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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04.23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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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고랑길’ 눈꽃세상, 그 ‘설레이는 평화’
[서울둘레길여행⑪-2] 아차산~용마산~긴고랑
 
최방식 기자
<지난호에 이어서> 여행자들이 선 곳은 한양도성의 정동(正東). 해가 떠오르는 곳입니다. 희망이 솟아오르는 동녘이죠. 요충지인 이곳을 지키던 고대 파수꾼들은 새벽이면 그 뜨거움을 맨 먼저 한 아름 안고서 새 날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했을 겁니다. 광대한 산야와 길고 긴 젖줄을 하얗게 뒤덮은 눈꽃세상에서 여행자들은 그리움에 빠져들었습니다. 자유를 향한 길고 긴 갈망의 발걸음, 그 여정 한 가운데서.

거기 어딘가였을 겁니다. 여행자의 노래 소리가 하얀세상에 울려 퍼진 데가. 둘레길 여행을 하며 심심찮게 시를 암송·낭송하곤 했는데, 시인의 낭랑한 목소리는 처음입니다. 이번엔 문단에 적을 둔 시인 강보열 선생입니다. 이런 날을 예견이라도 한 듯 고은 시인의 ‘눈길’을 아차산 정상 푯말에 적어 세워뒀습니다.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어 들리나니/ 대지(大地)의 고백(告白).../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寂寞)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 눈 덮인 겨울산은 정겹습니다. 눈꽃 핀 소나무와 바위, 발아래 사각거림, 그리고 살랑살랑 불어대는 바람이 여행자를 불러 세웁니다. 서두르지 말고, 돌아보라면서...     © 이규호


밝음이 시작되는 곳. 그 땅을 하얗게 덮은 눈꽃세상. 거기 올라 지긋이 눈감은 여행자들. 추운 겨울도 어두운 암흑도 그들을 가릴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장벽도 그들의 귀를 막을 수 없지요. 마침내 그 앞에서 얻은 적막과 어둠. 그 끝에서 만나는 빛과 기쁨. 파랑새가 날아가고 남은 자리, 거기 희망이 피어올랐습니다.

자유 향한 긴 갈망의 발걸음

많은 이들이 북적입니다. 아차산 정상입니다. 중곡동으로 이어진 길고긴 고랑길이 아스라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멀리 눈앞에 우뚝 솟은 용마(龍馬). 아리수를 따라 동으로 밝음으로 쭉 뻗어가는 망우(忘憂)능선. 중곡동에서 동으로 고개 넘으면 나타나는 아치울. 서울 동쪽 사방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긴고랑고개를 지나 다시 한 봉우리 끝에 서니 세 갈래 길. 용마산과 아차산 그리고 망우산으로 갈라지는 자리에서 일행은 점심을 했습니다. 서울의 팔방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 눈꽃나라로 하얗게 뒤덮인 설원 한가운데 우뚝 솟은 곳에 식탁을 차리고 둘러앉은 여행자들. 앉아보지 않은 이들은 모를 겁니다. 그 벅찬 감정을.

동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조선왕조 5백년의 음덕을 만들어 낸 지맥. 동구릉에 음택을 마련하고 도성으로 돌아가던 길에 태조가 내뱉었다는 한마디. “어사오망우의.”(於斯吾忘憂矣, 이제야 근심을 잊게 되었노라) 그렇게 생겨난 ‘망우’ 고개와 마을, 그리고 산 이름. 음택(묘 자리)의 중요성을 잘 모르는 나 같은 여행자들이야 그 근심을 이해할리 만무하지만요.

▲ 아차산 능선의 풍광. 탁 트인 물길, 너머 웅장하게 이어진 산맥. 그 하얀 소묘는 천상의 그림입니다.     © 이규호


서울이 한눈에 들어오는 용마산 능선입니다. 중곡에서 면목동, 그리고 망우동으로 이어지는 아찔한 능선 한 가운데 솟은 용마. 장군감이 태어나면 반역을 꿰할 수 있어 멸문지화를 당했다는 백제시대. 장군의 탄생을 기다리던 용마(龍馬). 장군감이 태어나자 가족의 안위를 위해 아이를 죽인 야속한 부친, 이에 실망해 날아가 버렸다는 용마의 전설이 서린 곳.

하산은 긴고랑길을 택했습니다. 등산로가 불분명해선지, 아님 험해서 그런지 여행자가 많지 않아 발자국 몇 개가 찍힌 길을 따라 내려왔습니다. 몇 번 망설이고 물어 긴고랑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찾았습니다. 계곡 매서운 바람에 비탈길이 꽁꽁 얼어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지요.

용마, 그 아래 아스라한 고랑

30여분을 내려와 마을버스 주차장에 당도, 다급하게 화장실을 찾아드니 깨끗한데다 난방까지 돼 있습니다. 화장실에서 이런 호사라니. 하기야 선조들은 변소(便所)나 해우소(解憂所)라 했으니, 딱 그런 곳인 셈입니다. 걱정거리도 해결하고 안락함도 느끼니 이런 좋은 쉼터가 또 어디 있을까 싶기도 하고요.

▲ 분명 여행자들을 기다린 것입니다. 고은 시인의 ‘눈길’을 적어놓은 푯말.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설레이는 평화로...”     © 이규호


칼바람을 맞으며 내려와서 그런지 중곡동 골목을 지날 때는 제법 여유롭습니다. 벽과 계단에 그려놓은 그림들이 눈길을 끕니다. 자치단체에서는 ‘긴고랑 아트 투어길’이라 부른다네요. 낡은 마을 허름한 집들 사이로 쭉 늘어선 그림들. 크고 높고 새로운 것만 좋은 줄 알던 주민들이 깨달은 바가 있었을까요? 자신의 삶과 그 전래의 마을을 사랑하는...

뒤풀이는 종곡동 골목을 헤매다 시작됐습니다. 아차산역 주변 뒷골목 국밥집을 찾는다는 게 그만 길을 잘못 들어 발품을 좀 팔아야 했으니까요. 이건 또 ‘가는 날이 장날’입니다. 20여분을 헤매 찾았는데, 몇 안 되는 자리가 꽉 차 손님을 받을 수 없다네요. 할 수 있나요. 이웃 식당으로 갈밖에.

등산화를 벗느라 낑낑거리다 자리를 잡고 앉는데, 어떤 분이 풍수이야기를 꺼냅니다. 한 지상파 채널이 내보내는 드라마 ‘대풍수’(태조 이성계가 고려말 조선을 세우기까지를 그린 연속극)를 보고 그러는지, 미신이 깃들어 있다고 한마디 던집니다. 저도 여행 중 가끔 풍수이야기를 했거든요.

반론도 있었지요. 장풍득수(藏風得水), 바람을 가두고 물을 얻는 곳의 양택. 그러니까 바람으로부터 가택을 보호하고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니, 그 곳은 지맥이 흘러내려와 흩어지지 않는 자리. 거기가 인간이 거주할 최적의 조건이라는 것인데, 이토록 과학적인 게 또 어디 있겠냐는 지적이었죠.

▲ 아차산 정상에 선 여행자들. 고구려 행진곡이라도 막 울려 퍼질 듯한 흔적뿐인 성채 앞. 하얀 눈꽃 세상입니다.     © 이규호


여행자들, 장풍득수를 논하다

허허벌판에 세운 마을이나 집의 바람을 막으려고 고려 때 조성한 비보림(裨補林). 북쪽의 음기를 막으려고 경복궁의 북문인 숙정문을 폐쇄한 조선왕조. 좌청룡 낙산이 낮아 기를 보강하려고 문 이름을 한자 늘려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하고 허술한 수비를 보강하려고 문루 주변에 세운 옹벽. 내사산(內四山)과 외사산(外四山)을 살펴 창건한 한양도성. 모두 선조들의 뛰어난 지혜이니까요.

하지만 음택(묘자리) 이야기로 넘어가며 논란이 사그라들고 말았습니다. 박박 우길 만큼 ‘저세상’을 알지 못하거니와, 종교적 주제는 화자들의 이성적 판단과 논리를 벗어난 것이었으니까요. 죽은 자의 시체가 잘 썩도록 묘를 쓰는 것도 따지고 보면 생태적 근거가 없잖다고 할 수 있으나 ‘음덕’까지 이어지면 말문이 막힐 밖에요.

뒤풀이는 오랜만에 함께한 강보열 시인의 이야기로 채워졌습니다. 입 무거운 강 시인이 스스로 꺼내 놓을 리 만무. 평소 말이 없다가도 산속에만 가면 옛이야기를 곧잘 들려주는 장석희 선생 작품이었습니다. 듣는 이들이야 궁금한 게 많아 “진짜?”, “그래?”를 연발했고요.

▲ 날아가 버리고 지금은 살지 않는다는 용마(龍馬)의 전설을 간직한 산. 발아래, 저 멀리 동두천에서 발원한 중랑천이 아리수로 흘러듭니다.     © 이규호


장 선생은 강 시인과 노동운동 시절 만났다고 했습니다. ‘구로동맹파업’ 때 같이 활동했다네요. 노동운동사에 빛나는 정치 동맹파업. 대어어패럴 노조 간부 3명을 구속시킨 전두환 정권의 탄압에 맞서 7개 노조가 동맹파업을 일주일간 벌이다 강제 해산된 사건. 50여명이 구속되고 2천여명의 노동자가 해고당한 그 투쟁의 주인공이라네요. 관심이 클 밖에요.

강 시인 가족이야기. 장 선생이 폭로(?)해 놓은 데다, 술까지 한 잔 한 강 시인이 “뭐, 어떠냐”며 털어놓고 말았죠. 술자리 흥밋거리로 삼기에는 너무 아프고 애잔한데. 귀 쫑긋 세운 여행자들, 이것저것 궁금하다며 묻고 또 물었으니. 술자리 만용이 가족의 생채기를 덧나게 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말뿐인 진보’, 쥐구멍을 찾아...

강 시인과 같이 노동운동을 했다는 그의 아내. 사이비시비에 휩싸인 한 기독교 종파에 참여하면서 종교적 삶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모양입니다. 가족이나 사회생활에 관심을 두지 않으니 모든 것을 강 시인이 감당해야 했고요. 삶이 고단했을 텐데 그는 태연했습니다. 아내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종교가 원망스러울 뿐.

짠한 가족사랑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사소한 말다툼에 가사일 하나로 엇나가고 싸우기 일쑤인데. 그렇게 원수지간이 되는 이도 있고... 가족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네요. 강 시인의 삶과 그의 태도가 경이롭기도 하고.
 
▲ 앞서간 여행자가 많지 않아 발자국 몇 개 흔적을 따라 내려온 ‘긴고랑길’. 계곡 매서운 바람에 비탈길이 꽁꽁 얼어 여간 조심스럽지 않습니다.     © 이규호


그는 교육관도 남달랐습니다. 아들이 고교생인데 목공일을 하도록 돕겠다고 합니다. 대학엔 안 보낼 거냐고 묻자, “대학 졸업시켜 뭐 하냐”는 반문이었습니다. 학벌이 문제고 연고주의를 깨야한다면서 왜 대학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고 할 때, 말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입만 진보’, ‘무늬만 진보’. 진보라면서 연고주의를 깨자면서, 제 자식에게는 1등을 주문하고 명문대 입학과 해외유학을 강권하는 말뿐인 진보. 실천하는 진보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합니다. 기자도 고3 아들이 있어 대학진학을 앞두고 있는데, 쥐구멍을 찾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기사입력: 2012/12/22 [01:42]  최종편집: ⓒ 인터넷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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