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연재] 홍매지숙명-북해도의 호랑이(37-2) "별 걱정을 다 하네"

이슬비 | 기사입력 2020/12/21 [11:21]

[무협 연재] 홍매지숙명-북해도의 호랑이(37-2) "별 걱정을 다 하네"

이슬비 | 입력 : 2020/12/21 [11:21]

<지난 글에 이어서>     

한씨가의 제2후계인 저를 위해 이리 화려한 연회와 아름다운 가락들을 마련하여주신 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하니, 제가 미력하나마 가무로써 답례를 하고자 하는데 가납하여 주시겠나이까.”

 

서인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연회에서 주빈(主賓)이 가무로 답례를 하거나 흥을 돋우는 것은 제화족과 삼백족의 연회를 통틀어 모든 연회에서 칭찬을 받았으면 받았지 실례가 되는 일은 아니었다. 서인은 술잔을 높이 들어 올려 허공에 대고 부딪치며 서란을 독려했다.

 

순식간에 지난 10년 세월

몇 번이나 꿈속을 헤맸던가

또 얼마나 많은 원혼들이

의관에 서려 있던가

속고 속이는 전쟁에

의미를 찾아 무엇하리

승자에게는 권력을

패자는 역도라 칭할 뿐

이 비바람 길을

홀로 걸어가는 자

환희도 비애도 잊었으니

우여곡절 끝에 막이 내렸으나

돌아보고 싶지 않구나

지나간 시간에

타는 듯한 마음이여

향기 그윽하니

강산이 한눈에 담기지 않는구나

 

서란은 유흔 군대의 군가를 불렀다. 필요시에만 소집되는 유흔의 별동대가 부르는 이 군가는 유흔이 직접 가사를 짓고 곡을 붙인 것이었다. 전쟁의 선두에서 진군을 독려해야 하는 노래가 이리 감상적이어서야. 서란은 일순간에 가라앉은 연회장의 분위기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누가 들으면 마치 천하를 제패한 이가 세상 모든 것이 부질없다 말하는 것 같구려.”

 

서인의 말에 서란은 문득 자리에 멈춰 섰다. 서인의 말이 어딘지 모르게 슬프게 들리는 것이 지금 자신이 술에 취해 있어서이거나 유흔이 보고 싶어서라고 치부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저처럼 보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으십니까?”

 

서란은 마치 흥이 깨졌다는 듯이 발을 구르며 자리로 돌아와 서인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쪼르르, 하고 술이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맑은 술이 청자 잔으로 쏟아졌다.

 

그대의 외숙부가 어지간히도 보고 싶은가 보오.”

 

서인이 마치 다 안다는 듯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서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인이 서란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서란은 서인의 잔에 잔을 챙, 소리가 나게 부딪쳤다. 서인이 하하, 하고 호탕하게 웃으며 짓궂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대의 나이 이제 겨우 열넷이오. 아직 남녀의 즐거움을 알 나이는 아니라는 뜻이지. 그렇지 않소?”

 

그렇습니까.”

 

그대가 남녀의 즐거움을 알고 탐닉해갈 동안에 그대의 외숙부는 점점 나이가 들어갈 것이오. 그래도 그대는 그대의 외숙부에게서만 남녀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겠소?”

 

이 자도 어지간히 취했군. 서란은 푸흐흐,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남성우월주의적 문화의 수호자라면 자신의 나이가 어려 유흔이 남녀의 즐거움을 가르치기 어려워하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서란은 술을 입에 털어 넣고 얼른 빈 잔을 채웠다.

 

가주님의 그 말씀을 두고 세간에서는 무어라 하는지 아십니까?”

 

무엇이라 하오?”

 

“‘별 걱정을 다 하네.’라고 합니다.”

 

하하하하하하!”

 

서인이 또다시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서란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와 유흔의 침상 위 사정을 김씨가 가주님께서 걱정하실 이유는 없지요.”

 

거 참. 사람이 딱딱하게. 나는 뭐 농도 하면 안 되나 보오.”

 

더구나 김씨가는 남성우월주의적 문화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가문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제 나이가 너무 어려 유흔이 저에게 남녀의 즐거움을 가르치는 것을 어려워하지는 않을까를 걱정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하하하하하하하! 듣고 보니 그건 그렇소. 하하하하하하!”

 

연회가 파하고 서란은 서인이 내준 별원으로 향했다. 짐은 비화와 구향, 소하, , 자영, 화요에게 들고 오게 했으니 지금쯤 별원의 자기 방 안에 있을 것이었다. 별원으로 향하며 서란은 문득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밤하늘의 어둠이 깊어 보이는 것이 칠흑이 아니라 흑암 같다 생각하며 서란은 한동안 밤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누가 그러던데. 자꾸 하늘을 쳐다보면 명이 짧아진다고.”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서란은 하늘에서 시선을 거두고 뒤를 돌아보았다. 등 뒤에는 어딘지 모르게 장난스러운 기색을 띤 한 청년이 서 있었다.

 

그 말 어떤 근거가 있는 말이야?”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불퉁거리는 투로 대꾸했다. 청년이 히히, 하고 웃으며 서란의 앞에 한 손을 내밀었다.

 

글쎄. 그냥 누가 그러기에.”

 

누가?”

 

그냥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있어. 오르지 못할 하늘을 쳐다보는 자는 명이 짧아진다.”

 

뭐야, 그게.”

 

그러나 서란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말을 마친 청년의 눈이 너무 슬프게 보여 서란은 청년의 눈을 외면해버렸다.

 

나는 김지수야. 너는?”

 

청년이 이름을 물었다. 그러나 서란은 이름을 말해주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했다.

 

오르지 못할 하늘 같은 건 없어.”

 

?”

 

오르지 못할 하늘 그런 건 없다고. 그러니까 그런 말을 한 놈들은 그냥 베어버려.”

 

……?”

 

그대에게 누가 그런 소리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또 그런 소리를 하는 놈들이 있다면 베어버려. 모두 죽여 치워서 그대가 하늘을 오르는 받침대로, 버팀목으로 만들라고.”

 

…….”

 

어차피 그러는 게 당연한 시대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혼자 울고만 있지 말라고. 궁상맞게.”

 

청년의 손은 아직 거두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서란은 그 손을 잡지 않았다. 서란은 망연한 듯이 서 있는 청년에게서 뒤돌아 걸음을 빨리 했다. 등 뒤에서 청년의 슬픈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하여튼 김씨가 것들은 정말…….”

 

별원의 방 안으로 들어와 침상에 몸을 눕히며 서란은 신경질적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조금 전 만난 그 청년의 슬픈 노랫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것 같아 서란은 아예 이불을 뒤집어쓰고 억지로 눈을 감았다.

 

<다음 글로 이어짐>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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