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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7.11.2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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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혁명·판초비야, '라쿠카라차'
유요비의 음악여행 농민들의 해악과 풍자 가득한 전래민요
 
유요비 기자
 한 남자가 한 여인을 사랑하네
그러나 그 여인 그 남자를 쳐다도 안 보네
그것은 마치 대머리가 길가에서 주운
쓸 데 없는 빗 같은 것이라네

 (후렴)
라 쿠카라차 라 쿠카라차
걸어 여행하고 싶지 않네
가진 게 없기 때문이라네
오 정말 가진 게 없다네
피울 마리화나도 없다네

 처녀들은 모두 순수한 금이라네
유부녀들은 모두 은이라네
과부들은 모두 구리라네
그리고 할머니들은 모두 주석이라네

 큰길가 건너 이웃집 여인
도나 클라라라고 불리는 여인이라네
만일 그녀가 쫓겨나지 않았다면
내일도 아마 그렇게 불릴 것이라네

 라스 베가스에 사는 처녀들은 모두
키도 크도 몸매도 호리호리하다네
그러나 그 처녀들의 애처로운 변명은
연옥의 영혼들보다 더 괴롭다네

 도시에 사는 처녀들 모두
제대로 키스할 줄도 모른다네
앨버커키에서 온 여인에게 키스하려면
목을 잡아당겨야 한다네

 멕시코의 모든 처녀들은
향기로운 꽃보다 더 아름답다네
아주 달콤한 말로 속삭이며
당신의 마음을 사랑으로 가득 채운다네

 누군가 나를 미소짓게 하는 사람
그는 바로 셔츠를 벗은 판초 비야라네
이미 카렌사의 군대가 도망가 버렸네
판초 비야의 군대가 오고 있기 때문이라네

 사람들에게는 자동차가 필요하다네
여행을 가고 싶다면
사바타를 만나고 싶다면
사바타가 나타나는 집회에 가고 싶다면
<라 쿠카라차>가사 (유요비 번안)

 
▲ 멕시코농민혁명군을 이끌었던 판초 비야. 
<라 쿠카라차>는 1910년부터 1920년까지 진행되었던 멕시코 혁명 당시 농민혁명군이 부르던 노래다. 원래는 15세기말 무어인들을 축출할 즈음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스페인 민요이지만, 스페인의 라틴 아메리카 침략과 함께 멕시코에 전래되었고, 수 세기를 지나는 동안 여러 버전이 생겨났다. 현재 우리가 부르고 있는 <라 쿠카라차>는 멕시코혁명 당시 농민들에 의해 만들어진 노래가 원곡이며, 내용은 농민들의 일상생활에서부터 연애, 정치에 이르기까지를 뛰어난 해학과 풍자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남녀관계와, 압제자 카란사(Venustiano Carranza)와 이에 대항하는 농민혁명군의 판초 비야(Francisco Villa) 와 사바타(Emiliano Zapata)의 관계에 대한 해학과 풍자는 압권이라고 할 수 있고, 바로 이 때문에 일반 농민들에게뿐 아니라, 농민혁명군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다.

제목 <라 쿠카라차>는 스페인어로 바퀴벌레라는 뜻인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다른 해석들이 존재한다. 바퀴벌레와 같은 비참한 생활을 하는 멕시코의 농민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는 해석이 있고, 멕시코의 전통 의상인 판초우를 걸치고 전통 모자인 솜브레로를 쓰고 무리를 지어가는 농민혁명군의 모습이 마치 떼를 지어가는 바퀴벌레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해석과, 또 농민과 농민혁명군의 끈질긴 생명력을 잡아죽여도 끊임없이 나타나는 바퀴벌레에 비유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농민혁명군의 사령관인 판초 비야가 타고 타니는 자동차가 바퀴벌레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게 아직까지는 정설이다.

멕시코는 마야문명과 아스테크문명의 발상지로, 1521년 코르테스에게 정복당한 후 1821년 독립할 때까지 300년 동안을 스페인과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독립과 함께 공화정이 성립하였으나, 연방파와 중앙집권파의 내분이 수십 년간 계속되었고, 그 여파로 미국과의 전쟁에 져서 1848년 영토의 일부(현재 미국의 뉴멕시코, 아리조나,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텍사스 등)를 미국에게 빼앗겼다. 또 1861년부터 1867년까지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가의 괴뢰 황제인 막시밀리언 황제의 혹독한 통치를 받았고, 이어 등장한 디아스(Porfirio Diaz) 정권이 대지주들과 외국자본에 유리한 정책을 추진하자 1910년 혁명이 일어났다. 1917년 멕시코 혁명의 승리로 토지개혁과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하는 신헌법이 제정되면서 민주적 통치체제가 완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멕시코혁명은 대지주와 외국 자본의 이해에 충실하여 노동자와 농민을 수탈하던 대통령 디아스의 독재체제를 무너뜨리고 반(半)식민지적 사회구조의 변혁을 목표로 발생하였다.

1910년 디아스의 유임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자 마데로(Francisco Madero)가 북쪽의 농민군 지도자 판초 비야와, 남쪽의 농민군 지도자 사파타 등과 연합하여 이듬해 5월 디아스를 축출한다. 그러나 혁명군은 토지개혁에 소극적인 마데로파와 토지개혁에 적극적인 사바타파로 분열되었고, 이 틈을 타 1913년 2월 우에르타(Victoriano Huerta)가 군사 쿠데타에 성공하여 반(反)혁명 정권을 수립하지만, 이듬해 7월 카란사와 오브레곤(Alamos Obregon), 판초 비야 등이 동맹한 입헌파(立憲派) 혁명군과 사파타의 농민혁명군에게 축출된다. 그러나 혁명파는 다시 지주와 민족자본가를 대표한 카란사․오브레곤파와 빈농을 대표한 비야․사파타파로 다시 분열하여 내전에 돌입한다.

비야와 사바타의 농민혁명군은 한때 멕시코의 전 지역을 점령하였으나, 노동자 계급의 지원을 받은 카란사․오브레곤파가 1915년 셀라야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혁명의 주도권은 카란사와 오브레곤에게 넘어가고 1917년 제헌의회에서 신헙법이 제정되면서 멕시코혁명은 막을 내린다. 제헌의회 당시 오브레곤은 급진파를 대표하여 제헌의회에서 지주들을 대변한 카란사와 맞서 신헌법에 노동자의 제권리(123조)와 토지개혁(27조) 등이 채택되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물 ·토지 ·지하자원은 본래 국가에 속한다”(27조)는 조항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적 소유권을 제한할 수 있다”(27조)는 조항을 규정하여 농토와 자본의 국유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신헌법은 농민혁명군의 몰락과 미국과 유럽의 압력 등으로 1930년대에 가서나 제 기능을 할 수 있었다.

<라 쿠카라차>의 주인공 판초 비야는 1878년 6월 5일 산후안 델리오 아시엔다 빈농 가정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도로테오 아랑고 아람불라(Doroteo Arango Arambula)이고, 프란치스코 비야(Francisco Villa), 또는 판초 비야라고도 한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어려서부터 농장노동자로 일하다가, 1894년 누이동생을 강간한 농장주인을 살해하고 멕시코 북부 산속으로 들어가 의적이 되었다. 1910년 15명의 동지와 함께 혁명군에 참여해 치와와의 후방을 교란하는 게릴라전을 벌였고, 1913년 우에르타의 군사쿠데타 때 감옥에서 탈출하여 잠시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나, 마데로와 치와와 주지사의 살해 소식을 듣고 8명의 동지와 함께 귀국하였다. 이후 게릴라전으로 백전백승하여 농민들의 영웅이 되었고, 6개월 만에 1만 명의 병사를 거느린 북부지역 농민혁명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1915년 세라야 전투에서 패배한 뒤 카란사를 도운 미국을 응징하기 위해 1916년 3월 9일 미국의 콜럼버스를 공격했고, 이로 인해 퍼싱(John Joseph Pershing) 장군이 이끄는 1만 2000명의 미국 기병대로부터 장장 10개월 동안 추격을 받기도 했다. 미국은 지금까지도 퍼싱 장군을 높이 평가해서 미사일에 그 이름을 붙여 나토에 베치하고 있다. 퍼싱1, 퍼싱2 미사일이 바로 그것이다.

판초 비야는 1920년까지 농민혁명군을 이끌었으나, 1920년 카란사가 암살되고 오브레곤이 대통령이 된 뒤, 혁명군으로서의 삶에서 은퇴하였다. 그러나 1923년 7월 20일 피랄에서 암살당하였다.

▲ 판초 비야와 함께 멕시코 혁명군을 이끌었던 사파타.
멕시코혁명의 또다른 영웅 사파타는 1879년 8월 8일 멕시코 남부의 모랄로스의 한 소농에서 10형제 중 아홉째로 태어났다. 1911년 모랄로스의 빈농들과 함께 농민혁명군을 조직하고, 멕시코혁명에 참가하였다. 마데로와 토지개혁 문제로 대립, 1913년 11월 빈농과 공동체농민에 대한 토지 재분배를 규정한 ‘아얄라 계획’을 발표하고, 그 뒤 마데로, 우에르타(1854∼1916), 카란사, 로 이어지는 중앙정부에 대하여 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1914년 북부지역의 판초 비야와 연합, 카란사와 오브레곤에 대항하여 한때 수도인 멕시코시티를점령하기도 하였으나, 이듬해 1915년 카란사파(派)의 반격으로 밀려나 고향인 모랄로스 지역을 근거로 게릴라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19년 4월 10일 치나메카 농장에서 암살당함으로서 혁명군으로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사파타가 주장했던 사파티즘, 이른바 ‘공동체 자치주의’는 현재 멕시코 무장 혁명군인 '사파티스타(Zapatista, 사파타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 부사령관 마르코스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인물)'로 이어져 오고 있다.


기사입력: 2007/04/26 [13:51]  최종편집: ⓒ 인터넷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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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요비님은 노래를 사랑하는 풀벌레입니다. 열린사회시민연합 공동대표 등 오랜 세월 시민사회운동을 해왔습니다. 지금은 인터넷저널 대표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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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생이사위 마악전과가 있는데, 집유로
아무리 생각혀도 준표가 방빼야겠다,
씨발럼이라고 썼다가 고소당함 주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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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 ㅠ.ㅠ 요즘 회원가입을 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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