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망증 정치’ 통렬히 꾸짖는 역사연극

[대학로] 극단 '집현'의 정치역사극 ‘운현궁에 노을지다’를 보고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14/04/06 [01:59]

‘섬망증 정치’ 통렬히 꾸짖는 역사연극

[대학로] 극단 '집현'의 정치역사극 ‘운현궁에 노을지다’를 보고

최방식 기자 | 입력 : 2014/04/06 [01:59]
서구열강과 그들을 등에 업은 ‘탈아입구’ 세력의 각축장이 됐던 조선, 그리고 구한말 대한제국. 개방을 개혁으로, 쇄국을 보수로 자리매김했던 시절, 봉건국가의 마지막 운명을 결정했던 권력다툼을 그린 정치역사극 한 편이 대학로 무대에 올랐다.

간도 쓸개도 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고 사대주의에 빠진 정치세력에게는 ‘자존’을, 진보를 꿈꾸며 자기폐쇄로 나가는 이들에게는 ‘개방’을, 권력의 단맛과 탐욕에 눈이 먼 이들에게는 ‘초심’을 일깨우는 정치극이라고나 할까.

극의 기조는 의도된 양비양시. 연출은 끝까지 속셈을 드러내지 않는다. 개혁이든 보수든, 자신을 되돌아보고 역지사지하라는 듯. 정쟁거리만 내던진다. 그래서 흥미보다는 정치논쟁과 그 시시비비로 조금은 불편한 관람석. 말의 성찬, 작가의 관록이 배어난다.
 
▲ 연극 '운현궁에 노을지다' 출연자들.     © 최방식 기자

 
가을 서릿발의 매서움으로 객석을 압도하는 흥선대원군(김학재)의 열연. 또 다른 흥선대원군(자아)으로 상처치유용 ‘금과옥조’를 쏟아내는 사내(조원희), 추상같은 시아버지에 결코 밀리지 않는 중전 민씨(또는 명성황후, 유지수)의 연기, 볼만하다.

조선말 흥선대원군의 삶 다룬 정치극

집현(김태수레퍼토리와 극단 KOTTI·후플러스 공동제작)이 4일부터 6월 1일까지 매일 저녁 7시 30분(토요일 오후 3시 및 7시 30분, 일요일은 오후 3시) 서울 대학로에 있는 알과핵극장에서 ‘운현궁에 노을지다’를 공연한다.

연극은 조선의 25대 임금 철종의 ‘붕어’ 소식을 알리며 시작한다. 24대 ‘헌종’의 어머니인 조대비가 영조의 현손인 남연군(南延君)의 손자 고종을 간택했고, 그의 아버지 흥선군을 국태공에 봉해 섭정케 하며 극이 전개된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에 지친 조대비. 외척의 횡포를 막으려고 선택한 고종(막후 흥선군)과 중전 민씨. 그렇게 ‘파락호’에서 하루아침에 국태공으로 등장한 흥선대원군. 어린 고종을 앞에 앉혀놓고 섭정을 벌이는데, 아들에게 넘겨줄 ‘멋진 왕국’ 만들기가 시작된다.

▲ 중전 민씨와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갈등은 깊어가고...     © 최방식 기자


안동김씨 외척세력의 억측과 쑥덕공론을 잠재우며 등장한 대원군. 왕의 목줄기를 틀어쥐고 시작한 권력은 차갑다. 삼정문란을 잠재우려는 조세개혁(양반에게도 과세), 붕당을 깨려는 서원철폐, 서양문물을 배척하는 척화양이, 그리고 왕권 강화까지. 거침없다.

섭정 10년은 외척세력의 수족을 잘라내고 왕실과 백성에게 잠시 위안이 되나 싶었으나 근본이 되지는 못했다. 왕권강화를 위해 더 큰 세금을 내고, 친청·친일파 활거는 묵인한 채 ‘양이’만 배척하는 모순, 그리고 마침내 시부의 머리 꼭대기까지 오른 중전 민씨 앞에 찢기고 부서지고...

'노안당 정치'는 애초부터 시한부였다

운현궁 노안당 정치는 애초부터 시한부였다. 코흘리개 임금을 대신할 때는 그럴듯해 보였지만, 약관의 임금과 중전에게 마냥 꼭두각시 노릇을 강요하기에는 무리. 계속 커가는 친청·친일세력과 밀려오는 서양문화도 빗장만 걸어 잠근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바보’ 소리가 창피해 친권을 행사하려는 고종. 무능한 남편을 대신해 시아버지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중전 민씨. 이 둘과의 갈등은 주인공 흥선대원군이 아직 못다 이룬 섭정의 꿈을 지속하는데 결정적 걸림돌. 어쩌랴. 권불십년이라지 하지 않던가.

그가 양주의 산장에 사실상 유폐되며 극은 재미를 더한다. 그 나머지는 대부분 역사로 알고 있는 사실이니, 극적 효과를 기대하기는 무리. 권력을 잃은 대원군. 며느리 때문이라며 울화통을 참지 못해 몸과 마음을 상해가는 그에게 찾아온 섬망증(환각).

▲ 섭정은 끝나고 위협세력은 커가는데, 힘을 잃고 아파하는 흥선대원군.     © 최방식 기자


환각으로 만나는 저승사자들. 때맞춰 나타나는 정체불명의 사내. 그들과 난장을 벌이는 장면에서 작가와 연출은 준비한 메시지를 쏟아 놓는다. 왕국을 반석에 올려놓으려 애쓴 자신을 탐욕스런 섭정권자로 내모는 현실에 섭섭함. 그 근저에 자신과 아들을 이간질하는 중전이 있다는 인식.

작가가 끼어든다. 주인공의 생각 저편에 밀려나 있던 것들을 하나씩 끄집어 내어 조목조목 반격하는 정체불명의 사내를 투입한다. 자살하려던 대원군과 말씨름을 시킨다. 그러다 마침내 당도한 어느 절. 거기 주련(대웅전 등 기둥에 쓰인 글씨)의 문구는 작가가 던지는 경구.

기억상실과 환각 속에 찾아온 '초심' 

‘대해수 중음진 찰진심념가수지’(大海水 中飮盡 刹塵心念可數知). ‘큰 바닷물을 다 마실 수 있고, 이 세상 티끌 다 헤아려 그 수를 안다 해도...(부처님의 공덕은 말로 다 할 수 없으리)’라는 뜻. 작자 미상의 선시다. 북한산 문수사 같은 절에 가면 눈에 띄는.

그러니까, 정체불명의 사내는 대원군의 마음 속 한 구석에 웅크린 또 다른 그였다. 그 안에는 대원군이 생사의 갈림길에 찾아 나섰던 선승이 들어앉아 있고. 그 장소 ‘초심사’(절 이름)는 그에게 기슴 속 응어리를 털어내고 세상 속으로 발걸음을 되돌리게 하는 기제.

그러나 어쩌랴. 역사는 더 이상 창작을 허용하지 않으니. 그 이상 작가도 연출도 어쩔 도리가 없었으리니. 주인공은 임오군란·갑오경장 등 몇 차례 재집권 시도를 실패하고.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 손에 살해되고. 극은 마지막으로 치닫는다.
 
▲ 아버지 국태공과 아들 고종. '꼭두각시' 비판에 지친 아들의 홀로서기는...     © 최방식 기자



시아버지를 제치고 청·러와 손을 잡고 정국을 몰아간 중전 민씨. 그러면서 시아버지의 쇄국정치를 거칠게 비판하는 며느리. 그 며느리를 쫓아내려고 일본과 거래한 흥선대원군. 이들의 정치놀음은 조선의 마지막을 장식하니...

명성황후 살해 장면도 다뤘다. 스러져가며 시아버지를 원망하는 장면, 참 묘하다. 죽어가며 조선이 잘되기를 바라는 몇 마디를 내뱉지만, 부질없어 보인다. ‘안방 늙은이’로 전락한 주인공의 목소리는 가늘어 진다. 붉게 노을진 운현궁. 그 뒤로 짙게 드리운 조선의 검은 그림자. ‘조선이 붕어하셨다.’

시비 못가리면, 역사 속 사라지고 만다

정치역사극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조명이 나가고 잠시 찾아온 적막. 객석에 앉은 기자에게 찾아온 궁금증. 이 연극 왜 만들었지? 난 또 왜, 이 연극을 보러 온거야? 연출자가 언급했다는 에드워드 카의 인용구를 떠올렸다. '현재와 과거의 소통'.
 
세정문란은 그러니까 근로소득세를 늘리고 법인세를 낮추는 보수정권의 정책에 견줘보면 어떨까. 서원철폐는 1등만 인정하는 망국적 입시전쟁, 외척세력 배제는 여야 아님 보혁 정치의 실종, 척화양이는 미일에 기대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의존족과 비교해보고.
 
▲ 조선이 붕어하셨다. 조선아, 조선아~     © 최방식 기자

잡다한 생각과 기자의 억측, 당연히 무리겠지. 그렇게 연극이 끝나고, 배우들이 일제히 외치는 '조선아, 조선아' 통곡소리에 떠오른 장면은 자하(紫霞). 신들의 세상에 진다는 자줏빛 노을. 저승길에 들어선 노정객과 왕국. 공과를 따지는 게 부질없어 보인다.
 
하지만 태양은 다시 떠오르고, 역사는 계속된다. 그러니 작가와 연출, 그리고 배우들이 쏟아냈던 것들을 곱씹어야 한다. 갑론을박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운현궁에 진 노을은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 노을을 석연찮게 봐야 하는 이유다. 정치역사극을 재미있게 봐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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