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백화요란(百花燎亂(33-1) '달의 여신'

이슬비 | 기사입력 2020/05/06 [10:01]

[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백화요란(百花燎亂(33-1) '달의 여신'

이슬비 | 입력 : 2020/05/06 [10:01]

<지난 글에 이어서>

 

납채(納 采). 혼인을 앞둔 신랑이 신부의 집에 혼수품을 보내는 절차. 그러나 혼수품이라는 것은 결국, 신부의 노동력을 가져가는 대가에 불과한 것. 이를 통해 신부의 집안은 재물이나 권력을 얻고, 신랑의 집안은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돌보고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울 노동력을 얻는 것이니 납채라는 것은 결국, 시장에서 노예를 사거나 창기를 사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화족의 납채는 다른 국가나 부족들의 납채와는 그 성격이 달랐다. 신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은 모든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일. 그러나 모든 아이누 문화권에서 그 재현은 다름 아닌 신부였고, 신부는 혼인이 선언되는 그 순간부터 초야를 치르기 직전까지 인간이 아닌 여신으로, 달의 신 레아나의 현신으로 명명되었다.

 

그러니 제화족에게 있어 납채라는 것은 인간인 신랑이 여신인 신부에게 바치는 일종의 봉헌물이었다. 인간인 신랑은 여신인 신부에게 봉헌물을 바치며 은혜와 가호와 은총을 빌었고, 신부는 봉헌물이 마음에 드는지 그렇지 않은 지에 따라 신랑이 바라는 것들을 내려줄 것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 그것이 제화족의 납채였다.

 

가을바람 스쳐간 밤 사이 비가 내리고

꿈결처럼 아득한 고향 땅이여

만날 수 없어 그리움에 사무친 당신

아픈 이별이지만 보내야 했던 사랑

전쟁의 상흔은 언제쯤 사라지려나

승패의 역사는 세월 속에 묻힐 것을

촛불은 꺼졌지만 눈물이 마르지를 않네

강산은 그대로인데 곱던 얼굴만 바랬구나

 

모진 이별이지만

이별을 피할 수는 없으니

기러기 남쪽으로 떠나니

이 마음 어찌 전할까

곱던 얼굴 어디로 가고

세월만 덧없구나

오로지 변치 않는 사랑만이 남아

 

서란은 백연으로부터 혼인을 축하한다는 서신과 함께 큰 선물을 받았다. 백연은 금가루와 은가루로 표면에 무늬를 놓은 칠기 공예품들을 보내왔다. 벼루집이며 빗접, 수경(手鏡)은 물론이고, 칠기로 된 경대까지 보내온 그는 이 공예품들은 공가의 필수 혼수품이라며 자신의 안목에 뿌듯함을 드러냈다.

 

아카포.”

 

자신은 아직 유흔과 혼인하겠다 한 적이 없는데. 그러면서도 서란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유흔과 혼인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나쁘지 않았다. 자신은 유흔이 좋으니까.

 

이게 다 뭐야, 화야?”

 

서란은 유흔에게 백연이 보내온 선물들을 보여주었다. 유흔은 칠이며 무늬를 만져보고는 깜짝 놀라 서란을 바라보았다.

 

백연 아카포가 혼인선물이라고 줬어. 공가에서는 이것들을 혼수로 보낸다며.”

 

으응. 백연이 정말 선물을 잘 골라줬구나. 정말 화려하고 고급스럽다.”

 

백연이 개인적으로 선물을 보내온 며칠 뒤, 신씨가의 사절단이 가라고루성에 도착했다. 그들은 서란의 혼인을 축하하며 막대한 양의 비단과 패물을 선물로 건네고는, 신씨가는 서란이 차기 가주가 되고 몇 년 동안은 한씨가의 강역을 침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하고 돌아갔다.

 

신씨가의 사절단이 돌아간 다음날, 유흔은 오후 내내 서란과 함께 저잣거리를 돌아다녔다. 납채물은 어디까지나 서란이 받는 봉헌물이니 유흔은 서란의 마음에 드는 것들로 납채함을 가득 채우고 싶었다.

 

잘 골라야 해, 화야. 앞으로 네가 평생 간직해야할 물건들이야.”

 

납채함을 채울 물품들을 사러 다니는 가운데, 유흔은 자그마한 장신구 좌판에서 뒤꽂이 하나를 골라 셈을 치렀다. 붉은 유리로 만든 나리꽃 뒤꽂이에는 역시 붉은 유리로 된 자그마한 보요장식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었다.

 

유흔은 서란의 신아절을 치렀던 날부터 단골이 된 비단가게로 서란을 데리고 가 광택이 들어가지 않은 검은 비단으로 바지와 저고리를 짓고, 은은한 광택이 도는 하얀 비단으로 포를 지어주었다. 그리고 유흔은 모직가게로 가 갈색 양털로 바지를, 하얀 여우털로 포를 만들 것을 주문했다. 모피가게로 가 서란이 입을 하얀 담비털외투와 회색 늑대털외투까지 짓게 한 유흔은 궁시장들의 집이 늘어선 거리로 향했다.

 

수렵민인 제화족에게 있어서 활과 화살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무기이고 도구였다. 그러니 제화족에게 활과 화살을 선물한다는 것은 곧 삶을 선물한다는 것과도 같은 것. 유흔은 집들 하나하나를 돌아다니며 궁시장들이 보여주는 활과 화살을 살펴보았다. 한참을 궁시를 살펴보며 돌아다니던 유흔은 한 궁시장의 집에서 조금 작지만 탄성이 강한 활 하나를 보았다. 그것은 마치 그 옛날 소수맥이라는 곳에서 생산되던 맥궁을 다시 보는 듯하였다.

 

하나 만들어 주시오.”

 

유흔은 궁시장에게 활과 화살을 주문하며 금전을 하나 꺼내 주었다. 그러나 궁시장은 금전을 받지 않았다.

 

궁시는 그냥 드리지요.”

 

……?”

 

저는 본래 궁시장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희 조상 대대로 내려온 귀한 것이고요.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서란 아가씨께 드리지요.”

 

……!”

 

남자가 서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한 손을 꿇은 무릎 위에 올리고 고개를 숙였다. 서란은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분명히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고현성에서 뵈었던 그때는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 모두가 잠시나마 꿈꿀 수 있었으니까요. 잠시나마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 생각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제야 서란은 남자의 두 눈이 초점 없이 허공에 고정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서란은 남자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감쌌다.

 

작금의 시대는, 그리고 이 세상은 쓸모없다 여겨지는 이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지요. 그저 음식만 축내는 식충이, 벌레라고 여기며 어서 죽어버리기를 바리지요. 그러나 그런 저희에게 아가씨는 처음 내려온 구원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

 

저희 같은 것들도 싸우다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해주셨지요. 그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고자 아가씨께서 이곳에 오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아니, 상황이 너무 절묘해서 운명과도 같은 것일까. 3년 전이었던 그날 자신이 객기로 저지른 일이 누군가에게는 구원이었다니.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그날 함께 있었던 이들이 방문을 넘어가던 모습이 떠올라 서란은 남자의 어깨를 감싼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싸울 수 없는 이들을 태수부 관저에 모아놓은 것. 그것은 도유향만의 방식이라고, 그녀가 마음이 여려서, 가장 먼저 죽을 수밖에 없는 이들의 죽음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리 하였다고 말하고 싶은 이들이 분명 있을 거야.”

 

…….”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것은 우리 제화족의 방식이 아닌 삼백족의 방식일 뿐이다, 삼백족은 농경민족이기에 밭을 갈고 곡식을 심고 가꿀 수 없는 이들을 쓸모없는 이들로 여겨 배제하고 심지어 죽이기도 한다 말하며 그렇게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자부하겠지.”

 

…….”

 

그러나 그것은 도유향만의 일도, 삼백족만의 일도 아니야. 우리도 그동안 충분히 그들을 배제했어.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 여겨지는 이들을 이전 야영지에 버려두고, 때로는 태어나자마자 죽이기도 했지.”

 

…….”

 

오직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는 이유로.”

 

…….”

 

그것이 쓸모없다 여겨 배제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지? 그런데도 우리는 과연 삼백족만을 비난할 수 있는 걸까?”

 

……!”

 

“3년 전 그날부터 우리는 도유향의 방식을 그녀의 여린 마음때문이라 여기며 그녀를 가엾어 하고 그녀에 의해 배제된 이들이 그녀를 비판하려는 목소리를 막았지. 오직 그녀가 제화족이기 때문에.”

 

……!”

 

그것은 결국 삼백족의 배제는 나쁘고 제화족의 배제는 정당하다는 논리 아니야? 이것이 내가 하면 세기에 둘도 없을 사랑이나, 남이 하면 추잡한 간통이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지?”

 

유흔은 깜짝 놀라 서란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아까 그 남자가 선물한 활을 품 안에 꼭 끌어안은 서란의 두 눈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음 글로 이어짐>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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