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와 새해가 달갑잖은 까닭

[편집인 칼럼] '농신제'가 '성탄절'로 뒤바뀐 이유와 연말 단상

최방식 | 기사입력 2006/12/22 [20:49]

크리스마스와 새해가 달갑잖은 까닭

[편집인 칼럼] '농신제'가 '성탄절'로 뒤바뀐 이유와 연말 단상

최방식 | 입력 : 2006/12/22 [20:49]

▲최방식(본지 편집인)  ©인터넷저널
크리스마스가 며칠 남지 않았다. 밤거리는 어딜 가나 황홀하기만 하다. 성탄트리가 휘황찬란하고 캐럴송이 요란스럽다. 백화점은 발 디딜 틈이 없다. 시쳇말로 ‘지름신’이 강림한 모양이다. 왜, 누구 주려고 사들이는 지 알 바 없다. 길거리와 술집도 북새통이다. 송년회를 무에 그리 즐거운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12월 중순의 풍경은 언제나 그렇듯 요란하기만 하다. 도심의 삶이란 게 으레 그런 것일까? 아님 아기 예수 탄생이 그리 즐거웠을까? 설마, 진짜 예수 탄생일로 알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크리스마스를 성탄절로만 아는 이에게는 놀라운 이야기일 수도 있을 성싶다. 12월 25일은 고대 로마시대 이교도인들이 기리던 ‘농신제’에서 유래했다니 말이다. 이 축제는 매년 추수가 끝나고 치러졌다. 한 해의 풍요를 즐기려는 것이었다. 긴 겨울을 앞두고 신선한 음식을 맛보는 마지막 철이었다. 때를 넘기면 말리거나, 염장한 겨울 음식을 먹어야 하니 말이다. 일주일여 가을걷이의 기쁨을 나누고 겨울나기를 각오하는 그런 기념 주간이었던 셈이다.

 이교도 ‘농신제’ 막으려 성탄절 제정

 3세기 경 로마의 공식 국교가 된 기독교는 이교도의 요란한 축제를 대체할 궁리를 시작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25일을 예수 탄생일로 선포하자는 것. 거짓으로 성탄절을 꾸며내 이교도 축제를 교회절기로 바꾸려 한 것이다. 무지렁이 민초였을망정 정직했던 것일까. 교회의 거짓말은 잘 먹혀들지 않았나 보다. 18세기까지도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역에선 25일을 성탄절로 쇠지 못했단다. 일부에선 아예 크리스마스를 금지하기도 했다.

산업사회이론으로 기억한다. 산업화 도시화로 가족과 전통의 공통체가 파괴된다. 그 자리엔 공장, 백화점, 그리고 아파트가 들어선다. 파편화한 개인은 임노동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상품을 구매하며 대리만족을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개인이 기업의 소비상술에 먹혀들면서 크리스마스는 흥청망청 즐기는 시즌으로 탈바꿈 한 셈이다.

산업혁명이 크리스마스 문화를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다. 대량생산체제를 갖춘 공장들은 각종 발명품과 생필품을 쏟아냈고, 이를 팔아야 했던 기업들은 시장개발에 혈안이 됐다. 도심 곳곳에 백화점을 만들고, 화려한 조명시설을 비쳐댔다. 가족의 소중함까지 광고카피로 들먹이며 선물을 사라고 야단을 떤다.

크리스마스는 교회가 예수 탄생일로 제정할 당시와는 다르게 변절되고 말았다. 이교도의 방탕한 축제를 막겠다던 교회의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 날이 ‘소비종교’의 축제일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이런 아이러니가 또 어디 있을까. 가족간의 정, 연인간의 사랑은 이제 돈과 상품으로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크리스마스 철마다 백화점이 북새통을 이룬 지난 150여년간 인류는 그 전 수십만년 동안보다 더 많은 지구자원을 낭비했다.

서구인들이 자기반성을 좀 했나? 며칠 전 프랑스에서 깜짝 놀랄만한 뉴스 하나가 날아들었다. 낭뜨에서 올 연말에 모여 2007년이 오지 못하도록 반대시위를 벌인다는 소식이었다. ‘새해 반대 전전’이라는 한 민간단체가 새해가 오는 것을 저지하고 저항하는 시위를 벌이겠다며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는 외신기사였다. 이들의 주장은 이랬다.

 “2007년 못 오게 세계인이여 저항하라”

 “세월의 흐름을 축하하는 행위는 비논리적이며 한해를 마감하면 무덤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가는 것이다.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니라 비극이다. 우리는 늙어가는 게 진저리난다. 지구가 점점 늙어가며 더워지고 있다. 죽음으로 달려가는 미친 경주를 중단하라.”

인디펜던트는 이 뉴스를 전하며 프랑스의 저항정신이 불가항력적인 데서도 표출됐다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러면서 프랑스의 좌파 철학자인 장 폴 샤르트르가 작고했을 때 운구행렬을 따르던 수만 인파 중 한명이 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난 샤르트르의 죽음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려고 나왔다.” 

지하철에서 이상한 제목의 글을 봤을 땐 픽션이거나 잘못 뽑힌 제목이거니 싶었다. 글을 읽고는 감전이라도 된 듯 한참이나 멍하니 서있었다. 이런 역발상도 가능하구나라는 생각을 하기까지 수십분이 걸렸다. 불가항력 앞에서 마냥 순응해온 내 처지가 왜 그리도 한심했던지. ‘빈곤의 철학, 빈곤한 상상력’이 서글프기만 했다. 끝 간 데 없는 소비, 그 질주에 편승한 나. 자꾸만, 공포가 엄습한다. 다들 즐거워하는 이 크리스마스에 축일의 유래와 프랑스인들의 엉뚱하기만 한 ‘새해 반대 투쟁’을 들먹이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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