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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04.20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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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울긋불긋 자태, 잊지 말라는 당부”
[북한산둘레길⑤] 마실길(9구간) 내시묘역길(10구간) 효자길(11구간)
 
최방식 기자
가을산이 마지막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습니다. 그토록 멋진 자태를 드러내는 건 다시 만날 날까지 자신을 꼭 간직하고 있으라는 간곡한 부탁이죠. 생명이 약동하는 날 다시 돌아오겠다는 맹서의 표시로 노랗게 빨갛게 제 몸을 단장한 것입니다. 이별이 서러운 만큼 재회의 기쁨은 더 클 테지요.

가을여행이 부산 한 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숲 속 생명들의 장엄한 산 중 난장. 지켜보는 여행자들의 잊지 않겠다는 약속. 긴긴 겨우내 사무쳐 잊히지 않도록 울긋불긋한 그리움을 듬뿍 담아둬야 합니다. 뜨거움으로, 반가움으로 다시 만날 그날까지.

‘마실길’(9구간)은 바람 씽씽 부는 지난 10일 아직 개발이 끝나지 않은 은평뉴타운 어느 버스정류장에서 시작했습니다. 세종의 아들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 묘역과 제각 충경사(忠景祠, 화의군 시호를 딴 사당)가 있어 ‘제각말’이라 불리는 동네. 북한산이 한눈에 들어오던 절경은 간데없고 회색빛 고층아파트들로 꽉 들어찼습니다.
 
▲ 진관사 경내로 들어섰음을 알리는 해탈문. 잡념을 버려야만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곳. 일주문 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세상이 펼쳐집니다.     © 이규호

▲ 생명이 약동하는 날 다시 돌아오겠다는 맹서의 표시로 노랗게 빨갛게 제 몸을 단장한 나뭇잎. 제발 잊지 말라며 벌이는 고혹스런 난장.     © 최방식


이름 빼곤 제각이 있던 마을임을 알기 어려운 곳. 버스정류장 이름도 제각말이 아닙니다. 푸르지오000동. 여행자의 발길이 꼬일 수밖에요. 연신내역 시장골목을 돌아 나오는 길부터 헛갈리더니 모이는 곳도 찾기가 쉽지 않네요.

제각말 절경 뒤덮은 아파트촌

한 여행자는 지나쳤다가 되돌아오는 중이랍니다. 어떤 분은 좀 늦겠다고 하고. 약속시간을 30여분 늦춰 아홉이 모였습니다. 하늘을 가린 건물 사이로 까칠한 갈바람이 씽씽 불어대는 낯선 버스정류장. 더는 머물고 싶지 않은 그 곳 샛길에서 긴 기다림 끝에 북한산둘레길 다섯 번째 여정을 시작합니다.

마을 여기저기를 돌고 도는 마실길. 처음 가보지만 낯설지 않은 ‘기시감’이 느껴지는 그 길을 30여분 걸었나 봅니다. 개발이 덜 되서 그런지, 아직 건물이 들어서지 않은 부지엔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은 풀만 무성하게 가을 아쉬움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진관사를 찾는 이들이 많아선지 그냥 따라가다 갈림길을 놓칠 뻔한 곳. 낯선 여행자들이 얼굴을 익히느라 망설임도 잠시. 진관사(津寬寺)로 접어듭니다. 그냥 지나칠 수야 없는 곳이죠. 삼막사(남쪽), 승가사(북쪽), 불암사(서쪽)와 함께 한양 4대 비보사찰을 두고서.

고려 5대 임금이었던 경종의 왕후 천추태후. 자신의 아들을 7대왕 목종으로 앉힌 것도 모자라 사생아(목종과 씨 다른 아들, 김치양과 사통해 낳은)를 왕위에 앉히려고 유일한 왕위계승권자인 대량원군(훗날 8대 현종)을 감금하고 죽이려했던 절. 3년여 토굴에 숨어 목숨을 부지했던 그는 자신을 숨겨줬던 진관대사를 기념해 이 절을 중건했다고 합니다.

사찰의 들머리부터 풍광이 남다릅니다. 명산대찰의 기운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고나 할까요. 경내로 들어섰음을 알리는 해탈문. 잡념을 버려야만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곳. 일주문 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세상이 그제야 펼쳐집니다.

향로봉과 비봉, 그리고 한북정맥으로 여겨지는 육중한 바위산을 머리 위 병풍처럼 세워놓고 깊은 골자기 한 가운데 자리한 사찰. 대웅전으로 연결되는 홍제문(弘濟門)을 들어서자 또 한 번 놀랍니다. 깊은 계곡을 따라 사납게 불어오던 바람이 온데간데없습니다. 고요한 니르바나, 적멸(寂滅). 번뇌의 세상을 벗어난 것입니다.
 
▲ 가을 산에선 여행자들이 더 부산스럽습니다. 긴긴 겨우내 잊지 않고 울긋불긋한 그리움을 듬뿍 담아두겠다며.     © 최방식

▲ 헤어지면 만나지요. 어둠을 뚫고 찬란한 햇볕이 내리쬐듯. 흘러내리는 개울물이 여기 다시 흘러들면, 여행자도 목 축이러 다시 들르겠지요.     © 최방식


태조 이성계가 나라의 안녕과 국민의 평안을 기원하려고 시작한 수륙대재의 넓은 도량입니다. 뭍과 물을 헤매는 유주무주의 외로운 혼령을 위로하는 수륙재. 졸지에 불귀의 객이 된 수많은 고혼들을 구제하는 종교인의 아량이 따뜻하게 전해져 옵니다.

천추태후 칼부림 피한 진관사

경내를 돌아보고 절을 막 나서는데 전화벨이 울립니다. 그럼 그렇지. 곧잘 지각하는 여행자 한 분입니다. 진관사입구에 도착했다며 조금만 기다려달랍니다. 살림하랴, 돈 벌랴 바쁘고 힘들어 그런 것일 테니, 애처롭기만 한데...

집착이나 욕심을 좀 더 내려놓자고 시작한 둘레길 느림보 여행. 일상을 잊고 마음을 비워보자고 시작한 여행. 여정에 들어설 때엔 세상만사를 포기하고 그저 고요하게 걷고 사색하며 유구한 자연의 평화 속으로 빠져들어 보자는 것인데...

이분 다른 여행자들로부터 핀잔을 듣고야 맙니다. 지각을 타박했으니 변명을 안들을 순 없죠. 정중한 사과에 이어지는 말. “그래도, 늦었어도 꼭 오고 싶은데 어떡합니까? 눈총 받을까 걱정돼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요? 그래서 늦게라도 오는 건데...”

늦지 않게 나와 부산떨지 않고 사색의 길을 가는 이도 있고, 좀 늦어 이웃 여행자에게 심려를 끼치기도 하지만 여정을 포기할 수 없어 뒤늦게 합류하는 이도 있는 둘레길. 어찌 모두가 같으리까. 타박, 가당치 않습니다. 늦는 이도 있고, 그럼 또 함께 가는 것이고...

이날 정말 사고(?)가 거듭됩니다. 늦은 참석으로 핀잔을 들은 이가 여행생협 공동대표 중 한 명인데, 이번엔 상임대표가 뒤늦게 합류한 것입니다. 돈벌이에 바빠 토요일 여행에 참여 못해 벼르고 벼르다 일감을 부인에게 떠맡겨놓고 왔다네요. 반가운 새 얼굴입니다.

숲 속 화려함에 취해 얼마나 걸었을까. 허기졌는지 여행자 한 명이 좀 쉬어가잡니다. 이토록 화려한 가을에는 돗자리도 필요 없습니다. 푹신하고 향기 가득한 나뭇잎들이 늘 앉을자리를 준비해놓고 있으니까요. 맛난 음식만 꺼내놓으면 됩니다.
 
▲ 삼각산의 뒤태가 곱습니다. 백운대·인수봉·만경대 낙엽이 황홀하니, 여행자는 그제야 가을 깊은 줄을 압니다.     © 최방식

▲ 화려한 가을에는 돗자리도 필요 없습니다. 푹신하고 향기 가득한 나뭇잎들이 늘 앉을자리를 준비해놓고 있으니까요. 맛난 음식과 소소한 수다만 꺼내놓으면 가을만찬이 시작됩니다.     © 이규호



강릉사투리가 구수한 둘레길 여행 신참(?) 여행자 한분. 집은 부천에 있는데, 일터가 삼척 어디여서 오가며 산다는 분. 점심으로 바리바리 싸온 주먹밥에 떡·고구마를 묵묵히 먹던 그가 어릴 적 시골 이야기를 꺼냅니다.

고향은 정선. 고교 졸업 뒤 가출을 했다네요. 가난이 싫고 화려한 도시에 가 돈 좀 벌어보겠다고요. 7개월여 만에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도둑고양이처럼 귀가했다는 군요. 그 때가 바로 낙엽이 수북이 쌓이는 가을 이맘 때였고. ‘집 나가면 개고생’을 절감하면서...

‘집나가면 개고생’ 가출 깨달음

“하얀 달빛 아래, 낙엽 쌓인 숲. 집 근처를 흐르는 정선의 동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개 위... 은은한 달빛에 비추인 강물의 출렁임, 낙엽의 향과 사각거림, 그리고 무엇보다 반갑고 좋은 고향의 냄새. 아, 이제 살았구나 싶었습니다.”

‘내시묘역길’(10구간) 끝나가는 어딘가였을 겁니다. 단풍나무로 꽉 차 숨 막히는 색조의 아름다움이 가득한 숲. 느티, 단풍, 생강, 산벚 등이 얽히고설켜 오색찬란한 곳. 구중궁궐에서 몸 바쳐 왕을 섬기다 사라져간 내시들의 혼령 아닐까 싶었습니다.

참나무 갈색 낙엽들이 유독 눈에 띄는 곳. 느티나무나 단풍나무 잎에 비해 화려하지 않아 여행자의 관심을 끌진 못하지만 ‘내시묘역길’에 오니 좀 달라 보입니다. 후세가 없거나 있어도(양자) 드러내기를 꺼리는 내시가(內侍家)의 처지와 닮았다고나 할까요.

숲 대부분을 차지한 참나무이니, 쌓인 낙엽의 거의 전부가 그 나뭇잎이라 할 테지만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는 곳. 내시가 되려고 생식기 제거(수술)과정에서 80%가 죽어간다는 이들. 죽어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내시 망자들의 처지와 너무 닮았습니다.
 
▲ 숲 속 개울가 갈대들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한 점 바람, 은색의 흔들림에도 여행자는 화들짝 놀랍니다. 흩뿌림이 아쉬워서.     © 최방식
▲ 울긋불긋 색조화장에 숨 막히는 아름다움이 꽉 찬 숲. 느티, 단풍, 생강, 산벚나무 얽히고설켜 오색찬란한 곳, 가을 숲.     © 최방식


느닷없는 외침, “주님씨.” 이게 뭔 소리랍니까. 주님이면 주님이고, 주씨면 주씨인 것이지 주님씨라니. 해석, 바로 이어집니다. 이름이 ‘준임’인데 듣기에 ‘주님’으로 들렸을 뿐이라나. 여행자 중에 ‘주님’이 있었다니. 아, 이런 성스러운 여행도 있나...

이분 준임씨, 구로 어딘가에 살지만 고향이 해남이랍니다. 지금도 어머니는 서울과 해남을 오가며 살고 있다며 고향자랑이 보통 아닙니다. 땅 끝 마을, 황토고구마, 거기 어딘가에서 머릿속 깊이 선연하게 새겨놓은 추억을 떠올렸겠지요. 이별을 앞두고 아쉬워하는 나뭇잎을 보면서.

참나무숲 내시묘역 쓸쓸함에...

11구간 효자골. 죽은 아버지를 기려 새벽마다 성묘했다는 박태성. 정성을 어여삐 여긴 인왕산 호랑이의 도움. 그가 죽자 호랑이마저 죽어 곁에 묻혔다는 전설의 마을을 지나 여정의 마지막인 사기막골로 향합니다. 도자기 굽던 동네인데, 백운대와 인수봉 등 삼각산 주봉의 화려한 뒤태가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더 유명해진 곳.

북한산둘레길 다섯번째 문화역사여행은 거기서 그쳤습니다. 여행단 총무로 박혜숙씨를 선출했습니다.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가을나뭇잎들의 화려한 자태도 여행자 마음 한 구석에 꼭 담아 간직해뒀습니다. 새 봄 앙증맞게 새순으로 되살아올 때 꼭 다시 반가워하리라 다짐하면서요.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기사입력: 2012/11/24 [01:23]  최종편집: ⓒ 인터넷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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