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만여명 생명을 삼킨 나르기스의 분노

[버마여행④] 에야와디 삼각주 저지대·늪지 거주민들 고통과 기후변화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13/04/28 [14:05]

14만여명 생명을 삼킨 나르기스의 분노

[버마여행④] 에야와디 삼각주 저지대·늪지 거주민들 고통과 기후변화

최방식 기자 | 입력 : 2013/04/28 [14:05]
이라와디강 물살을 세차게 가르는 동력선. 아홉 명의 여행자가 에야와디 삼각주 탐험에 나섰습니다. 14만여의 목숨을 앗은 사이클론 나르기스. 그 연유를 알려고요. 배로 2시간여를 달려야 한답니다. 서두른 아침, 이어진 승선. 잔잔한 강물 위로 물살이 퍼져갑니다. 여행자들의 설렘과 떨림이 전해지는 듯.

양곤에서 남서쪽으로 5시간여 차를 달려 다다른 보글레이. 낯선 에야와디주의 한 포구 도시. 선잠에서 막 깬 여행자들. 술기운인지 여행통인지 까닭 모를 묵직한 머리. 아침밥을 어찌 밀어 넣었는지 모릅니다. 2백잣(?)의 커피와 홍차로 입을 가시자마자 배에 오른 것입니다.

선착장을 미끄러져 나온 동력선. 속력을 높이자 묵직한 폭발음이 귓전을 때립니다. 둘러보니 엇비슷한 동력선이 수십대. 이리저리 바쁘게 오갑니다. 200톤은 돼 보이는 큰 배도 눈에 띕니다. 사이로 수많은 노 젖는 배. 보글레이 어부들입니다. 동력선은 승객과 화물 수송용이고요.

10분여 달렸나요. 강 하구가 두 갈래로 갈라지며 끝없이 넓어집니다. 안다만 해역입니다. 배들은 강어귀를 따라 오가고, 넓은 강 한 가운데는 노 젖는 배만 띄엄띄엄 고즈넉합니다. 그물을 내려놓고 기다리는 것이죠. 낚시하는 강태공도 보입니다. 부부, 부자, 모녀. 협업노동자, 모두가 뱃사람입니다.

보글레이서 동력선 타고 3시간

까닭모를 눈물이 흐릅니다. 모든 것을 껴안는 어머니의 강. 생명과 외침, 성냄과 기다림, 아픔과 외로움, 그리고 즐거움까지 모두 다 보듬는 곳. 미동 않는 대지, 그 어진 것들이 내어 주는 걸 다 품어 안는 넓디넓은 생명의 근원.

▲ 에야와디 삼각주 저지대 늪지의 삶. 섬의 협곡 갯벌 속에서 마치 바다 게와 같이 살아갑니다.     © 최방식

▲ 안다만 해역 섬 곳곳에 사는 버마인들. 섬 사이사이 협곡 개울에서 세우와 게를 잡아 생계를 잇습니다.     © 최방식


강의 포옹은 그렇게 수많은 생명을 만들어 내고 키웁니다. 무섭고 맹렬하게 목숨을 거둬갔던 이라와디. 말없던 강이 이렇게 또 다른 뭇생명을 잉태하고 살아남은 자에게 선물을 건네는 것입니다. 칭얼대는 아이에게 모든 것을 주는 어머니처럼.

고요한 강이 전해 오는 떨림과 숨결. 그리움, 애타는 그리움. 한 줌 눈물 닦아낸 자리. 옥빛 물보라 넘어 긴 안도감에 휩싸입니다. 이어지는 흔들림. 아, 그 시원을 찾는 나그네. 이제 그 자유의 항해가 안다만 해역 한 귀퉁이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엔진소리가 잦아드나 싶더니 섬 속 협곡으로 접어듭니다. 사이사이 실개천이 뻗어 있는 데 쪽배들이 하나씩 박혀있습니다. 구석구석 섬 속 늪지 위에 집들이 있고요. 갯벌 사이 게들이 집을 짓고 사는 모습, 딱 그겁니다. 진흙 펄 사이 목욕을 즐기는 가족, 물고기를 잡는 이들, 그리고 뛰노는 동자승까지. 바다늪지 삶입니다. 꺾이고 베이고 파괴된 늪지 식생들. 침식으로 무너져 가는 집 둔덕. 군데군데 맹그로브 나무를 심어놓았습니다.

섬 협곡을 30여분 가로질렀나요. 다시 넓은 강물을 만났습니다. 1시간여를 더 가 마침내 당도한 어느 섬. 3시간 가까이 이어진 폭발음이 그칩니다. 귀에 남은 엔진소리에 여행자들은 잠시 멍합니다. 선착장에 내려서니 제인 차웅 지 마을이라는 팻말이 보입니다.

2008년 5월 어느 날. 3천여명이 살던 평화로운 마을. 5~6미터 높이의 집채만 한 너울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는 허망했습니다. 5백여명만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그 많은 생명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집들도 오간데 없고. 까닭모를 처참한 심판 앞에 망연자실.

생명을 낳고 거두는 이라와디강

지금은 1천4백여명(429가구)이 산다고 했습니다. 여행자들의 방문 소식에 섬의 온 마을 이장들 30여명이 회관에 모였습니다. 기후변화와 나르기스 피해 조사차 손님이 온다는 소식을 환경단체로부터 전해 듣고 기꺼이 응한 것입니다.

▲ 강 위에 집을 짓고 사는 버마인들. 남부 저지대 사람들 상당수가 이처럼 물 위에 거주합니다.     © 최방식

▲ 제인 차웅 지 마을의 여인들. 이 섬에 사는 여인 대부분이 나르기스 때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 최방식


되새기는 고통과 공포. 2.5미터나 높아진 바닷물에 너울파도 4.5미터까지. 7미터 높이의 쓰나미가 덮친 칠흑같이 깜깜한 밤. 무시무시한 불청객 앞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건장한 남자들만 야자나무나 대나무를 붙든 채 버텨냈고, 여성과 아이들은 모두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아수라장이 되고 난 뒤에야 알았다고요. 나르기스 상륙을 알리지 않은 군부정권이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이지요. 20~30년 전만해도 14만 에이커(1억7천만여평)였던 맹그로브 숲이 3만에이커로 줄며 쓰나미를 막지 못했다고. 뒤늦게 주민들에게 설명해줬다네요.

맹그로브 숲이 사라진 이유를 묻자, 생계난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집 짖고 농향습니다 때 맹그로브를 사용했답니다. 남은 것을 숯으로 구워 팔면서 수입이 늘었고요. 그 뒤 너나 할 것 없이 숯구이로 돈벌이를 했다는군요. 숲을 거의 다 파괴할 때까지.

나르기스 뒤 남은 이들은 거의 마을을 떴다고 했습니다. 에야와디 삼각주에서 150여만명의 환경난민이 생겼으니. 양곤 등 도시 주변의 빈민가로 이주했답니다. 공장이나 식당에 취업하려고요. 태국내(산악 국경지대 살라윈 강 주변) 버마 난민촌으로 간 이도 있고요.

지금 거주하는 대부분은 나르기스 뒤 이주해 온 이들이라고 합니다. 정부가 집과 음식을 장만해줘 그리했다고 하네요. 모인 이장들도 대부분 이주자들이라고. 애초 살던 곳이 불안하고 생계난이 심각해 지원이 조금이라도 많은 곳을 찾아 온 것이라네요.

5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계난이 심각하답니다. 농업은 바닷물 침식 뒤 복원이 안 된 상태고, 어업의 경우 나르기스 뒤 수위와 염도가 높아져 고기잡이가 형편없다고. 맹그로브 사라지며 서식 어종 역시 자취를 감추고 있다는 당국의 설명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7미터 너울파도 뒤 ‘망연자실’

나르기스 전 가구당 연 평균 수입은 70만잣(원환율 1대1 수준). 이젠 절반도 안되는 30만잣으로 줄었답니다. 가장 큰 타격은 농업. 농사가 잘 안 되는 것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건 우기가 아닌데도 비가 쏟아져 농사를 망쳐놓기 일쑤라고. 기후변화 때문이죠.

▲ 제인 차웅 지 섬마을 이장들. 여행자들의 기후변화와 나르기스 피해 조사 방문 소식에 30여명이 모였습니다.     © 최방식

▲ 에야와디주 저지대 섬 늪지 생태계. 웅덩이에는 물소들이 살고, 그 위에는 사람들이 삽니다.     © 최방식


3명의 가족을 둔 40대 초반의 한 이장은 혼자 일해 월 3천잣을 버는 게 고작이라고 했습니다. 지독한 생계난에 허덕이는 셈. 그 중 가장 나아 보이는 40대 후반의 한 이장은 5명의 가족이 월 8천잣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구호나 원조는 정부가 집짓고 먹을거리를 배급한 것 빼고, 유엔개발계획(UNDP)이 여성그룹에 제한적으로 저리 대출한 게 거의 전부. 이 섬에선 1백여명의 여성이 수혜자. 1인당 10만잣 정도. 25주만에 갚아야 하며, 2주에 한번씩 중도상환을 해야 한다고. 상환이 여의치 않다고 하네요. 4명이 보증을 서고 상환계획을 분명히 밝혀야 대출도 가능하고.

일거리가 없다보니, 구멍가게를 여는 이들이 는다고. 여럿이 하다 보니 시원찮지만. 집집이 닭 몇마리씩 키우지만 축산판매를 당국이 불허해 도움 되지 않는답니다. 과일을 키워 팔려해도 수질(염도 높아)이 안 좋아 잘 안된다고. 생계난의 가장 큰 타격은 자녀 교육. 섬에 초중교는 있지만, 상급학교는 보글레이로 보내야 한답니다. 돈이 없어 포기한다네요.

쓰나미가 다시 닥치면 어떡할 거냐고 물으니, “대책 없다”네요. 정부와 환경단체로부터 라디오·무전기·스피커 경보가 발령되면 대피하라는 교육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대피할 데가 없다고. 섬 내 37개 마을 중 3개 마을에만 3층 높이(30피트)의 대피소가 건립돼 있을 뿐이니까요.

맹그로브를 심어 숲을 다시 조성하는 건 어떠냐고 물으니, 말이 없습니다. 어떤 이는 이러네요. “심는 이는 심고, 자르는 이는 자르고 할 텐데...” 땔깜으로 베어 쓸 테고, 숯 만들기로 활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죠.

다시 쓰나미? “아무 대책 없죠”

‘가장 필요한 게 뭐냐’고 물으니 몇이 말을 잇습니다. 한 이장은 “나르기스 전 농사를 지을 때 100명이 함께 일할 정도로 잘 됐는데, 이젠 10명도 안된다”며 “옛날처럼 농사지을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다”고 넋두리를 늘어놨습니다. 또 다른 이장은 “어업도구를 지원해주면 괜찮겠다”고 해 논란을 불렀습니다. 어업(물고기 판매 등)권을 정부가 쥐고 있고, 이해관계가 얽혀 조정이 쉽지 않다네요. 어업권을 가져도 먹고살기가 힘들기는 마찬가지고.

▲ 모든 것을 껴안는 어머니의 강. 미동 않는 대지, 그들이 내어 주는 걸 다 품어 안는 넓디넓은 생명의 근원. 이라와디 강입니다.     ©최방식

▲ 메이마라 섬에서 새들을 지키며 사는 꼬마들. 여행자의 방문이 쑥스러운 모양입니다.     © 최방식


우 나잉 웬(섬 대표, 36·남)은 어떤 것이든 생계난 해소대책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오기출 푸른아시아 사무총장은 조사결과를 토대로 공동체사업을 벌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보겠다고 했죠. 돈벌이만 바라는 주민. 지속가능한 기후변화 저지사업을 원하는 NGO. 양측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궁금합니다.

간담회를 마치고 나오는 데 길옆에 커다란 현수막(그림)이 걸려있습니다. 나잉 웬의 설명을 듣고 알았습니다. 나르기스 오기 전 섬 전경과 휩쓸고 간 뒤 섬 모습을 담고 있었습니다. 아픈 과거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걸 보고, 이장들은 씁쓸한 표정을 짓습니다.

선착장 인근 한 음식점에서 점심을 했습니다. 여행자 아홉이 쌀밥에 나물 몇개와 닭과 돼지 볶음 요리를 시켜놓고서. 음식 값을 계산하는데, 8천잣. 가계 여쥔이 마웅 마웅 소에게 뭐라 합니다. 여행자들은 못 알아들었는데, 항의였던 모양. 커피 몇 잔 값을 덜 낸 듯. 그제야 예사롭지 않게 들리기 시작했죠. 10여분을 알아듣지 못하는 잔소리를 더 들어야 했습니다. “미안합니다”고 사과했고요.

원잣 환율이 1대1 정도인데, 실제로는 크게 차이 납니다. 10여명이 양곤에서 맛좋은 저녁을 들고 맥주에 양주(버마산)까지 곁들여도 4만잣 수준. 시골 소박한 음식은 그 절반 수준. 1대 4~5쯤 될 듯. 음식은 어디가나 여행자들 입맛에 딱입니다. 닭·돼지고기와 야채볶음, 나물(케소우쉐, 미나리) 한 접시면 최고의 식탁. 주식은 쌀 또는 국수.

다시 동력선 폭발음이 울립니다. 1시간여를 달려 또 한 섬에 들렀습니다. 메이 마라(예쁜 여자 뜻)섬. 나르기스 피해는 없었는데, 새들의 서식지(자연공원)로 지정돼 25가구가 딴 데로 옮겨가고 5명만 관리인 격으로 남았다네요. 이 섬에 들른 건 악어(크로커다일) 때문. 애초 악어가 살지 않았는데, 나르기스 때 3마리가 들어와 붙잡았다고. 웅덩이에 체인으로 단단하게 묶어놨습니다. 길이가 2.5m. 새끼도 구경했죠.

재앙과 공포, 아직 희망 안보여

세 꼬마가 예뻐 사진을 찍었는데, 말썽이 생기고 말았네요. 기자가 돌아서는데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거든요. 돌아보니 한 아이가 엄마에게 볼기를 맞고 있습니다. 사진 찍으면 손을 내민다(촬영 대가)는 소릴 들었는데, 화를 부른 것이었죠. 미안, 꼬마들아.
 
▲ 메이마라 섬에서 본 악어 새끼. 나르기스 때 악어 3마리가 섬에 떠밀려 왔다고 합니다.     © 최방식
▲ 황금빛 태양이 생명의 강을 비춥니다. 석양녘 강은 이별이 아쉬운지 흐느껴 웁니다. 하릴없는 여행자 눈에도 눈물이 고이지요.     © 최방식


이어진 뱃길. 라와이 서섬(서쪽 섬)에 들릅니다. 나르기스로 840명 중 674명이 목숨을 잃은 곳. 간담회에 온 이곳 주민이 뭔가를 가지고 보글레이로 가는 모양. 돌아와 작은 봉지 하나를 건네는데 마른 새우입니다. 특산물이라고요. 먹어보니 최고. 여러차례 뒤풀이 안주로 사용했죠. 엔진고장으로 견인선에 끌려 보글레이에 도착했습니다.

버마 에야와디 삼각주 저지대 삶. 기후변화가 가져온 까닭모를 재앙과 고통. 끝없는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당국도 국제사회도 그들의 생존엔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애써 이해한 그들의 삶. 아직은 희망이 보이지 않네요.

황금빛 태양이 이라와디강을 영롱하게 비춥니다. 석양녘 강은 여행자들에게 이별의 아쉬움을 표출합니다. 하릴없는 여행자 눈엔 눈물이 고입니다. 것도 모르는 꼬마들. 저무는 강가, 물놀이에 흠뻑 빠져있네요.

기후변화 국제활동단체인 ‘푸른아시아’(사무총장 오기출)가 3월 16일부터 8일간 버마 남부 에야와디 삼각주 일대와 중부 만달레이 인근에서 현지조사활동을 벌였습니다. 수행 취재한 내용을 7번에 걸쳐 싣습니다. /기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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