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하나로 버텨온 삶, 철부지 처녀 사라지고 그의 재즈만 남았네”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20) 나혜영 재즈 보컬리스트“재즈 맛이 즉흥성에서 나오는데, 제 인생을 돌아보니 딱 그 거예요. 정형화한, 강요받는 삶이 싫어 내 멋대로 살았거든요. 보스턴·뉴욕·서울에서 25년 넘게 재즈를 하며 한결같이요. 양평에 와 좀 달라졌네요. 누군가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게 소중하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재즈 정신을 후학에 가르치는 것도 그렇고요. 국악을 접목한 재즈도 해보고 싶어요.”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 스무 번째 주인공 나혜영(55·여, 무대 이름 ‘나나’) 재즈 보컬리스트의 말이다. 봄비가 축축이 내리는 5일 양평 덕평리 집에서 만난 그는 ‘재즈 인생’을 이렇게 회고했다. 4집 앨범(바람이 불어온다) 노트에도 ‘열정 하나로 버텨온 삶’이라 기록하고 있다. ‘철부지 처녀’는 사라지고 앨범 속 ‘음악’만 남았다고 푸념하면서.
어려서부터 남다른 흥과 노래 재능을 가지고 있던 나나. 팝 가수를 하겠다고 바쁠 때다. 한 밴드 마스터가 재즈가 어떠냐고 권해 몇 달 연습해 무대에 섰다. 공연을 마치자마자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연습 때와 다른 밴드연주에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
“그저 노래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죠. 재즈가 즉흥성을 기본으로 한다는 걸 몰랐으니까요. 밴드도 가수도 알아서 맞춰야 하는데, 그걸 알 리 없는 전 연주를 따라잡지 못했죠. 재즈 본고장에 가서 제대로 배워야겠다고 맘먹고 짐을 쌌어요.”
버클리음대에 가겠다고 1997년 편도 항공권 한 장 들고 보스턴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다. 가업이 기울어 돈도 없었다. 운 좋게 몇 개월 만에 입학했다. 한국의 통기타 그룹 쉐그린(노래 ‘동물농장’) 구성원 전언수씨가 뉴욕에서 운영하는 라이브카페에서 노래 알바로 학비를 벌며 프로페셔널뮤직(보컬) 4년 공부를 마쳤다.
“재즈 보컬리스트로 데뷔한 곳도 뉴욕의 쉐그린이에요. 알바 시절 만석을 기록하곤 했는데, 인기가 좋다고 여겼는지 다시 와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꽤 이름있는 밴드와 트리오를 결성해 시작했죠. 산마르코 등 현지의 유명 재즈 클럽에도 여러 군데 출연했어요.”
2016년 한국에 들어오기 전까지 클럽 제이지(J’z)와 맥심 정기공연(매월), 클럽 트리오와 레스토랑 ‘뉴욕뉴욕’ 정기공연(매주), 뉴저지 맥제이홀과 호주 시드니 등에서의 단독 콘서트, 뉴욕미스코리아대회 및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초청 콘서트, 버클리 리사이틀홀 콘서트 등 수많은 무대를 거쳤다. 1집(하얀나비 목로주점 등 70년대 음악을 재즈로 편곡한)부터 3집까지 음반도 냈다.
뉴욕 한인사회를 넘어 뉴욕커들의 호평을 산 그의 재즈. 어떤 멋과 맛이 있을까 궁금했는데, 그는 명확한 메시지 전달을 첫 번째로 꼽았다. 슬로 스윙(밀고당기기)이 강한 뉴욕 정통 재즈에 가사 전달을 명확하게 해 청중들이 쉽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트롱프뢰유’라는 미술장르가 있다. 그림과 실제를 혼동케 하는 착시효과를 활용한다. 파이프 밑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닙니다’ 써놓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1929년 ‘이미지의 배반’)이 그거다. 표현의 본질에 도전했달까. 문자를 시각요소로 활용해 이미지 해석에 영향을 끼친, 소통하는 예술. 그림으로 말을 건 능동의 미술. 메시지를 건네고 몸을 들썩이게 하는 나나의 음악. 소통의 재즈라 할까.
그는 뉴욕에 거주할 때도 한국을 오가며 무대에 서고 강연을 다니곤 했는데, 귀국하고부터 한양여대(실용음악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서울종합예술학교·경민대·명지전문대·백석대 등에서 전임·외래 교수(강사)를 지내기도 했다. 4집 앨범(바람이 불어온다)도 2016년 냈다. 하지만 국내 음악활동은 그리 매끄럽지 않았다.
“잘 안 섞인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나이 들어 그런지, 오지랖이 덜 넓어선지 힘들었어요. 강남에 거주했는데, 돈으로 얼룩진 두 얼굴의 도시였어요. 약속해 놓고 안 지키고, 후원하겠다는 이가 빈털터리고, 사기에 보이스피싱까지, 정말 힘들었어요.”
결국 양평으로 왔다. 그사이 많은 단독 콘서트(1년 1회 이상)와 초청공연, 각종 축제 초대가수 출연 등을 해오고 있다. 양평에선 ‘국화축제’(국수리)나 청개구리마켓 등 공연을 하며 지역 축제음악을 바꿔놓고 있다. 민요와 트롯 반열에 재즈를 올려놓은 것. 카페 우드스탁 재즈 공연도 그의 작품.
“양평에 들어온 건 20대 때 친구 부모(두 분 다 작가)가 문호리에 사셔서 몇 번 와본 게 계기였어요. 곧 정배리로 이사했는데 그 집 곁에 집(지상권)을 얻게 됐어요. 찻길도 없고 전기도 안 들어오는 숲속이지만 미국 가기 전 몇 달간 농사짓고 친구 불러 잔치하며 즐겼어요. 타향살이 힘들 때 거기 돌아갈 생각을 하며 버텼죠.”
귀국 뒤 정배리 지상권은 포기하고 국수리(양서면)에 집을 얻었다. 누군가 권장해 3개월 된 리트리버(이름 환타)를 키우게 됐는데, 강아지를 키우는 이웃인데도 늘 시비를 걸어왔다. ‘행복한 기억’ 더듬어 왔는데 ‘지옥’ 같은 삶이었다. 결국 창대리(양평읍) 농가(논 한 가운데 있는)를 얻어 5년을 살다, 덕평리(양평읍) 현 집으로 작년 이주했다.
“반려견 때문에 욕 많이 먹었어요. 목줄 채워 24시간 땡볕과 추위에 방치된 애들이 애처로워 사료도 주고 우리 애 운동시킬 때 같이 데려가곤 했는데, 그분들은 날 이상한 여자로 봐요. 1년간 봉사했는데 고맙다는 말 대신 그만두라는 타박뿐이었어요.”
그는 반려견을 기르고 보호하며 많은 걸 배웠다. 자신만 보고 살아온 ‘미미(me me) 인생’을 탈출한 것이다. 돌보고 배려하는 엄마 맘은 양평과 반려견이 준 선물이란다. 8살 ‘환타’, 1살 ‘해리’, 5살 ‘세리’와 살고 있다. 다른 둘은 임시 보호 중이다.
“환타가 맏이인데 3개월 때 데려왔어요. 그 어린 것이 패드에 오줌을 싸고 밖에 나가 똥을 싸더라고요. 얼마나 기특하던지 영어로 ‘환타스틱’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앞 글자만 따서 이름을 ‘환타’라 지었어요.”
서울태생인 그는 어릴 적부터 노래 잘하는 아이였다. 당연히 가수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가산이 기울며 길을 잃었다. 문호리에 집을 가진 친구 어머니가 도와줬다. 가수 하남석이 참여한 어느 모임에서 그에게 노래시켰고, 하씨가 강남의 한 무대(당시 팝음악)에 오르게 힘써줬다. 그 뒤 연극(극단을 만들고)판 기웃거림을 그만뒀다.
“어릴 적 홍제동 어느 절벽 아래 살았는데, 위쪽에 무당집이 있었어요. 장구 소리가 나면 밥 먹다 말고 제가 ‘어허~ 밥맛 조오타~’ 추임새를 넣곤 했어요. 그럼 엄마가 ‘너 참 신기하게 노래 잘한다’고 했죠. 중학 때는 선생님이 ‘혜영이 노래 한 곡 듣고 수업 시작하자’고 말하곤 했고요.”
그는 영화 ‘그대안의 블루’(안성기 강수연 주연)에 대사 있는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아는 독립영화 감독이 조연출을 했는데, 추천했던 것. 대본도 의상도 없이 불려갔는데, 강수연 메이크업팀의 도움으로 마칠 수 있었다. ‘연기 외도’가 재즈에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미래 구상으로 국악을 접목한 재즈를 꼽았다. 국악계 출신의 한 원로를 멘토로 두고 있다며 곡 흐름이나 악기 등 한국 냄새가 진한 재즈를 해보려 한단다. 올해 안 수필집을 한 권 낼 계획도 가지고 있다.
“재즈가 제 즉흥적 성격에 딱 들어맞잖아요. 국악 원로를 처음 만나러 갔는데 장미꽃 한 송이와 사인첩을 준비해 놓았더라고요. 더 놀란 건, ‘같이 갈 사람이면 화초에 물 주듯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 내 인생 멘토다 싶었죠.”
북미에 재즈, 남미엔 탱고가 있다. 재즈가 흑인 슬럼가에서 탄생했다면, 탱고는 이주민 빈민가에서 시작했다. 아르헨티나에서 가난을 피해 아버지 손을 잡고 뉴욕으로 이주했던 4살의 아스토르 피아졸라. 재즈에 클래식을 접목한 조지 거슈윈 같은 이들의 노력으로 재즈가 대중예술 장르로 인정받는 걸 지켜본 그는 탱고(누에보 탱고)를 대중예술 장르로 발전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재즈에 국악 옷을 입히겠다는 나나. 가야금 가락에 취한 그의 재즈는 어떤 향기를 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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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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