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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7.11.22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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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찾는 건 어쩜 편가르기 일지도
[동남아여행19-말레이시아] 마루디 환경단체 SAM 마지막여정
 
윤경효
비가 올 듯 말 듯 하늘은 잔뜩 찌푸렸는데, 정작 비는 내리지 않고, 물먹은 두꺼운 이불솜을 덮고 있는 것처럼 공기는 후덥지근,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구름이라도 걷히면 좋으련만. 갓 샤워하고 나와 고작 5분을 걸었을 뿐인데, 어느새 셔츠가 등짝에 달라붙는다. 호텔 에어컨 바람 때문에 마루디에 도착하자마자 감기에 걸려 몸조리 하느라 아침마다 식당에서 쌀죽을 먹고 있는데,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서 뜨거운 죽을 먹다 보니, 아침부터 땀으로 샤워다. 쯥…-,.-;;

밥을 먹고 식당 맞은편 사무실로 가는데 외국인과 한 무리의 현지인들이 사무실 건물 1층에서 장비를 들고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였다. 뿌양(Puhyang)에게 물으니, ‘일본정유(Nippon Oil)’회사의 현장 직원들이라고. 재밌게도 말레이시아의 최대 환경단체인 SAM의 마루디 사무소와 일본정유 현장사무소가 ‘사이좋게(?)’ 2층짜리 건물을 위아래를 나눠 쓰고 있었다.

마루디에서 유전개발을 하려는 일본정유사에 지난달 SAM이 환경영향평가 결과공개와 지역주민의견 수렴 여부 등에 대한 질의서한을 보냈는데, 한 달 뒤 답변서는 안 오고 자기네 미리(Miri-마루디에서 2시간가량 떨어진 사라왁주 북부 최대 도시로 석유, 천연가스개발 및 플랜테이션, 목재생산이 주요 산업) 사무실에서 사업소개를 하겠으니 그곳으로 오라는 서한만 왔단다.
 
“후덥지근한 날씨 아침부터 땀 목욕”
 
그 사람들은 알까? 자기네 현장사무소 위에 서한을 보낸 바로 그 환경단체가 있다는 걸? 헐~ 담당 활동가인 샤밀라(Shamila)는 그들의 초대에 응할 지 변호사에게 법률자문을 구했단다. 혹시나 발생할지 모르는 그들의 법적 악용을 고려해서. 그래도 지금 상황에선 가도 고민, 안가도 고민이다. 이러나저러나 일본정유사는 명분이 생겼으니.

▲ 마루디 사무소에서 활동하고 있는 매들린이 자기 집으로 일요일 점심식사 초대를 했다. 대가족이다. 매들린 아버지는 사라왁 남쪽 이반족 출신인데, 벌목 일 때문에 북쪽으로 왔다가 마루디에서 당시 15살이던 매들린의 어머니를 만났다고 한다. 결혼 후엔 벌목을 그만두고 쌀농사를 짓기 시작하셨다고. 매들린 사촌언니가 직접 담근 곡주를 마시며 10살 차이의 나이 때문에 결혼 못하게 할까봐 신부를 보쌈한 이야기 등 두 분의 연애이야기로 한바탕 웃음꽃이 폈다. 거실에 모인 매들린 가족들(사진 왼쪽), 상차림 중인 매들린(사진 가운데), 곡주를 대접하는 매들린의 아버지와 매들린(사진 오른쪽).     © 윤경효


요즘 마루디 시내는 외국의 개발업체 관계자들과 함께 최근 신문에 난 외국계 벌목업체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성폭행 당한 마루디의 쁘난(Penan)족(정글에서 사냥, 채집으로 생활하는 세계에서 마지막 남은 숲 유목족) 여성의 이야기로 시끌벅적하다.

마루디 사무실 서고의 책들을 정리하는데, 무분별한 자연자원개발과 사회정의 문제를 다룬 책들이 1980년대에 출판된 것부터 수십 권이다. 아, 그렇지. 이미 그때부터 이 얘기가 한창이었지... 하, 나는 돌고 돌아 이제야 가슴에 와 닿기 시작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참으로 오래 전부터 이 얘기를 해왔단 말이지...

20년 넘게 책꽂이에서 묵어 누렇게 변한 책들을 보니 맥이 빠진다. 그때 진작 이해했었더라면 따위의 어리석은 질문은 하진 않지만, 깊은 한숨이 절로 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내가 지금 알게 된 것도 코끼리 다리 한쪽... 다음에 또 반복하게 되겠지?…휴후~~

어느새 마루디에서 9일 일정이 다 지나갔다. 어제 도착한 것 같은데. 인도네시아에서보다 말레이시아에서의 시간이 더 빨리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다. 한 것도 없는데, 떠나야 할 시간이 코앞에 닥쳤다. 내일 피낭으로 돌아가면 태국으로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무분별한 벌목, 과연 사회정의는?
 

▲ 매들린 집 앞에서 그녀의 가족과 함께.     © 윤경효

당초 피낭에서 일주일 정도 쉬면서 비자 만기일을 채운 뒤 태국으로 떠나려 했는데, 마침 10월 4일부터 방콕에서 열리는 아시아 주민조직 리더 워크숍에 옵서버로 참여할 수 있게 되어 일정을 앞당겼다. 피낭에서 방콕까지 기차로 20시간이 걸린다니 기차를 이용하려면 10월 2일에는 출발해야 할 것이다.

마루디에서 마지막 날 밤, 샤밀라와 호텔방에서 새벽 1시까지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취미활동으로 연극배우를 할 만큼 감성이 풍부한 샤밀라와 얘기를 하다보면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동안 말레이시아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 많았는데, 샤밀라와 이야기하면서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생각 외로 잘 사는 말레이사아이지만 종교 사회적으로는 상당히 보수적(올해 라마단 기간에 공공장소에서 음료수를 마신 한 말레이여성이 종교재판을 받았다)인 것 같다는 내 의견에, 샤밀라는 보통 말레이시아를 인도네시아와 비교(같은 말레이계이자 무슬림 국가인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를 서로 자주 비교한다)해 그나마 낫다고들 얘기한단다.

그것은 인도네시아에 비해 인구나 영토도 작고(2009년 현재, 말레시아 약 2,800만 명, 인도네시아 약 2억명으로 거의 10배 가까이 차이 남), 자연자원은 풍부한 반면 지진, 홍수 등 자연재해는 거의 없는 등 기본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보다 빨리 안정되어 보이는 것뿐이지 결코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더 나을 것이 없다고 단언한다.

오히려 종교적으로 더 보수적인데다 정치, 사회, 문화와 더 연계되어 정치 부패뿐만 아니라 반종교(이슬람)적인 언론, 연구활동의 자유 등이 많이 제한된다고. 말레이시아에서 이슬람교는 이 땅의 말레이계의 정체성 자체이기 때문에 감히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인데, 이는 믈라카 왕국 이래 인도네시아에서 이주한 수마트라인, 자바인 등이 다른 나라의 이주자들과 오랫동안 섞이면서 그 틈바구니 속에서 새롭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 보다 상위 단위인 ‘말레이계’를 강조하게 되었고, 그 말레이계의 공통점으로 무슬림이라는 종교를 결합시켰기 때문이란다.
 
마지막 밤, 샤밀라와 수다삼매경
 
그래서 ‘말레이=무슬림’이라는 어이없는 등식도 성립된 것이고, 사회 문화 전반에 ‘말레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것도 그러한 배경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자신들을 자바인, 수마트라인, 발리인 등으로 이야기하지 말레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단다. ‘말레이=무슬림’이라는 등식의 정통성을 위해 무슬림 전래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잘 언급하지 않는다고.

이제야 국립박물관에 왜 15세기 믈라카 왕국 이전 역사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는 지, 인도네시아 친구들이 말레이시아 사람들을 보고 진짜 말레이문화를 가진 것도 아니면서 다른 나라에 자기들이 말레이 문화를 대표하는 것처럼 얘기하고 다니는 것이 어이없다고 얘기하던 것이 이해가 된다.

▲ 내가 자원봉사활동을 한 말레이시아 환경단체 SAM의 피낭 사무실 토지권팀 업무 장면.     © 윤경효


말레이라는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 진짜 말레이반도의 역사나 사실은 종종 누락되거나 회피되고, 진실을 들여다보기보다 포장하기 급급한데, 과연 그 안에서 내실 있는 시스템이 구축될 수 있겠는가라고 샤밀라는 반문했다.

가짜를 진짜인 것처럼 만들어야 하니 억지스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뿐더러, 여전히 정치적 살인이 은밀하게 자행되고 있어 시민단체 활동도 시민들과 공개적으로 호흡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말레이시아가 경제적으로 다른 동남아 보다 윤택하다고 다른 분야도 나을 거라 단순히 규정짓는 바람에 정치부패와 사회문제에 대한 호소를 잘 들어주지 않는다고. 그 때문에 말레이시아 정치는 아무 거리낌 없이 하루가 다르게 썩어가고 있단다.
 
‘말레인=무슬림’, 어이없는 등식
 
샤밀라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체성’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무슬림을 부정하면 말레이족임을 부정하는 것이라 생각한다는 말레이계 말레이시아인들. 처음엔 이해가 안 되었는데, 한국인=단일민족이라 부르짖던 우리와 다를 게 뭐 있나 싶다.

다만, 최근 한국에서는 이 등식을 깨는 노력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말레이시아는 샤밀라 말대로 정치적 억압은 뒤로 하더라도 종교문화가 너무 뿌리 깊어 그리 쉬워 보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종교’ 아닌가.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단체들이, 국가들이 알게 모르게 자기 정체성을 찾아 고민하고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정체성을 찾는다는 것이 어쩌면 이편과 저편, 줄긋기를 시도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자기처럼 생각하는, 또는 생각할 수 있는 말레이계는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면서, 심지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자신도 감히 종교를 부정하기가 힘들다고 샤밀라가 한숨을 쉰다.
 
▲ SAM 피낭 사무실의 토지권팀 사람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행정담당 라비 부인(Mrs. Ravi), 현장 코디네이터 샤밀라(Shamila), 연구담당 기타(Gitta), 법률자문위원인 변호사 데바(Theiva). 전문적인 그녀들을 보니, ‘프로는 아름답다’ 말이 떠오른다. 그녀들과의 수다가 벌써부터 그립다. 헐~     © 인터넷저널


그 긴 한숨에 말레이시아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느껴진다. 그렇게 사랑하니까 그만큼 분석도, 고민도 되는 것일 게다. 나는 과연 그녀만큼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을까?

어느새 여행을 시작한 지 중반을 넘어서고 있다. 이제 겨우 두 나라에 들렸을 뿐인데,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는 것 같기도 하고... 반면, 조금 지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작년 몽골에서 한바탕 홍역을 치른 경험이 있어서인지 몸도 마음도 그때보단 덜 부대낀다. 이렇게 ‘부유하는 것’에 적응해 가는 거겠지?
 
이렇게 부유하며 적응해가겠지?
 
태국 치앙마이에 있는 환경과 인권문제를 다루는 시민단체에 연락을 취했는데, 담당자가 출장 중이라 아직 확답이 없다. SAM활동가의 도움으로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도 연락을 취하고 있는데, 어찌될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갈수록 인맥이 늘어 도움을 주니, 그것으로 그저 감사하는 마음이다. 나중에 이 빚을 어찌 다 갚나…

10월 2일, 나는 말레이시아에서의 82일의 생활을 뒤로 하고 태국으로 떠난다.
 


대초원에서 유라시아 환경보고서를 띄우던 경효. 인도네시아에서 시작해 말레이시아, 태국, 버마, 캄보디아로 1년여 장도의 동남아시아 자원봉사활동을 하며 기행문을 써온 제가 이번엔 영국 쉐필드에 왔습니다. 쉐필드대학 석사과정에서 공부하려고요. 이젠 유학일기로 관심을 좀 끌어볼게요. ^^*
 
기사입력: 2009/11/19 [11:07]  최종편집: ⓒ 인터넷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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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개
몽골 대초원에서는 유라시아 환경보고서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버마, 캄보디아에서는 현지 시민사회 자원봉사활동 보고서를. 그리고 마침내 영국 쉐필드로 날아간 그가 이번엔 유학보고서를 독자들에게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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