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 하나 20년 공들인 소설 '광개토태왕 담덕', 노마드정신 담아"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8) 엄광용 소설가 인터뷰“우리가 강대국 사이에 있잖아요. 고대부터 왕국을 5백년 넘게 유지하는 비결을 궁금해 하죠. 홍익인간 정신이라고 생각해요. 이웃을 적으로 만들지 않는 통치철학이요. 광활한 영토로 7백여년을 지킨 고구려의 노마드정신이 밑바탕이죠. 21세기엔, 정복이 아닌 경제영토 확장이죠. 그걸 담고 싶었어요.”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 여덟 번째 주인공 엄광용 소설가(68·남)의 말이다. 20여년 준비해 온 역사소설 ‘광개토태왕 담덕’(이하 담덕) 4권(고구려 천하관, 지난 20일 발행)을 출판한 뒤 털어놓은 기획 취지다. 27일 오후 여주에 있는 그의 집필실에서 만났다.
담덕을 소재로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는데, 작가의 삶 전체였다. 그는 마흔에 가정조선 등 12년여 잡지사 기자 생활을 그만뒀다. 답보상태인 직장에 회의를 느꼈고, 미뤄뒀던 소설, 특히 역사소설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등단(벽 속의 새) 등 5년여 준비를 거쳐 직장생활을 접고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다룬 ‘사냥꾼들’을 출판한 게 그 시작이었다.
석박사 공부에 현지답사, 땀으로 쓴 역사소설
‘전우치는 살아있다’, ‘천년의 비밀’, 사라진 금오신화‘ 등 중장편 소설, ‘이중섭과 세발자전거를 타는 아이’ 등 장편동화, ‘안중근, 일본의 심장을 쏘다’ 등 청소년 위인전기, ‘징비록에서 역사의 길을 찾다’ 등 역사철학서 등을 저술했다. 생계 탓에 ‘현대건설’, ‘삼성전자’ 등 30여권 사사(社史)도 편찬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한 출판사에서 만난 이들이 고구려연구회 활동을 권하더라고요. 답사여행에 참여했죠. 일본 작가들도 자기 나라 ‘대망’을 언급하며 광개토대왕 소설이 왜 없냐고 말해요. 사료가 없어 고민하다 일단 공부를 시작해보기로 했죠. 대학원 역사학과(단국대)를 들어갔어요.”
‘비문’(광개토대왕비) 뿐인 정사 기록과 몇 줄 안 되는 삼국유사(중국 시각에서 저술) 사료에서 10권(현재 4권까지 출시, 8권까지 저술 마침)에 가까운 대 서사를 만드는 데는 20여년이 걸렸다. 저작에 몰입하려고 4년 전엔 고향(산북면) 여주에 집필실을 구해 들어왔다. 늘 술자리에 불러대는 문학인들을 피해보려는 속셈도 없잖았다.
소설 담덕의 작가 메시지는 ‘홍익인간’이라고 했다. 이웃 족속을 정복하고도 그들을 억압하거나 차별하지 않는 통치철학을 가진 평화의 대왕 이야기는 그렇게 탄생했다. 동북아 열강에 둘러싸인 한국. 미래지향의 외교란 무엇인지 역사소설을 통해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소설 속, 중국황제가 고구려 사신 더러 ‘작은 나라가 어떻게 왕권을 잘 유지하느냐’고 묻고, 사신(석정)이 ‘홍익인간 정신이 몸에 배어 이웃 나라를 적이 아닌 우군으로 만들어’라 답하죠. 중국 왕조들은 2백년을 넘기지 못하는데, 고구려부터 조선까지 왕조마다 5백년을 넘기잖아요. 이웃(나라)을 괴롭히지 않는 ‘덕’을 가져서 그렇다고 봐요.”
또 하나 ‘땅’이 아닌 ‘경제’ 영토를 확장하라는 21세기형 화두를 던진다. 담덕의 노마드 정신을 배우자는 것.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강가에 즐비한 한국의 대기업 광고판을 예로 들었다. 땅을 뺏는 게 아니라 기업이 진출해 상품을 파는 게 경제영토를 넓히는 21세기 광개토대왕정신이라는 것이다.
정복 아닌 홍익인간 정신 흐르는 태왕의 땅
소설 담덕의 풍부한 이야기는 20여년 공부와 자료수집, 그리고 소설적 상상력이 밑바탕이라고 했다. 실크로드(유라시아 문화교역로) 공부가 큰 도움이 됐다. 문화가 앞서고, 거래(장사)가 이어지며, 외교가 뒤 따르는 담덕의 스토리는 그렇게 나왔다.
“우즈벡에 가보니 주몽이나 대장금을 우리보다 더 잘 알아요. 이유가 궁금했는데, 자기들 삶과 유사해서 그렇다고 해요. 신화부터 춤(봉산탈출 사자춤)이나 악기 등이 서역에서 초원로 등을 통해 고구려와 한반도로 전해졌으니 문화적 동질성을 가진 건 당연하죠.”
담덕 역사적 기록이 거의 없는 것에 대해, 작가는 신라와 당나라 연합으로 고구려가 무너진 것, 중국이 고구려를 자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노력(최근의 동북공정 같이, 고구려 역사를 남기지 않는 등), 그리고 일제강점기 일본이 역사기록을 탈취하고 왜곡한 탓이라고 했다.
작가가 된 계기는 고교 2학년 때 국어교사의 칭찬이었다. 시가 무엇인지 수업 때 역설했는데 귀가 쫑긋했다고. 자신의 습작 시를 고쳐줘 ‘빛이 번쩍’ 한 경험을 잊지 못하고 있다. 하숙집(여주인 교사)에 책이 많아 늘 끼고 산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아버지 사업이 망해 대학은 포기한 상태였다.
중앙대 문창과에 입학했다. 습작 시를 섰다가 창피만 당한 적도 있다. 방학숙제 소설로 영등포공장(주변 사창가) 이야기를 써 교수로부터 ‘조금 더 노력하면 괜찮겠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졸업 앞두고 쓴 소설에 교수가 ‘빨갱이’를 언급하며 불순하다고 해 작가를 포기하려 했다.
그런데 대학 강사 한분이 추천해 ‘여학생’(잡지)에 취업했다. 졸업도 전에 잡지 기자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소설을 안 써도 되는 상황을 맞은 것. 그렇게 여원, 가정조선 등에서 12년여 근무했다. 하지만 승진 가망이 없어 사표를 던졌다. 피하려했던 작가, 그 고난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문학인으로 사는 게 힘들어요. 남자들은 1~2%만 인세로 먹고 산다고 하죠. 여자는 남편 돈벌이가 뒷받침 돼야 살아남아요. 잘나가는 작가들이 보통 2년에 한번 베스트셀러를 내는데, 10만부를 팔아도 인세 1억이 좀 넘는 수준이에요. 유명작가라도 기껏 5~6천 과장 연봉 수준인 거죠.”
포기한 작가 '고난의 길', 클리셰 만드는 중
후배 작가들에겐 할 말이 없다면서도, 선배들 말마따나 ‘원고지 허리까지 쌓도록 써보라’고 했다. 자기가 최고라고 여기는 이는 자격미달이고, 자기가 최하라고 여기면 그제야 자신을 제대로 보는 작가의 길에 들어선 것이라며 분발을 강조했다.
여주에는 4년 전에 내려왔다. 글쓰기에 전념하려는 생각에서다. 당뇨 등 건강 걱정도 있었고, 어쩌다 남한 강 주변에 와봤는데 풍광이 좋아 그리 결정했다고. ‘수구초심’도 작동했을 터. 남편의 여주 생활에 별 반응이 없던 아내도 올 들어 여주로 이사(그의 집필실 아닌)왔다.
클리셰라는 말이 있다. 조판해 인쇄하던 시절, ‘견(犬)통령’(한자 유사해 大통령을 잘못 조판) 사고가 이어지자 이를 예방하려고 ‘대통령’(3활자)을 하나로 묶어 놓는 걸 말한다. 흐름을 만들어 친근감을 준다는 변형된 뜻을 가지고 있다. 비문밖에 없는 사료로 10권의 대서사를 엮은 소설과 그 작가. ‘클리셰’(요즘 말로 대세)를 만들어가는 중 아닐까. <저작권자 ⓒ 인터넷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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