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산 몽블랑, 그대 높은 바람의 꿈
스위스통신 포도주 익어가는 향긋한 마을 샤모니의 가을은...
프리다 | 입력 : 2007/10/14 [06:48]
프랑스 남부지방 포도 재배지는 와인이 익어가는 듯 향긋하다. 마을의 지붕 위에는 연기가 피어 오르고, 인적 드문 거리에 어쩌다 보이는 사람들은 가을 추수로 분주하다. 구불 구불 낭만이 흐르는 길을 돌고 또 돌고, 아름다운 크고 작은 산을 넘고 또 넘어 제1회 동계올림픽을 개최한 마을 샤모니에 도착했다.
샤모니의 주변 마을 식당과 호텔들은 가장 비수기에 속하는 가을을 맞아 모두 문들을 닫았다. 창 밖으로 하얀 눈이 덮인 몽블랑 꼭대기가 보이는, 지붕이 흙으로 된 통나무 집의 아늑한 숙소를 찾은 우리는 마냥 설레이기만 한다. 불타는 나무 향이 곱다. 따사롭고 아늑한 벽난로 옆에선 아이들이 장난을 치고 논다. 우린 주인장이 골라 준 일품 포도주를 마시며 다음 날 오를 산길을 그려본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 모습인가? 이렇게 조금씩 길을 열어가면 마음의 길도, 몸의 길도 어느 순간 가장 그리던 이의 가슴까지 이어지지 않을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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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블랑(Mont Blanc 4,807m). 이름 그대로 흰 산. 얼음과 구덩이로 만들어진 빙하의 경이로움은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충격적인 실체이다. 사람들의 입에서는 자연스레 빙하의 바다(Mer de glace)라는 말이 흘러나왔을 것이다. 빙하는 지구의 생명이다. 녹아 흘러서 온 산과 골짜기를 적시고 개천과 강을 이루어 인류를 적시고 바다에서 온갖 생명을 품도록까지 자연에 순응한다. 옛 선인들이 목숨을 바쳐 디뎌 보고자 했던 몽블랑을 지금은 케이블카를 타고 에귤 듀 미디(Aigulle du Midi 3,842m)까지 단숨에 올라올 수 있다. 몽블랑 봉우리 아래 펼쳐지는 거대한 결빙의 세계, 뜨겁게 비추는 태양의 이글거림도 아랑곳 없이 무한한 하늘의 에너지가 얼고 얼리는 빙하. 너무도 눈이 부셔 차라리 눈을 감아본다. 매서운 바람이 내 거친 숨소리도 함께 허공으로 휘몰아 간다. 흰 산, 그대는 멀고 높다. 높고 푸르고 힘차다. 그대에게 날아가고자 하는 꿈이 기어코 세찬 바람을 맞고 섰다. 그대의 흰 머리 꼭대기, 내가 오르고자 하는 것은 그대의 가슴뿐인지도. 그대 너머 허공인지도.
그대의 높은 바람은 차가운 결빙으로 침묵한다. 아,비정한 침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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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블랑 봉우리 (4807m). 우리가 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프리다 |
▲ 매서운 바람결 따라 움직이는 대지 ©프리다 |
18세기, 미지의 세계, 풀 한 포기 없이 만년설로 덮여 있는 알프스 산맥의 최고봉 몽블랑 주변 사람들은 흰 산 몽블랑을 저주받은 산이라고 불렀다.
1492년 스페인의 콜롬부스가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을 발견하고부터 신시대가 시작됐고, 때 맞춰 알프스의 높은 봉우리들도 하나씩 정복된다. 그러면서 산 아래 살고 있는 주민들의 산에 대한 두려움 사라지기 시작했다. 공상의 세계에서 실제 세계를 경험하겠다는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위험하고 추우며 수시로 무너지는 얼음 탑과 눈사태, 괴물과 용이 살고있는 저주받은 산,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오르지 않은 얼음과 눈으로만 쌓여있는 저 높은 곳 몽블랑의 정복은 1740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난 식물학자, 물리학자,지리학자였으며 이미 22세에 수학교수였던 소쉬르(Horace Benedict de Saussure)의 공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소쉬르는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알프스 산에 대한 사랑으로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 누군가 몽블랑의 정상을 정복하는 길을 개발하는 사람에게 후한 상금을 주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한다. 소쉬르의 공언이 해를 거듭하다 드디어 그의 열망에 희망을 주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 사람들이 바로 샤모니에 살고 있는 젊고 영리하며, 의욕적이고 푸른눈을 가진 29세의 의사 미셸 갸브리엘 파캬드(Michel Gabriel Paccard)와 사냥꾼이며 크리스탈 제조업자였던 쟉 발마(Jacpues Balmat) 두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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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 대한 선망은 그대의 높이가 아니라 넓이와 깊이이다. ©프리다 |
이 두 사람은 모두 몽블랑 주변을 많이 등반한 경험으로 그 산을 잘 알고 있었다. 후한 상금에 기대를 가지고 철저한 준비와 정찰을 마치고 드디어 1786년 정복의 첫걸음을 뗐다. 모든 사람들은 빙하에서 비박으로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 염려했지만, 그들은 보름달 아래 Cote산 정상에서 비박을 하고 새벽 4시 다시 출발해 아무도 밟아보지 못한 몽블랑 정상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오르기 시작했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한발을 내디딜 때마다 수없이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고 기압 측정을 위해 가지고 올라온 측정기는 보행을 불편스럽게 하였다. 형편없던 당시의 장비(쇠꼬챙이를 박은 나무지팡이)를 이용하여 바위와 빙하로만 이어진 Grand Pateau까지 갔다. 그곳으로부터 여러 개의 위험한 만년설 빙하를 통과하여 지칠대로 지친 몸과 설경의 자외선으로 탄 눈,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1786년 8월 8일 저녁 6시 30분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을 정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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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귤 듀 미디 (Aigulle du Midi 3,842m) ©프리다 |
▲Aigulle du Midi(3,842m) 암벽 등반하는 사람이 보인다. ©프리다 |
이 정복 다음 해인 1787년 평소 정상 정복의 꿈을 가졌던 48세인 소쉬르가 18명으로 된 몽블랑 탐험대를 조직하여 정상정복에 도전했고, 1787년 8월 3일 오전 11시 쯤 몽블랑 정상에 도착한다. 고산의 기온, 기압의 측정과 하늘색에 대한 관찰과 함께 지니고 간 권총을 발사해 음향의 변화까지 관찰하는 최초의 과학적 실험도 했다. 오늘날까지 이용되고 있는 그가 발명한 머리카락을 이용한 대기중의 습도를 재는 기구 등 그의 고집스런 자연과학 연구는 수많은 감동과 기록들로 후세에 남겨지게 된다. 고산에서는 섭씨 80도에서 물이 끓는 것과 불과 32미터의 오차를 남긴 몽블랑 정상의 고도 계산은 아직도 많은 과학자들에게 경이로운 기록으로 남아있다.
모니에 살며 농사를 짓던 마리아 파라디스가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1808년 몽블랑 정상에 발을 디디기도 했다. 그 후로도 수 많은 알피니스트들의 끊임없는 도전들이 알프스의 역사를 장식하고 있다.
하늘 자락 끌어안고 구름 덮고 누운 설원 새 한 마리 날아들어 구름자락 걷어내고
오래 전 떠난 이들 핏자국은 흔적 없고 그 영혼들 새가 되어 설국 위를 날아든다.
| 알프스 고산의 공기는 향기도, 색깔도 다르다. 맑은 공기, 차가운 바람이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늘 시간에 쫓겨 "빨리 빨리" 하는 것이 마음을 황폐시킨다는 것을 국화꽃 나이가 되어서야 공감하게 되었다. 다시 새롭게 들리는 바람소리와 마음 속에 자리한 작은 평화가 설산에도 길이 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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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솟은 알프스의 높은 봉우리는 구름도 넘어가기에 힘이 든다. ©프리다 |
▲샤모니의 숙소에서. 몽블랑의 맞은편 브레방 봉우리. ©프리다 |
▲흙으로 지붕을 덮고 그 위에 잔디를 가꾼 통나무집 샬레 ©프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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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사랑 2007/10/17 [13:43] 수정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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