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남 부친 친일반민족자 신상묵은 누구?

"자식이 부모에 효도하는 것 같이 폐하의 군인이 되어야 한다"며 일제헌병에 지원한 자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6/02/15 [10:12]

신기남 부친 친일반민족자 신상묵은 누구?

"자식이 부모에 효도하는 것 같이 폐하의 군인이 되어야 한다"며 일제헌병에 지원한 자

서울의소리 | 입력 : 2016/02/15 [10:12]
[서울의소리 기사입력 2015/08/18] 광복 7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친일파들이 떵떵거리며 활개를 치는 오늘날, 대구사범 졸업 후 "자식이 부모에 효도하는 것 같이 폐하의 군인이 되어야 한다"며 일제 헌병에 지원해 악질 고문자로 악명을 날렸던 신상묵이 착한 친일?을 했다는 어이없는 강변이 나와 논란이 일 것으로 예상된다.
참조기사 -  악질고문 친일헌병 신상묵,박종표...광복70년 잊지 말아야 할 이름  
                  ‘부친 친일’로 당 대표 물러났던 신기남의 심경 “김무성은…”
 
2015년 8월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11년 전인 2004년 꼭 8,15 때 무렵 아버지 되는 신상묵이 친일 논란에 휩싸이자 열린우리당 의장직을 사퇴한 신기남 의원이 일제 시대 때 악질 일본 헌병으로서 고문을 한 아비에 대해 구차한 변병을 하고 나섰다.
 

고문으로 여러 사람을 죽인 악질 친일파 헌병 신상묵
 신기남은 "동아일보가 보도한 아버지로부터 고문을 당했다는 분들을 찾아봤다. 김 선생님, 차 선생님 두 분이었는데, 두 분 다 아버지를 알긴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고문 같은 걸 받은 적은 없다고 하셨다. 왜 그런 보도가 나갔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더라. 오히려 그때 아버지가 수감돼 있는 두 분에게 빵을 사주는 등 따뜻하게 대해주셨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그는 “2001년 4월 국회대정부 질문에서 ‘친일잔재청산특별법’ 제정을 제안했다. 그때는 아버지가 친일 논란에 휘말려들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친일잔재 청산에 앞장서는 나를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과연 어떤 심정일까 생각해봤다. 애비 속도 모른다고 답답해 하셨을까, 아니면 당신이 못해낸 일을 하고 있다며 박수를 보내셨을까. 나는 후자일 것이라고 믿고 싶다"며 악질 친일파 아비에 대해 강변했다.

신기남은 박정희와 친분이 두터웠다는 아버지에 대해 “두 분이 대구사범 동창으로 각별한 사이셨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결혼 때 아버지가 청첩인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정도다. 아버지가 춘천에서 강원도 경찰국장으로 있을 때는 박정희 대통령이 춘천에서 사단장 생활을 할 때라 두 분이 자주 어울리셨다고 한다. 두 분 모두 밤늦도록 술 드시기를 좋아해 부인들 고충이 컸다고 한다.”고 이를 자랑스럽게 소개하기도 하였다.
 
신기남은 “어머니한테 들은 얘기인데,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 뒤 자신의 차로 직속 부관을 우리 집에 보내 쪽지를 전달했다. 상묵아! 혁명은 성공했다. 내게 와서 도와다오. 함께 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무인에게 반역은 없다. 당장 민정이양하고 물러나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며 또 다시 악질 일제 헌병 기회주의자 아비를 의로운 사람인양 미화했다.
 
신기남이 옹호하러 드는 아비 신상묵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자식이 부모에 효도하는 것 같이 폐하의 군인 돼야”
 
신상묵은 1916년 8월 13일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다. 1938년 박정희가 졸업한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6월부터 전라남도 화순군 청풍심상소학교에서 근무했다. 1940년 8월 일본군에 자원하여 육군특별지원병 제1기생으로 훈련을 받던 중 1940년 11월 친일신문인 <매일신보>가 주최한 지원병좌담회에 참석했고, 잡지 <삼천리>에 ‘지원병 일기’를 기고했다. 그 내용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선생 노릇을 하다가 지원병이 된 것을 무슨 출세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물은 얕은데로 흐르며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같이 일본 남자인 우리들이 폐하(일본 왕)의 군인이 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중략)..참으로 황국신민이 될 생각이 있거든 그리고 내선일체를 실행하려고 생각하거든 이 훈련소로 오시오.”
 
이후 신상묵은 헌병 오장(하사급)을 거쳐 1944년에는 조선인 최초로 헌병 군조(중사급)에 이르렀다. 창씨개명 이름은 ‘시게미쓰 구니오(重光國雄)’다.
 
박종표는 1921년 부산 초량동 출신으로 동래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넘어가 동경고등학원과 동경 삼기영어학교에서 고등과에서 공부를 했다. 1942년 11월에 일본어 신문인 釜山日報(부산일보)에 기자로 일했다.
 
1944년 2월 헌병 보조원에 지원, 3개월 간 훈련을 받은 뒤 1944년 5월 1일 대구헌병대에서 헌병 보조원으로 일했다. 10월 1일 부산헌병대로 오면서 신상묵을 만나 항일 인사를 모질게 고문했다. 그의 창씨개명 이름은 ‘아라이 겐기치(新井源吉)’로 당시 ‘아라이 헌병보’로 악명이 높았다. 해방 당시 그는 이등 헌병보(병장급)였다.
 
2. 그들은 어떻게 고문했나?
 
반민특위가 없었다면 이들이 저지른 악행은 영원히 묻혀졌을 가능성이 크다. 1949년 3월 반민특위에 박종표가 체포되면서 악행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반민특위 조사기록 등으로 알려진 이 두 사람이 저지른 고문사건은 다음과 같다.
 
-학인동우회 사건으로 김주석 등 고문.
-정장호 고문 후 병사 사건.
-황학명 사건. 황학명 외 9명 고문.
-부산세무과직원사건. 4명 고문, 2명 사망.
-부산부두 미곡사건. 2명 체포 고문.
-양태의 사건. 2명 체포 고문.
-김상수 사건. 4명 체포 고문.
-김영민 사건. 3명 체포 고문.
-손유호 외 1명 체포 고문 사건.
-부산학생 사건. 8명 체포, 그 가운데 3명 고문.
-무궁당 사건. 20명 체포 고문, 주도자 김한경 고문 후 병사.
 
주로 신상묵이 고문을 총괄하면서 박종표가 주동이 돼 고문을 실행하는 식으로 두 사람은 손발을 맞춰나갔다. 두 사람이 고문한 사건 가운데 비중이 높은 사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학인동우회 사건: 김주석 씨 등 16~17세 학생들이 학교 내 조선인 학생에 대한 차별에 분개해 파견 나온 일본군 헌병을 집단 구타하고, 학생 8명과 함께 ‘항일자금 조달, 조선어 보급, 문맹퇴치, (친일)요인암살’ 등을 목표로 학인동우회를 만들었다. 회원 이춘삼이 1944년 1월 체포되면서 조직이 드러났고, 1944년 2월 조직원들이 체포 돼 진해헌병대로 끌려와 신상묵과 박종표에게 숱한 고문을 당했다.
 
-황학명 사건: 당시 중경임시정부를 돕기 위해 황학명, 이창석, 신동균, 추교덕, 조영관, 박용달 등이 벌인 다양한 활동을 말한다. 이들은 만주 북평탄광 폭파사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고, 제주도 일본군 무전대에 근무 중인 황학명은 독립운동가들의 방송과 연합군의 전황을 국내에 흘려 동지들을 규합해 중경임시정부와 합류하려 했으나 일본 헌병대에 발각됐다.
 
-부산세무과직원사건: 1945년 일본에서 유학한 김대근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조직을 결성하고, 유언비어를 흘렸다는 혐의로 4명을 체포해 2명을 고문치사케 한 사건이다.
-부산학생사건: 1945년 3월 초순 부산공업학교 학생 130명이 일본군 병장기 관리회사인 조선제강회사에서 강제로 노동하던 중 공장 측의 차별대우에 못 이겨 학생들이 파업을 단행, 주도 학생들이 체포되고 악독한 고문을 당했다.
 
-무궁당 사건: 평소 반일감정이 높던 김한경은 조선은행에서 근무하면서 신문사 기자, 교사, 회사원, 대학생 등을 끌어들여 무궁당이라는 항일단체를 결성했다. 그러나 1945년 6월 신상묵 등에게 발각되고 20여 명이 체포 돼 고문을 받고 다수가 기소됐다. 김한경은 고문을 받고 난 뒤 사망했다.
▲ 반민특위 박종표 관련 진술서./출처: 정운현, 보림재 http://blog.ohmynews.com/jeongwh59
 
피해자들이 진술한 고문 방법은 잔혹하면서도 다양했다. 체포되면 ‘기본’으로 손가락 고문, 곤봉, 목검, 군홧발로 난타당하고 유도기술로 피해자들을 수십 차례 집어 던져 혼을 빼 놓는다. 이후 식도에 호스를 꼽고 물을 강제로 먹인 뒤 배를 눌러 토하게 하는 고문, 욕조를 물에 채워 완전히 얼린 다음 그곳에 사람 하나 앉을 공간을 파서 피해자를 앉혀 놓은 뒤 얼음물을 계속 끼얹고 난 후 피해자가 실신하면 부채질을 해 깨운 다음 다시 얼음물을 퍼붓는 방식을 자주 썼다.
 
고문이 심해지면 불에 달군 화로를 얹어 놓거나, 불로 살을 찢는 방법, 손발을 모아 결박한 후 허공에 매달아 놓고 폭행하는 방법(비행기식 고문), 전기고문, 피해자를 결박한 후 깊은 물에 완전히 담궜다가 꺼내는 방법, 관 속에 피해자를 넣어 놓고 관에 물을 주입해 피해자를 죽음 직전까지 가도록 하는 방법, 맹견이 있는 방에 밀어 넣어 맹견이 사람을 물어뜯도록 하는 방법 등을 썼다.
 

“어린 학생도 무자비하게 고문”
 
신상묵과 박종표는 어린 학생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김주석(당시 17세)를 고문할 때는 숱한 폭행과 손가락 고문에 이어, 관 속에 넣어 물을 주입하는 고문을 썼다. 이어 고문으로 죽은 여러 사람들의 사진을 보여 주며 ‘너도 이렇게 한다’고 협박했다. 부산학생사건으로 체포된 황석고(당시 19세)는 폭행을 당한 이후, 수도호스로 물을 먹이는 고문, 코에 물을 부어 숨을 쉬지 못하도록 하는 고문 등을 당했다. 이런 고문을 4~5일 동안 매일 당했다.
 
고문으로 죽은 사람의 모습은 어땠을까? 반민특위 조사기록에서는 부산세무과직원사건에 연루 돼 죽은 김대근이 당한 고문과 죽음과정이 자세하게 드러나있다. 당시 부산세무과 동료인 신남철이 참고인으로 불려가 고문을 받고 헌병대 유치장에 김대근과 하루 머물렀다.
 
신남철은 “김대근은 고문의 흔적이 역력했고, 내가 ‘어떻냐’고 물으니 김대근은 ‘나는 곧 죽겠다’고 답했습니다. 양팔을 보이는데 불로 지져 찢져 있었고, 수건으로 입을 가렸는데 입이 온통 피투성이가 돼 있었습니다”고 진술했다.
 
이후 그는 며칠 동안 고문당하면서 김대근이 고문당하는 모습을 간간이 보았다. 김대근은 죽음 직전에서 수 차례 의사를 불러달라고 간청했으나 헌병은 이를 무시하였고, 김대근은 애통한 목소리로 헌병에게 우유를 달라고 한 것이 신남철이 본 김대근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김대근 사망 전후로 숙모 뻘인 손경연이 김대근을 보살폈다. 손경연은 “반쯤 죽은 상태에서 사람 모양 같지 않았고 전신이 피투성이에 붕대덩어리가 돼 있었습니다. 김대근은 자신을 감시하는 헌병에게 ‘살려주시오’라는 말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사망 후 전신을 감싼 붕대를 풀어보니 몸이 흑색에 가깝게 돼 있었고, 불로 찢은 상처가 허다하고 혈관이 파열이 된 곳은 (박종표 등이)탈지면으로 막아두었습니다”고 진술했다.
 
김대근이 부산병원에서 죽자, 박종표 등은 허위진단서를 꾸며 사건을 조작했다. 이후 반민특위에서 박종표는 ‘(김대근의 사망 원인에 대해) 급성폐렴이 온 듯 하다’고 둘러댔다.
 
고문에는 교묘한 심리전도 활용됐다. 부산학생사건 피해자인 황석고를 고문하면서 헌병 보조원인 김유근이 ‘나는 너의 선배(부산상고)로서 더욱 조선사람의 설움을 잘 안다. 우리가 조국광복을 다 같이 원하는 바이다. 그 포부를 기탄없이 토로하라’고 설득하자 황석고는 이것이 함정인 줄 모르고 속내를 진술했다가 더욱 큰 고문을 당했다. 다른 사람이 고문당하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고문 당해 죽은 시신을 보여주면서 협박하기도 했다.
 
한편, 부산헌병대 헌병 보조원 가운데에는 박정도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중국어 통역을 담당했고, 중국인을 고문했다. 중국인을 고문할 때 칼로 근육을 도려내는 참혹한 수법을 쓰기도 했다.
 
고문은 진술을 받아내기 위함이 대부분이지만, 정보원을 확보하기 위해 고문을 활용하기도 했다. 1945년 6월 15일 오후 2시경 손유호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그때 박종표와 일본 헌병이 그를 체포해 헌병대로 연행했다. 체포이유는 ‘전쟁 시기에 영화나 보면서 전쟁에 협력하지 않는다’는 황당한 이유였다.
 
이후 박종표는 손유호를 수없이 구타하고, 맹견이 있는 방에 밀어 넣고 맹견에 물어 뜯기게 했다. 그런 다음 박종표는 “우리는 다 같이 반도인으로서 황국신민이다. 국가의 안위를 결정하는 이 성전(전쟁)에 협력을 해야 한다. 너는 희생적으로 우리에게 협력하여 밀정노릇을 해달라”고 강요했다
 
1945년 6월 박종표는 정장호의 집에 다짜고짜 쳐들어가 5일 동안 모질게 고문했다. 박종표는 그가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정장호를 헌병대 뒷담으로 밀어 던져 놓고 ‘정장호가 탈옥했다’고 보고했다. 정장호는 자기 집에 들어서자마자 피를 토하고 죽었다.
 
3. 처벌이 아니라 출세…3.15의거 때 김주열 시신유기
 
신상묵과 박종표의 고문과 악행은 해방 직전까지도 이어졌다. 해방이 되자 처벌은커녕 신상묵은 되레 출세길을 내달렸다. 신상묵은 1946년 7월 경찰에 입문했고, 9월 전라남도 진도경찰서장을 시작으로 1950년 5월 전라남도 경찰학교 교장이 됐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낙동강 월배지구 경찰전투대 사령관을 맡았고, 1950년 총경으로 승진해 경상북도 영일경찰서장, 9월 경상북도 보안과장을 지냈다. 1951년 7월 경무관으로 승진한 신상묵은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과 1952년 10월 서남지구 치안국 전방사령부 사령관을 지냈다. 1953년 4월 전라북도 경찰국장(전북 경찰청장 격), 1953년 12월에는 서남지구 전투사령관 등 요직을 거치다 1959년 4월 경찰에서 퇴직했다. 퇴직 후에는 전라북도 산업국장으로 일했고, 후에 서남흥업이라는 기업의 고문으로 있었다.
 
신상묵은 친일, 고문 행위에 대해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심지어 이와 관련해 재판을 받거나 진술을 하는 일도 전혀 없었다. 그는 전혀 다른 일로 재판정에 올랐다. 1960년 초, 지리산에 무분별한 벌목과 벌목허가가 남발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지리산은 빠르게 황폐화되고 있었다.
 
1964년 11월 박정희는 불법 벌목자들을 처벌하라고 직접 지시했다. 이에 경남과 남원에 수사본부가 설치되고, 서남흥업 주요 인사 14명이 구속됐다. 이 중에 신상묵도 있었다. 그러나 1965년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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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도벌 사건 배후로 지목된 신상묵 관련 기사./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동아일보 1964년 12월 22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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