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구 칼럼] "건전재정이라는 이름의 도그마, 생산적 활용이 핵심"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20/04/27 [09:07]

[이준구 칼럼] "건전재정이라는 이름의 도그마, 생산적 활용이 핵심"

서울의소리 | 입력 : 2020/04/27 [09:07]

미래통합당과 수구언론이 재정건전성을 이유로 ‘긴급재난지원금 소득 하위 70% 지급’을 주장하고 있는 가운데, 재정학 권위자인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가 “상황에 따라서는 일시적으로 건전재정을 포기하고 과감하게 적자재정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22일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건전재정’이라는 이름의 도그마(dogma)”라는 제목의 글에서 “경제가 어떤 상황에 있든 건전재정 유지가 절대적으로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경직된 사고”라며 이 같이 말했다.

 

 

아래는 이준구 명예교수의 글 전문

 

가정이나 국가가 모두 똑같지만, 수입과 지출이 균형을 이루는 건전재정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데 한 점 이의가 없습니다. 수입은 빠듯한데 빚내서 마구잡이로 씀씀이를 늘리는 가정은 파산의 구덩이에 빠지고 맙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여서 지출을 적절히 통제하지 않고 재정적자를 쌓아가다가는 곧 국가부도의 위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경제가 어떤 상황에 있든 건전재정 유지가 절대적으로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경직된 사고입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일시적으로 건전재정을 포기하고 과감하게 적자재정을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1930년대의 대공황하에서 케인즈(J.M.Keynes)가 제시한 ‘기능적 재정’(functional finance)이라는 새로운 개념입니다.


대공황의 덫에서 빠져나오려면 정부지출의 과감한 증가를 통해 수요 부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그렇다면 적자재정도 불사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입니다. 그 이후 재정정책은 통화정책과 더불어 경제안정을 위해 활용될 수 있는 정책수단으로 널리 인정되어 왔습니다.


재정정책은 조세 징수액을 줄이거나 아니면 정부지출을 늘려 총수요 부족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주로 운영됩니다. 이 과정에서 재정적자가 발생하면 국채 발행을 통해 이를 메우게 되지요.

물론 재정적자가 계속 발생해 국채가 남발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국채 발행액이 커지다 보면 국가의 채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심각한 위기상황을 초래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건전재정의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건전재정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과감한 재정확장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에서도 머뭇거리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닙니다. 설사 적자재정으로 인해 국가의 채무가 어느 정도 더 커지더라도 때로는 과감하게 이를 실천에 옮겨야 할 때가 있는 법입니다. 정부가 재정적자를 겁내 손을 놓고 있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불황으로 인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확장적 재정정책 하나만으로 풀어낼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좀 더 근본적인 해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구태여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법을 마련하고 이것이 효과를 거두려면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따라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근본적 해법은 그것대로 추구하되, 과감한 재정확장을 통해 단기적으로 불황에서 발생하는 고통을 줄여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보수야당과 보수언론은 재정건전성을 들먹거리면서 재정확장을 추구하는 정부의 발목을 잡기 일쑤입니다. 마치 재정건전성의 유지가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는 지상과제나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나는 그들이 건전재정이란 도그마에 빠져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이렇게 해석하고 싶지는 않지만, 무슨 수를 써서든 정부를 궁지에 빠뜨리고 싶어 하는 놀부 심보가 작용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경제가 어려울수록 정부를 궁지에 몰아넣고 몰매를 때리기가 그만큼 쉬워질 테니까요.

그 동안의 경험에서 드러났듯, 통화정책을 통해 불황에서 벗어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자율이 거의 0% 수준으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낮출 여지도 작은 데다가, 이자율 인하가 소비나 투자에 이렇다 할 긍정적 효과를 냈다는 증거를 찾아보기도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주요국들 모두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크루그먼(P. Krugman)이나 스티글리츠(J. Stiglitz) 같은 경제학자들이 과감한 확장적 재정정책의 채택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IMF 같은 국제기관에서도 과감한 재정확장을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전통적으로 IMF는 재정건전성을 매우 중시하는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이런 충고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듯, 우리나라의 국가채무 수준은 OECD 여러 나라들 중 가장 낮은 수준에 속합니다. 미국은 우리보다 두 배 이상 높고, 일본은 다섯 배 이상 높은 실정입니다. 그런데도 미국과 일본 정부는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서슴지 않고 공격적인 확장재정을 추구합니다.

최근 국제신용평가기관 S&P는 우리나라 국가신용등급을 아주 높은 수준인 AA 등급에 계속 유지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보다 등급이 더 높은 나라는 불과 15개국에 불과합니다. 국가채무에 관한 한 아직 안전지대에 머물고 있다는 평가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우리가 벌써부터 겁을 집어먹고 머뭇거릴 필요가 있을까요?

내가 보기에는 경제학자들 중에도 건전재정 도그마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건전재정을 강조해서 손해 볼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건전재정을 강조함으로써 책임감 있고 사려 깊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을지언정, 무책임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리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나처럼 필요하면 과감하게 적자재정의 길로 나아가라고 외치는 사람이 무책임하게 비춰질 가능성이 크지요. “이 친구가 나라를 말아 먹으려고 아예 결심을 했구나.”라는 식의 비난이 쏟아지기 일쑤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확장재정을 통해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재정적자 발생 여부와 관계없이 당연히 그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것이 진정으로 용기 있는 태도라고 믿습니다.

Economist지는 세계 제1차 대전 직후 영국의 건전재정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경제를 엉망으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지적합니다. 대전 직후 영국의 국가채무는 GDP의 140% 수준까지 뛰어 올랐고, 그 결과 국가신용도가 땅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영국 정부는 뼈아픈 재정긴축을 단행해 1920년대에는 상당폭의 재정흑자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긴축적 재정정책의 결과는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긴축정책은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와 1928년의 GDP는 10년 전인 1918년의 GDP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10년 동안 줄곧 성장이 뒷걸음질 쳤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긴축적 재정정책이 영국의 국가부채를 줄이기는 했을까요?
아닙니다. 1930년의 국가부채 규모는 오히려 GDP의 170% 수준으로 뛰어올랐습니다.
경제가 위축되니 자연히 조세수입이 줄어들고 정부가 아무리 긴축을 하려 해도 재정적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국채의 발행은 미래 세대의 (조세)부담을 늘린다는 점에서 무책임한 일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약 국채 발행을 통한 정부의 추가적 수입이 모두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의 소비를 늘려주는 목적으로만 지출된다면 그 지적이 맞습니다. 그러나 국채 발행을 통한 추가적 정부지출이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미래의 세대도 더 높은 소득을 얻을 수 있다면 미래세대로 부담이 전가된다는 논리는 타당성을 갖지 못합니다.

미래세대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건전재정이란 도그마에 빠져 불황에 빠진 경제를 그대로 방치해둔 앞 세대의 무책임함이 더욱 원망스러울 것입니다. 지속되는 불황국면이 미래세대에도 상당한 고통을 주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불황국면에서 빠져나와 순조로운 성장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미래세대를 위한 최선의 방책입니다.

물론 정부가 빚내서 이런저런 데 부질없이 흥청망정 써버린다면 그건 큰일입니다.
따라서 정부가 한 푼이라도 낭비적 지출을 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해야 마땅한 일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정부 재정에 적자가 나느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정부가 생산적인 방식으로 적자재정을 활용했는지의 여부가 바로 문제의 핵심입니다.

그런데도 건전재정의 도그마에 빠진 사람들은 적자재정 그 자체가 마치 무책임한 재정운영의 전형이라도 되는 듯 매도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교조주의적 태도는 지금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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