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판사님들, 얼마나 저항해야 강간죄가 성립 되나요?"

박상종 | 기사입력 2019/06/26 [09:48]

"법원 판사님들, 얼마나 저항해야 강간죄가 성립 되나요?"

박상종 | 입력 : 2019/06/26 [09:48]

우리는 왜 약자인가 지난 3월8일 세계여성의날을 맞아 학생들이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스쿨미투 성폭력의 역사를 끝내자’ 캠페인 계획을 밝히고 있다. 강윤중 기자

10세 아동에게 술을 먹인 뒤 성폭행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은 성인 남성이 항소심에서 징역 3년으로 감형받아 논란이 됐다. 24일 경향신문이 1·2심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폭행·협박’을 당했다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에 대해 상반된 판단이 내려진 것으로 확인됐다. 강간죄 성립요건을 폭넓게 정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 “때리거나 협박은 안 했어요”

“그냥 누르기만 한 거야?” 경찰 질문에 끄덕인 아이

보습학원 원장인 이모씨(35)는 지난해 4월24일 한 채팅 애플리케이션(앱)에서 알게 된 ㄱ양을 집으로 데려가 소주 2잔을 마시도록 권했다. 이씨는 술에 취한 ㄱ양이 침대에 눕자 강제로 옷을 벗기고, 손으로 ㄱ양 양손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누른 후 성폭행했다. ㄱ양은 사건 발생 2주 후 해바라기센터에서 조사받았다. 이때 녹화된 영상이 유일한 직접 증거다. ㄱ양은 당시 “(이씨가) 뭐 때리거나 협박은 한 적 없어”라는 여성 경찰관 질문에 “때리거나 협박은 안 했어요”라고 답했다. 경찰이 “(이씨가) 그냥 누르기만 한 거야”라고 묻자 ㄱ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폭행·협박 여부에 대한 ㄱ양 진술은 이것이 전부다. 당시 ㄱ양의 영상 진술을 분석한 아동 진술 전문가에 따르면, ㄱ양은 조사자에 대한 신뢰를 형성하지 못해 피해사실 진술을 장시간 거부했다고 한다.

1심 “반항하기 현저하게 곤란” 2심 “폭행·협박 인정하기 부족”

1심인 인천지법 형사13부(재판장 송승훈 부장판사)는 “피해자는 피고인이 자신을 직접적으로 폭행·협박한 사실은 없다고 답하는 등 존재하지 않는 사실에 대해 솔직하게 답하기도 했다”며 “피해자가 이 사건 범행에 관해 허위 사실을 꾸며내 진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때리거나 협박은 안 했어요”라는 답이 오히려 ㄱ양의 진술 신빙성을 높인 것이다.

“그냥 누르기만 한 거야”라는 질문에 ㄱ양이 고개를 끄덕인 점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피해자의 나이, 피해자가 당시 처했던 구체적 상황 등에 비춰볼 때 피고인이 피해자의 몸을 누른 것은 강간의 수단으로서 피해자의 반항을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인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고 했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어리고 성경험이 없어 제대로 된 반항을 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는 점, 피고인 스스로도 피해자가 자신을 밀어내거나 옷을 벗기는 것을 거부했다고 진술한 점 등도 감안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사력을 다하여 반항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가해자의 폭행·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 이르지 않았다고 섣불리 단정해선 안된다”는 2005년 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들었다.

반면 항소심인 서울고법 형사9부(재판장 한규현 부장판사)는 피해자가 피고인으로부터 직접적으로 폭행·협박을 당한 사실은 없다는 취지로 진술했고, 질문에 끄덕인 것 정도로는 현저히 곤란한 정도의 ‘폭행·협박’이라고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판단해, ‘미성년자의제강간죄’를 적용했다.

이와 유사한 아동 성범죄 사건에서 ‘폭행·협박’의 기준을 낮춰 판단한 판례도 적지 않다. 춘천지법 영월지원 형사1부(재판장 김문성 지원장)는 2017년 8세 아동을 강간하려다 미수에 그친 혐의(13세 미만 미성년자 강간미수)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당시 피해자는 피고인이 피해자의 어깨 쪽에 양손을 받치고 피해자 위로 엎드린 자세로 성폭행을 시도했다고 진술했다.

재판부는 “피해자는 당시 만 8세에 불과한 어린 여자아이로, 건장한 체격의 피고인이 일방적으로 피해자의 몸 위에 올라타는 형태로 성행위를 시도했다면 그러한 물리적 행위 자체로 피해자의 항거가 현저히 곤란해진다고 할 수 있다”며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을 하였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판단했다.

■ 너무 엄격한 강간죄 성립 기준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필사적 저항’이 입증되지 않으면 강간죄가 성립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강간죄의 구성 요소인 폭행·협박을 매우 좁게 해석하는 ‘최협의설’이 30년 이상 지속돼 왔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1992년 “간음 당시 폭행이나 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까지 이른 것이라고 보기는 미흡하다”며 강간치상죄를 유죄로 판단한 원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피고인은 ‘소리 지르면 칼을 가져와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한 뒤 피해자를 성폭행했으나, 재판부는 사건 당시 피고인과 피해자 사이에 오고 간 대화를 보면 피해자가 항거불능의 상태에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이 같은 판단을 내렸다.

‘최협의설’ 때문에 폭행이나 협박 없이 이뤄지는 강간을 포괄하지 못하는 ‘처벌 공백’이 생긴다는 비판이 이어지자, 최근 동의 없는 성관계를 처벌하는 ‘비동의 간음죄’를 신설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른바 ‘노 민스 노 룰(No means no rule)’이라고 하는 비동의 간음죄는 폭행·협박 여부가 아닌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성폭력을 처벌해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이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도 지난해 ‘피해자의 자발적 동의’를 기준으로 강간죄를 정의해야 한다고 한국에 권고한 바 있다.

‘미성년자의제강간죄’의 형량이 낮다는 지적도 나온다. 보습학원 원장의 성폭행 사건에서 항소심 재판부는 이씨가 범죄 전력이 없는 초범이라는 이유를 감안해 3년형을 선고했다. 13세 미만 의제강간의 양형기준상 기본 형량은 2년6월~5년형이다. 양형기준상 가장 낮은 형을 적용한 것이다. 대법원 양형위원회 통계를 보면, 폭행·협박이 구성요건인 13세 미만 강간죄는 2017년 평균 형량이 징역 10년이었지만, 폭행·협박이 없는 13세 미만 의제강간죄는 약 2년11월이었다.

13세 미만 의제강간죄 형량 “2년6월~5년 너무 낮다” 비판

천정아 변호사(법무법인 소헌)는 “13세 미만 강간죄의 경우 2010년에 성폭력처벌법이 제정되면서 만들어진 법이고, 13세 미만 의제강간죄의 경우 1959년 형법이 만들어질 당시 일본 형법을 베낀 법”이라며 “아동 성범죄 형량 문제가 계속해서 논란이 됐지만 법개정 문제를 신경 쓰지 않으면서 이런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13세 미만 의제강간죄의 연령을 높이는 문제도 중요하다. 서혜진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16세를 기준으로 의제강간죄를 적용하는데, 한국은 13세로 낮은 편”이라면서 “이번에 연령과 형량을 높여 아동을 성폭력 범죄로부터 보호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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