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덮힌 망우 능선서 엿본 ‘오래된 미래’

[서울둘레길12-1] 중곡동~용마산~망우산 능선길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13/01/01 [14:11]

눈덮힌 망우 능선서 엿본 ‘오래된 미래’

[서울둘레길12-1] 중곡동~용마산~망우산 능선길

최방식 기자 | 입력 : 2013/01/01 [14:11]
아차~용마~망우산 두 번째 여행은 동지를 막 보낸 이튿날 시작됐습니다. 고대 역법에서는 동짓달을 한 해의 시작으로 삼았으니, 밤이 가장 긴 날을 보내고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세수(歲首)의 첫 날이죠. 망자의 땅을 따라 이어진 길을 산자들이 다녀왔습니다. 그 길, 오래된 미래에는 작은 희망이 인고의 세월을 버티고 있더이다.

중곡역 1번 출구로 오르는 데 겨울바람이 까칠합니다. 산 바로 아래 자리한 곳이라 그런지 지하도로 스미는 삭풍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 납니다. 날씨가 추워 더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찰구 옆 의자에 앉아 40여분을 기다리려니 몸이 졸아드는 느낌입니다. 도심 지하도 한 귀퉁이에 신문지와 골판지를 덮고 추위를 버티는 이들 생각에 잠시 가슴이 아려옵니다.
 
▲ 중곡동에서 용마산에 오르는 능선길. 아차~용마~망우 능선길에서 유일하게 가파른 암벽길이어서 그런지, 눈길에 얼음까지 엉겨 붙어 여행자 몇이 발걸음을 제대로 떼지 못합니다.     © 최방식


기자가 20세기 마감을 몇 년 앞두고 일본 취재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의 자치를 배우겠다는 지방의원 및 활동가들의 투어를 동행 취재한 적이 있는데, 도쿄 신주쿠역 지하였습니다. ‘홈리스’(집 없는 이들)들이 집회를 하더군요. 유인물을 보니 이들을 지하도에서 쫓아내려는 도쿄도에 경고와 함께 거주권을 요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세수(歲首) 첫날, 새희망 찾아


▲ 온통 하얀 세상입니다. 2주전 올 때도 눈꽃이 만발해 황홀경에 빠졌는데, 다 녹았나 싶더니 다시 복원됐습니다. ‘긴고랑’ 눈꽃이 고즈넉합니다.     © 최방식

그러고 보니 신주쿠 역 지하도는 곳곳이 홈리스 가옥으로 꽉 차 있습니다. 골판지로 사람 앉은 키 정도의 거주공간을 만들고 나름 주소까지 가진 게 끝없이 이어집니다. 안내자 설명에 따르면, 그 낮은 집에 가구와 집기들이 구비돼 있고 심지어 거실·침실까지 구별돼 있다고 했습니다.

흥미로운 건 홈리스 중 역사 속 일본 혁신운동을 주도했던 ‘전공투’(전학공투회의, 60년대 말 대학 신좌파운동) 후예들이 있다는 군요. 72년 ‘아사마 산장’에서 산장지기 배우자를 인질로 10일간 대치했던 일본 신좌파 ‘연합적군’. 경찰에 체포된 뒤 2년여간 ‘산악기지’에서 벌어졌던 12명 숙청 등을 털어놓으며 혁신운동의 마감을 고했던 역사...

동짓달이 이렇게 추운 게 이례적인 모양인데, 날씨조차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보수에 권력을 안겨주고 유난히 추운 겨울을 나는 이들에게, 날씨마저 가혹하기만 하니. 한 치 앞도 제대로 못 보는 인간의 눈으로 어찌 자연이치를 탓하오리까만, 체감온도는 더 춥기만 한 때입니다.

여행자 한 명이 계단을 오르면서 “동지죽 먹었냐”고 묻습니다. 다들 먹었다는데, 기자만 동지죽 구경을 못했습니다. 사실, 동지인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달려가지 말고 천천히 보고 생각하자고 느림보 여행을 시작했는데, 여행 따로 세상사 따로니 이런 어리석을 데가 또 어디 있으리까?

2천여 년 전 고대 국가에서는 음력 11월, 그러니까 동짓달을 새해 시작으로 삼았다죠. 동지를 아세(亞歲), 곧 ‘작은설’이라 하고 동짓날 팥죽 한 그릇을 먹어야 나이가 한 살 더 먹는다고 했다니까요. 설 때 떡국 한 그릇 먹어야 나이를 먹듯이. 북반구에 사는 이들에게는 태양이 다시 다가오기 시작하는 때이니, 딱 맞아 떨어지는 월력인 셈입니다.

▲ 부츠를 신고 온 여행자. “아니, 이런 날 왜 등산화를 안 신고 왔냐”니, “등산화가 부츠보다 더 미끄러워서”랍니다. ‘어이 상실’이라 하나요? 그는 결국 아이젠을 빌려 신고서 능선길을 갔습니다.     © 최방식


까칠한 삭풍, 홈리스 생각에...

팥죽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죠? 동짓날 팥죽을 쑤어 액살이 출입한다는 대문이나 벽에 뿌려 액을 막는데, 붉은색이 태양을 상징하는 색으로 벽사(辟邪)와 축귀(逐鬼)에 효험이 있어 그렇다고 하죠? 이런 전통은 서구에도 있는 데, 피(붉은색)를 뿌리는 문화죠. 성탄절 역시 이교도의 태양숭배 사상과 섞여 12월로 지정됐다는 이야기도 있죠.

중곡동에서 용마산에 오르는 능선길. 온통 하얀 세상입니다. 2주전 여기 올 때도 눈꽃이 만발해 황홀경에 빠졌는데, 다 녹았나 싶더니 다시 복원됐습니다. 아차~용마~망우 능선길에서 유일하게 가파른 길이어서 그런지, 눈길에 얼음까지 엉겨 붙어 여행자 몇이 발걸음을 제대로 떼지 못합니다.

부츠 구두를 신고 온 송선민씨는 엉금엉금 깁니다. “아니, 이런 날 왜 등산화를 안 신고 왔냐”는 타박에, 대답이 재밌습니다. “등산화가 부츠보다 더 미끄러워서요.” 그럼 차라리 운동화라도 신고오지 그랬냐고 다시 물으니 또 같은 대답. “운동화도 이 부츠보다 더 미끄럽던데요.” 요즘엔 ‘어이 상실’이라고 하나요? 말문이 막힙니다.

7부 능선 정도에 있는 용마산정. 커피 한잔에 김밥 등으로 간단히 요기하고 다시 여정에 오르는데, 여행자 ‘들풀’(아이디)이 묘한 소리를 합니다. “수컷들은 왜 이리 안와.” 서울둘레길 여행이 벌써 12번째인데 70% 이상이 여성 여행자였으니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는 데 딴 데서 한마디 덧붙입니다. “수컷들 와봐야, 뭐 별게 있겠어...”

▲ 여행자에게는 모든 게 즐거움입니다. 뚜벅뚜벅 걸을 수 있어 행복하고, 때론 적적해 자유롭고... 고독할 땐 사색하고, 수다 떨 땐 이웃으로부터 배우니...     © 최방식


용마산 정상 가까이 어느 전망대에 서자, 여행자 한명의 목소리가 흔들립니다. “여기가 내 고향인데...” 두 번째 여행에 참여한 김향숙씨. 면목동에서 태어났다는 군요. 아버지가 사업을 크게 했는데, 가족들은 별로 큰 혜택을 못보고 살았다고 하네요. 겨울이면 난방이 여의치 않아 따뜻한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 부챗살 모양으로 자곤 했답니다.

“면목동, 여기가 내 고향인데”

향숙씨 재미있는 이야기 더. 추운 겨울 따뜻한 데 발을 모으고 자다보면 외간남자가 옆에 자고 있는 걸 여러 번 봤다고 합니다. 시골에서 일자리 찾아 상경한 젊은 친구들을 붙들려고 아버지가 소개받자마자 바로 집으로 데려와 재우고 일을 시키곤 했다네요. 경쟁사에게 일꾼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랬다니...

용마산 정상을 넘었습니다. 아차산과 망우산 능선이 갈라서는 곳 어딘가에 자리잡고 점심을 했습니다. 막 자리에 둘러앉는데, 여행자 한명이 앞에 있는 이를 가리키며 “귀가 떨어졌네요”라고 합니다. 일행이 깜짝 놀라 시선을 집중하는데, 손가락질을 하며 혼자 웃기만 합니다. 글쎄 가리키는 곳을 보니 귀마개가 떨어져 있네요.
 
▲ 아스라이 굽어본 아치울. 고인이 된 박완서 선생이 살아 유명세를 탄 마을. 세수확대 취지로 ‘박...’ 마을로 꾸미려다 ‘고인 뜻 아니다’는 유족 반대로 그만뒀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 아름다운 이름을 왜...     © 최방식


둘레길여행의 백미는 점심이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음식 솜씨 좋은 분들이 여럿 있어 그런지 맛좋은 게 점점 늘어갑니다. 어떤 이는 우거지 주먹밥, 또 다른 이들은 찹쌀주먹밥·김밥·샌드위치, 아 정말 맛이 기가 막힙니다. 여행자 한명은 또 이렇게 외칩니다. “평화사랑은 행복하겠어, 여기 우리들이 이렇게 와주니...”

문득 깨닫습니다. 행복이란 이런 것일까? 하여튼, 그 분 말이 맞았습니다. 크레타섬에서 태어난 니코스 카잔차키스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여행을 그리도 좋아했던 ‘조르바의 영혼’을 가진 그리스인. 그가 남긴 유언도 맑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여행자에게는 모든 게 즐거움입니다. 뚜벅뚜벅 걸을 수 있어 행복하고, 때론 적적해 자유롭고... 고독할 땐 사색하고, 수다 떨 땐 이웃으로부터 배우니, 이런 기쁨이 세상에 또 어디 있으리까? 나를 맑게 하는 여행길은 그래서 수련의 길이기도 합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제 여행은 사색이자 순례고, 제 글쓰기는 수련인 것이지요.

▲ 여행자들은 시를 낭송하며 길을 찾습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한용운 시)     © 최방식


여행·글쓰기, 사색·수련의 길

기자도 처음엔 여행이 관광인줄 알았습니다. 경쟁에 지친 이들이 잠시 쉬면서 보고 즐기며 에너지를 충전하는 레크리에이션으로 오해했으니까요. 언제부턴가 그게 아니란 걸 알았습니다. 여행은 내 삶이고 내 인생의 노정이었습니다. 당연히 순례인 것이지요. 때로는 경건하고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쓰리고 고된.

기자의 명상법은 여행입니다. 어떤 이들은 복식호흡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화두를 좇아 수련을 한다고 하지요. 기자는 좀 다른 걸까요? 걸으며, 때론 즐겁고 때론 고통스러워하며 사색의 길을 가는 것. 그 가운데 기쁨과 자유를 얻지요. 카잔차키스가 삶의 끝, 죽음으로서 자유를 얻었듯이요. <다음호 계속>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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