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 치노와 암사슴 보르테 이야길 들려줄까"

[연재] 소설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 피다' 푸른 늑대의 후손(3-3)

이슬비 | 기사입력 2017/03/07 [10:20]

"늑대 치노와 암사슴 보르테 이야길 들려줄까"

[연재] 소설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 피다' 푸른 늑대의 후손(3-3)

이슬비 | 입력 : 2017/03/07 [10:20]

제3장 푸른 늑대의 후손(3)

 

[지난글에 이어서]

한동안 눈을 깜빡여 눈물을 달래고서야 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흔의 손목을 감싸 잡았다. 부드럽지만 한없이 차가운 그 손에는 어딘지 모르게 강한 힘이 들어가 있어, 유흔은 그가 이끄는 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그에게 이끌려 간 곳은 다름 아닌, 가라고루의 외곽에 위치해 있는 작은 인쇄소였다. 부상국에서 벽란과 더불어 유일하게 알파벳으로 된 책을 인쇄하는 그곳에는 유흔이 생전 처음 보는 물건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유흔은 그 중, 손톱만큼이나 작고 각진, 쇠로 된 상자들을 바라보았다. 상자 위에는 저마다 다른, 깨알 같은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는 그것이 바로 책을 인쇄할 때 쓰는 활자이며, 본래, 중원에서 처음 발명된 것이 회회 상인들을 통해 서양에 전해져 널리 쓰이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유흔은 서란이 , , , 네 글자를 익히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마 서란이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에는 부상국 내에 인쇄소도 더욱 늘어나고, 새로운 활자들도 개발되고, 알파벳뿐만 아니라 가림토 문자와 한자로 된 책들 또한 인쇄될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서란이 열여섯이 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그 모든 일들이 가능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다가올 인쇄의 시대를 위해서라도 서란은 가림토 문자와 한자를 완벽히 익혀, 인쇄라는 새로운 방식에 적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 서란은 이제 백수문을 완벽히 읽고 쓸 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백수문의 천 가지 글자 하나하나에 담긴 뜻과 숨은 의미조차 완벽히 이해할 줄 알게 되었다. 유흔은 그런 서란을 나름의 방법으로 시험해보았고, 서란은 유흔의 시험을 무난히 통과해 이제 소학(小 學)을 익힐 차례가 되었음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유흔은 서란을 데리고 저잣거리 서가에 나가 소학을 한 권 사왔다. 평소에도 유흔을 자주 보는 책방 주인이 서란의 영리함을 칭찬하며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손을 거두었다.
 
, 한씨가의 아가씨이시지요. 소인이 그만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아가씨와 제 여식(女 息)의 나이가 같아 그만…….”
?”
어찌되었든 용서해주십시오, 아가씨.”
 
거듭거듭 허리를 숙여가며 사죄하던 책방 주인이 이제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서란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유흔의 옷자락 뒤로 숨었다.
 
유흔…….”
서란.”
?”
이럴 때는 그냥 되었다. 무어 이런 사소한 일을 가지고 수선을 떠느냐. 되었으니 이제 그만 일어나거라.’라고 하면 돼. 알겠지?”
 
유흔은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은 서란의 손을 떼어내었다. 서란은 머뭇머뭇 책방 주인의 앞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었다. 무어…… 이런 사소한 일을 가지고…… 수선을 떠느냐. 되었으니…… 이제 그만 일어나거라.”
 
한씨가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유흔은 자신의 처소 한 켠에 있는 정자로 서란을 데리고 갔다. 평소처럼 비단을 깐 탁자 앞에 마주앉는 대신, 유흔은 정자의 바닥에 대나무 돗자리를 깔고 누웠고, 서란은 유흔의 옆에 앉아 새로 산 소학의 표지를 만지작거렸다.
 
베고 누워.”
 
유흔의 말과 동시에, 돗자리에 앉은 유흔의 허벅지 위로 서란의 머리가 내려앉았다. 유흔은 서란의 가슴을 토닥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 화야, 가림토 문자도, 백수문도 다 잘 익혔어. 훌륭해. 이제 소학을 익히면 저 멀리, 사비국의 기준으로는 여자들이 할 수 있는 공부는 다 한 게 되는 거야. 좋지?”
우와, 정말?”
하지만 여기는 부상국이니까 앞으로도 우리 화야는 공부를 많이 해야 해. 그래서 이제부터 나는 우리 화야가 소학을 떼고, 명심보감(明 心 寶 鑑)을 떼고, 또 다른 서책들을 뗄 떼마다 상으로 이야기 하나씩을 들려줄 거야. 어때, 좋지?”
응응!”
, 그러면 우리 화야가 오늘, 백수문을 다 뗐으니까 내가 이야기 하나를 들려줄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을까? …… …… ! 푸른 늑대 치노와 하얀 암사슴 보르테의 이야기를 들려줄까?”
응응!”
 
유흔은 서란의 가슴을 토닥이며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서란은 어느새 이야기에 빠져든 것인지 두 눈을 감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색색거리는 숨을 고르게 내쉬고 있었다.
 
우리는 키야트 아이누의 후손이다.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카무이 신이 만든 세상에 인간들이 번성하기 시작할 무렵, 카무이 신의 딸과 아들인 달의 여신 레이나와 해의 신 사라타는 이 땅 위에서 자신들의 자손들이 번성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하여 두 신들은 서로를 유혹하여 사흘 밤 사흘 낮을 관계하였고, 아홉 달이 지나 달의 여신 레아나는 푸른 수컷 늑대와 하얀 암사슴을 낳았다. 그때, 달의 여신 레아나와 해의 신 사라타, 두 신이 세상을 굽어보니 세상의 서쪽에 천산이라는 높은 산이 있어…….”

[다음글에 계속]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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