 번 해본 적이 없다네요. 세상에, 어느 채널에 ‘화성인...’ 방송프로그램이 있던데 꼭 거기 나가야 할 분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물으니, 시어머니도 그렇고 남편도 손 하나 까닥 못하게 해서 그렇다네요. 가산이 넉넉해 일하는 분을 고용해 그리하느냐고 물으니, 그 것도 아니래요. 가족 다른 분들, 심지어 남편까지도 일을 하면서 아내에겐 일을 못하게 한다고. 세상에 이런 호사가 어디 있으리까. 모두들 부러운 눈치입니다.

‘클림트 다이어리’ 오간데 없고

하지만 본인 생각은 좀 다르네요. 처음엔 마냥 좋았는데, 아무 일도 하지 않으니(못하게 해 안함) 삶이 너무 무료하다는 것입니다. 우울증을 앓을 정도라고. 그래서 선택한 게 독서. 하루 종일 책을 읽는다지요. 둘레길여행에 나오는 게 요즘 자신의 일과 중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우리가 큰 기여를 하는 셈인가요? 놀라운 세상입니다.

술이 좀 취했습니다. 시계를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문득 달력이 눈에 들어옵니다. 불과 1주일도 남지 않은 임진년.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가장 확실한 이정표 역할을 한 게 달력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듭니다. 그 달력을 보며 임진년 세밑이 유별난 이유가 하나 떠올랐습니다. 연말이면 그 흔하던 달력이 올 들어 한 권도 손에 들어오지 않아서요.

▲ 면목동 어딘가에서 찾아들어간 식당. 행운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맛좋은 집이 딱 걸린 거죠. 쥔장 솜씨 좋은 증거 또 하나. 벽걸이 선풍기를 천으로 싸놨는데, 유성펜으로 그림을 멋지게 그려놨더군요.     © 최방식


옛말에 ‘하선동력’이라고 했다죠. 여름 최고 선물은 부채이고, 겨울엔 책력이라고요. 책력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국가와 기업을 관리하는 이, 그리고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는 이 모두에게 한해를 설계하고 삶을 영위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였습니다. 과거에는 달력을 볼 줄 아는 이에게만 중요했지만 요즘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죠. 흔하다 보니 그 소중함을 느끼지 못했을 뿐.

계사년 다시 떠오르는 해를 보며 새 희망을 준비해야 할 때, 그 소중한 이정표가 눈에 띄지를 않으니 이런 낭패가 또 어디 있으리까? 비키니 옷의 이발소 달력도, 엄친아·품절녀를 담은 아이돌 스타 달력도, 리히텐슈타인이나 클림트의 황홀한 작품을 복사한 달력도 눈에 띄지 않으니. 경기가 안 좋아서 그런 것일 테지만, 어디 실물경기 탓뿐이리까? 진정 깜깜한 미래를 바라는 게 아니라면 탁상 다이어리는 못 구하더라도 마음 속 지혜의 달력은 걸어야 할 때입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기사입력: 2013/01/06 [11:58]  최종편집: ⓒ 인터넷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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