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원 세계문화유산 등재, 성리학 세계적 보편가치 공인

권혁시 칼럼 | 기사입력 2019/07/15 [10:30]

한국서원 세계문화유산 등재, 성리학 세계적 보편가치 공인

권혁시 칼럼 | 입력 : 2019/07/15 [10:30]

이웃나라 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안배진삼) 총리가 극단적 정치논리에 함몰된 나머지 우리나라에 대한 보복적인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 보이는, 무도하고 부당하기 이를 데 없는 무역제재를 자행하는 중에 지난 6일 오후(현지시간), 멀리 카스피해 서쪽 아제르바이잔의 해양도시 바쿠에서 ‘대한민국 전통문화의 승전보’가 날아들었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사학 私學)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 소수·도산·병산·옥산·도동·남계·필암·무성·돈암서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가 결정된 것이다.

 

“오늘날까지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이어지고 있는 한국의 ‘성리학’(性理學)과 이와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면서 중국의 성리학이 한국의 여건에 걸맞게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인정한다” (세계유산위원회, ‘한국의 서원에 대한 평가’) 조선 중기에 이르러 ‘문·사·철’(文史哲)의 정점을 이룸으로써 이렇게 명백히 인류의 보편가치로 세계적인 공인을 받은 조선 성리학이 한민족,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선비정신(인격적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학문과 덕성을 키우며, 세속적 이익보다 대의와 의리를 위해 목숨까지도 버리는 정신)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 자문자답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깊이 생각하며 끊임없이 거침없는 토론·학습(강학 講學)에 진력했던 유림의 성인지도(聖人之道)·위성지학(爲聖人之學), 그 성리학의 전당이 세계적인 보편가치로 인정된 사실은 ‘정신적 선진국, 문화민족’으로서 한겨레의 무한한 자부심이다. 그래서 차제에 우리는, 그렇게 대단한 자부심과, 이를 통한 자신감과 신념으로 경제동물(economic animal)의 근성을 다시금 드러낸 저급한 일본(군국주의)정신의 파시즘적 작태를 비판하고 응징, 배격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반일이 아닌) ‘극일론’의 지혜를 쌓고, 이를 통하여 정치·경제·사회·교육·문화 등, 전 분야를 발전시켜 국력의 총체적 증대를 추진해야 하거니와, 문화민족의 자부심은 말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아는 것이 힘이다. knowledge is power” (프란시스 베이컨) 우리 선현들이 이룬 성리학을 탁월한 사상·학문으로 전 세계가 인정한들, 우리 자신이 이를 잘 알지 못해 제대로 실행하지 않으면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자(知者)는 미혹되지 아니한다” (知者不惑 지자불혹. 공자, 논어) 따라서 ‘성리학’으로써 세계 보편적 가치가 공인된 만큼 이를 제대로 알고 숙지해야 그럴 수 있음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럴진대, 성리학이란 과연 무엇인가.

 

유학(성리학·주자학)을 완성한 조선 성리학, ‘선비정신’(성인지도·위성지학)의 계승 실천

 

“살인을 좋아하지 않는 자라야 능히 (천하를) 통일한다” (不嗜殺人者能一之 불기살인자능일지. 맹자) 맹자(孟子, BC 390~305년)는 공자(孔子, BC 552~479년)가 창시한 유교를 공맹(孔孟)의 선진유학으로 발전시켜 공자의 명실상부한 후계자로서 유교적 ‘왕도(王道)정치’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그의 언명이 무색하게도, 무력을 휘두르는 진(秦)이 중원천하(중국)을 통일하여 사상초유의 대제국이 탄생하였다. 그래서 유교사상이 배척되고, 광대한 국가의 통치에 보다 효율적인 법가사상이 지배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로 인한 극히 강압적이고 혹독한 통치는 인본주의적 도덕정치, 곧 유교사상의 왕도정치를 염원케 하였다.

 

절치부심, 우여곡절 끝에 초패왕 항우(項羽)를 쓰러뜨리고 일어선 한(漢)은 통일제국을 이루면서 법가사상을 유지하기는 했으나, 동시에 유교사상의 부흥을 강력히 추진해 나갔다(유교경전을 토대로 한 과거시험을 위시하여 동중서 董仲舒가 이를 주도하였다). 그런데, 당시에는 유교의 훈고학적(경전해석 위주), 현세 지향적 경향으로 인해 발전하지 못한 채 불교, 도교에 대하여 형이상학적(정신세계의 차원) 우위를 독점할 수 없었다. 이 같은 한계상황을 타개, 극복하고자 송(宋)대에 이르러 ‘벽이단론’(闢異端論)과 ‘성인가학론’(聖人可學論)을 근거로 유교·유학의 위상 확립과 독점적 지위 확보를 시도하였다.

 

그런 한편, 신진 사대부의 정치에 대한 문호 개방을 모색하였다. 벽이단론은 올바른 유교사상의 전승을 기준삼은 ‘도통론’(道統論)에 입각하여 불교, 도교의 탈정치적, 무정치적 사유를 정통(orthodoxy)에 반하는 이단(heterodoxy)으로 배척하고, 성인가학론은 정치지도자는 출신성분이 아니라, 오로지 학문적 교양·능력에 따라 결정된다는 논리이다(대차는 없으나, 정호(程顥,1032~1085년), 정이(程頤, 1033~1107년), 한유(韓愈, 768~824년) 등은 전자를, 주염계(周濂溪, 1017~1073년)는 후자의 논리 정립에 주력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유학이 비로소 정치담론(통치방법론)으로 변화·발전하였고, 이에 기초하여 ‘성리학’(性理學)이 성립된 것이다. 성리학은 전통의 유학사상을 정치적 문제의식을 통해 재해석한 이른바 ‘신유학’(Neo-Confucianism)이며, 서원의 최초 설립자이기도 한 주자(朱子, 1130~1200년)가 ‘정치적·도덕적 통섭’으로 이론체계(朱子學 주자학)를 완성하였다. 도교, 불교에 비해 유교·유학사상은 삼국시대 이래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간단없이 한민족의 정치와 일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이를 확실히 입증하는 사료, 문집 등 신빙성 있는 문헌, 자료들이 상당히 풍부하게 보전되어 있다).

 

또한 후대에 와서 고려의 지식인들이 남송(南宋)의 성리학(주자학) 형성 이전에 북송(北宋)의 성리학을 도입했으나, 이에 대한 이론적 이해가 충분하지 못했을 터이다. 그런 가운데, 주자학의 최초 전래자이며 이론을 완전히 습득한 지식인(집단)으로서 정치세력화를 주도한 인물이 여말의 안향(安珦, 1243~1306년)이다. 그는 유학사상의 근본정신·실천강령인 ‘성인지도’(聖人之道)를 확실히 지득하여 명정하게 인식하였다. 이렇게 안향이 최초로 성리학을 도입한 이후, 백이정(白頤正, 1247~1323년), 권부(權溥, 1262~1346), 우탁(禹倬, 1263~1342년), 이제현(李齊賢, 1278~1367년) 등을 거쳐 성리학은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으로 자리매김해 나갔다.

 

특히, 이색(李穡, 1328~1396년)은 성리학을 정치철학·사상으로 확대재생산, 발전시킴으로써 지배적인 정치담론으로 정착시키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대학자였다. 그는 자신의 문하에서 정몽주(鄭夢周, 1337~1392년), 정도전(鄭道傳, 1342~1398년) 등과 동문수학한, 권부의 손자인 권근(權近, 1352~1409년)을 특별히 지목하여 정주학(程朱學, 주자학)이 못다한 예기에 대한 철저한 고증과 정립을 당부하였다(이는 그 후대인 조선 중세에 예학 사상을 중시하여 서원을 중심으로 부흥, 발전시킨 사실과 의미심장한 연관성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양촌(陽村) 권근은 여말선초, 격동의 시대에 주자학(정주학)을 비판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조선 성리학을 독보적으로, 주자의 성리학(주자학)을 보정하여 보다 완전한 성리학으로 정립하였다(그는 독창적으로 확립한 교육론의 학설을 심화, 발전시켜 집대성하여 조선 교육제도의 기반을 다지기도 하였다). 그런 까닭은, 무엇보다도 정치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서는 ‘우연성’(부조리)를 확실히 배척해야 한다. (작금의 우리나라가 처한 위기상황이 그러하듯) 시대적 혼돈 속에서 정치적 혼란을 극복, 수습하여 국가·사회(공동체)의 전 구성원(국민) 모두가 수긍하고 인정할 수 있는 지극히 체계적인 보편가치가 제시돼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권근은 성리학적 이단배척의 정치실현을 위한 이론적 방편을 넘어 국가·사회를 통섭하여 규율할 수 있는 ‘도덕적 보편주의’의 근간을 다지는 결정적인 역할을 자임하고 실천해 나갔다. 권근은 입학도설, 오경천견록을 저술하여 사서(四書, 논어·맹자·중용·대학) 위주의 주자학을 탈피하고, 보완하였을 만큼 성리학을 달통하였을 뿐 아니라, 예기천견록의 서문에서 여말 성리학의 정통성이 자신에게 계승된 사실(예기고증)을 밝히고, 아울러 이를 통해 (세계유산위원회가 성리학을 조선의 실정에 맞게 변화시키는 과정으로 본 것과는 달리) 성리학 이론에 대한 독자적 보완, 정립을 완수함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진정한 태두(太豆)로서의 그 위상과 업적을 이루었던 것이다.

 

전술한 바처럼 두말 할 나위 없이 우리나라의 반만년 역사에 정치·경제·사회·문화·사상 전반에 걸쳐 유교문화가 심대한 작용을 했던바, 현세에 이르러 이를 극히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적잖다. 편협하고 극단적인 생각에서 한방향으로 포커스를 겨냥하여 유교전통을 단지 신분(권력지향), 파벌(파당조장) 강화에 급급했던 퇴행적·수구적 정치논리로 치부하는 편견, 그저 고루할 뿐이라는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은 배격되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이따위 몰지각하고 무분별한 단견과 억측은 일제 강점 속에서 배태된 식민지사관으로부터, 근절되지 않고 암암리에, 아니면 부지불식간에 지속되는 ‘오류의 일반화’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선 성리학에 대한 그와 같은 부정적 관점보다는, 근본적으로 유교·성리학의 철학과 사상이 변화에의 대응·발전(변화의 관리), 능동적 적응력 주도(주체적 실행능력), 과거지향적 논리지양(진보적 상생이론) 등이 그 핵심임을 직시하여 긍정적인 재평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다행이 유교·유학에 드리워졌던 질시와 부정의 관념이 점차 불식되면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 세계적으로 그런 호의적인 학풍이 진작되고 있어 대단히 고무적이다(한국의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결정된 것도 이런 학문적 기류가, 다소의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맹자의 왕도정치, ‘경세론’(민생경제·국민교육·도덕정치)의 온고지신 실현

 

서두에 맹자의 왕도정치를 말했거니와, 장구한 세월 속 역사의 흐름 끝에 거의 완결된 조선의 성리학, 성인지도·선비정신을 기반으로 (유럽의 종교개혁, 르네상스가 그러했듯이) 그 ‘경세론’으로의 회귀를 시도해야 한다. 그리하여 민생(경제)·인륜(교육)·덕치(인정)를 실현해야만 한다. ①이상적인 경제제도, ②학교설립·국민교육, 이로써 경제적 안정을 기하여 백성의 생계, ‘민생’을 유지하는 것이 왕도의 시작이며 교육을 통하여 ‘인륜’을 깨우치는 것이 왕도의 완성이다(富之敎之 부지교지. 공자). ③인정(仁政)은 ‘인’(仁)의 효용적 실천으로써 덕치(德治)인 바, 정치의 도는 오로지 위정자의 ‘덕’(德)에 달린 것이다. 요컨대,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바로 왕도다" (敬德保民, 保民道 경덕보민 보민도. 맹자)

 

바야흐로 조선 성리학(聖人之道 성인지도)의 선비정신을 실천하여 보다 확실히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실현해야 할 이 맹자의 ‘경세론’은 천명이며 위정자의 사명·소임이다. 하여, 반드시 명심해야 할 바는, “위대한 하늘은 특별히 친애하는 것이 없다. 오직 유덕자를 도울 따름이다” (皇天無親 唯德是輔 황천무친 유덕시보. 논어 ㅡ 이는 맹자의 ‘역성혁명’의 근거다) 그러므로 사리사욕과 아집을 떨쳐 버리고 오직 국리민복과 사회정의·평화를 이루며,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는 데 헌신할 멸사봉공·공명정대·공평무사의 투철한 공적 사명의식과 신념, 결연한 의지 없다면 지도자·위정자이길 마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성리학을 세상살이의 방편으로 삼은 조선시대의 지식인 사대부, 곧 선비들의 삶의 의미와 목적, 최고의 가치관·인생관·세계관은 성인군자의 지향(성인지도)이었다. 이를 위한 배움이 ‘위성지학’(爲聖之學)이며, 같은 의미로써 성인지학(聖人之學, 성학)은 구체적인 방법론, 즉 수양론이다. 이로써 평생토록 끊임없이 열심히 배우고 깊이 생각하며 갈고 닦은 ‘선비정신’으로써 조선왕조는 세계사에서 유래가 거의 없는 5백년의 오랜 역사를 이어 갔던 것이다.

 

성인지도, 그 선비정신의 힘으로 굳건히 지탱되어 면면히 이어져 온 5백년 역사의 조선왕조가 속절없이 무너지고, 36년 간 일제강점과 식민통치, 그에 분연히 맞선 선열들의 항일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했으나, 국토분단과 3년간의 내전, 그 기나긴 질곡에서 어렵사리 벗어난 대한민국은 1960년대 중반부터 정부주도에 의한 경제개발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60년대 말, 70년대 초에는 그 성과가 아직은 미진하여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예의범절을 비롯한 예도와, 상부상조하는 사단(四端)의 심성과 의리를 통하여 ‘도덕적 인간본성’(仁 인)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유교·성리힉의 정신이 이어지고 지켜졌었다.

 

조선 말기에 외척들의 무도한 세도정치로 선비정신은 크게 손상을 입었고, 그런 탓에 조선 말기에는 권력이동을 쫓아 이합집산하는 모리배, ‘변절자’들이 속출하였다. 그리고 민족정신을 말살하려 했던 36년의 일제강점과 6·25 한국전쟁의 참화가 이어졌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토록 끊임없는 시련과 역경, 환란 속에서도 이를 견디어내고 ‘선비정신’은 그렇게 살아있었다. 성리학을 통해 오백 년여 긴 세월동안 뿌리를 깊게 내린 한겨레의 정신적 지주, 성인지도의 ‘선비정신’이 쉽사리 뿌리 채 뽑힐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국가의 부강과 국민의 행복(國利民福 국리민복)을 좌우하고 결정짓는 정치의 파행과 경제의 왜곡은 하루아침에 그리 된 것이 걸코 아니다.

 

불행하게도 해방정국에서, 불의하기 이를 데 없는 (선비정신에 반하는) 친일 소인배들의 득세로 희미해져 가던 ‘민족정기’를 되살리지 못하였다. 게다가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불법 집권한 박정희정권은 재벌중심의 경제개발 일변도의 정책, 이른바 ‘개발독재’를 밀어붙여 경제발전의 성과를 거두기는 했으나, 천민자본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역효과, 악폐를 키웠다. 그리하여 ‘물질만능주의·배금주의’가 한국인의 일상사는 물론 정신세계마저 지배함으로써 전통적 ‘선비정신’이 여지없이 말살되는 참담하고 불행한 지경의 수렁에 깊이 빠져들었던 것이다.

 

"군자는 도(道)를 걱정할 뿐, 가난은 근심하지 않는다" (君子憂道 不憂貧 군자우도 불우빈. 공자, 논어) 이처럼 우리 한겨레의 전통 사상인 유학의 인본주의의 정신, 성리학의 성인지도의 지혜를 (대단히 어렵고 쉽지 않겠지만) 통렬한 반성과 굳은 결심을 통해 법고창신(法古刱新)한 정신무장(선비정신)으로 초지일관하면 만사형통, 거칠 게 없고 걱정할 일이 없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지도자·위정자는 주체적 외교로써 남북·북미관계의 개선 진작, 일본의 수출규제 문제 등, 당면한 빅이슈들을 풀어나가고, 공맹(孔孟)의 경세론을 추구하여 민생위주 경제, 전인적 국민교육, 도덕적 책임정치를 실현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해 주길 바란다.

 

아울러, 국민들 또한 민주국가의 주권자·주체로서 전 세계가 인류 보편가치로 공인한 우리 한겨레의 정신문화 유산인 유교·성리학의 근본정신을 온고지신(溫故知新)하여 그 역할, 권리·의무를 다해야만 한다. "지디피(GDP, 국내총생산)는 성장하는데, 왜 사람들의 삶은 어려워 지는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조지프 스티글리즈) 이러한 국가경영의 모든 문제는 근본적인 원인이 잘못된 정치이며, 그래서 특히 국민의 정치에 대한 관심과 문제의식, 그리고 조선시대의 선비와 같은 비판정신이 반드시 필요하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댓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 당한다는 것이다" (플라톤, 국가)

 

 

대한글씨검정교육회 권혁시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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