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말 걸기, 묻고 또 물으면 길을 찾긴 할까요”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26) 박야일 서양화가“내 작품은 질문이죠. 공부할 때도 그림보다 사회운동에 열중일 때도 부조리한 사회에 ‘왜 그러냐’고 묻는 것이었거든요. 불안과 결핍 그 ‘너머’가 궁금했어요. 그러다 낙상 사고를 당했죠. 휠체어를 못 벗어나는 신세. 그 아픔을 추스르며 ‘들어가기’를 시도했죠. 겉돌기에서 눈물 속으로 파고든 거죠. 답을 어렴풋이 얻을 때쯤 ‘신호’를 봤어요. 임계점에 다다른 걸 느끼고요. 이제, 나에게 묻는 겁니다. 어디로 갈 것이냐?”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 스물여섯 번째 주인공 박야일(58·남) 서양화가의 말이다. 28일 옥천(양평) 작업실에서 만난 박 작가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청년기의 불안과 미래 궁금증, 장중년기의 사고(낙상 뒤 장애)와 실존적 깨달음, 그리고 자기 찾기가 창작 소재였다고 했다.
청장년기 삶은 생계와 사회부조리 해결에 집중됐다. 작품활동을 안 한 건 아니지만 밥벌이에 밀려 2순위였다. 예술을 놓아버릴 수 없다는 부담에 몇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주제는 ‘너머’(4차 2008년). 불확실한 미래를 작품 담은 것이다.
“내 집 하나 없어 떠도는 불안정한 삶은 결핍이었죠. 못 가진 이들은 하나라도 가져보려고 아등바등 살 수밖에 없거든요. 곤궁을 쉬 벗어나지 못하고요. 그 늪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짐짓 모른 체 하는 거였어요. 뒷짐을 지고, 너머를 궁리하면서요.”
중년 불현듯 찾아온 낙상사고. 생계 어려움에 작품 보다 돈벌이에 매달리다 생긴 일이었다. 그제야 주변부만 어슬렁거린 자신을 발견했다. 처방은 ‘들어가기’. 사고 이후 첫 개인전(5번째) 주제도 그거였다. 삶 속으로 뛰어드는 것.
“떠돌던 삶에서 현실 속으로 직진한 거죠. 머뭇거리고 에두르던 태도를 버리고 한가운데로 들어가 당자(當者)가 된 것. 상징으로 작품에 구름을 그려넣곤 했죠, 기어이 살아내는 이들의 눈물을 그리 표현한 거죠. 고통을 끌어안고서요.”
작품 주제는 ‘신호’와 ‘녹는 점’으로 진화했다. 겉돌던 태도를 버리고 삶 속으로 들어가 마주한 현실은 그에게 많은 조짐을 드러낸다. 수많은 질문에 답변 대신 암시나 신호가 다가온 것. 끓거나 녹는 어딘가에 직면하면 되돌릴 수 없는 절망이니까.
“언제부턴가 연기를 그렸어요. 기후위기에 반문하는 거죠. 대안의 길을 찾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니까요. 그 불안을 화폭에 담았죠. 당장 멈추고 묻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인 거죠. 넌, 어디 있니? 넌, 어디로 가니?”
그의 작품은 모두가 말 걸기이고 질문이다. 개인과 사회의 현상과 문제, 그 원인과 결과를 향한 끊임없는 궁금증. 창작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한숨은 왜 쉬는데? 이 홍수에 이불을 머리에 이고 어디로 가는데? 저이 검은 뒤태는 왜 또 저런데?
“질문을 그리기 시작했죠. 답을 모르기에 묻고 또 물었죠. 화폭에서 말을 걸어본 거죠. 청장년기 질문은 직설적이고 명확했는데, 이제는 은유로 바뀌었어요. 지금까진 질문이었는데, 이젠 답이 나오려나요?”
작가도 관객도 모두 ‘대체 왜?’ 질문을 던지는 그림이 있다. 노르웨이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 죽음과 공포를 묻는 작품. 작가는 이런 글을 남겼다. ‘해 질 녘 친구와 길을 걷는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죽을 것만 같았다. 그치지 않는 커다란 비명소리.’
화가의 꿈은 중3 때 무르익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가 어느 날 “너 커서 뭐 할래” 물었던 것.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작가가 되겠다고 답했다. 예상과 달리 아버지는 잘해 보라고 격려했고, 그는 그때부터 자신감을 가졌다고 했다.
“아버지가 그리 물은 건 고교 진학을 앞두고 인문·상업·실업계를 선택해야 하기에 그랬던 것 같아요. 답을 하면서도, 제 생각 밑바탕에는 글보다 그림이 쉽고 재밌을 거란 판단이 있었나봐요. 별 고민 없이 그림을 선택했으니까요.”
미술대 서양화과에 진학했다. 수업이 탐탁지 않았고, 공부 재미도 덜했다. 대학 2년여만에 입대했다. 경비교도대로 차출된 게 사회에 눈을 뜬 계기가 됐다. 각종 시국 사범 재판 때 경비 업무로 법정에 다니며 운동가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은 것.
“그전에는 사회문제에 관심 없었거든요. 집회 시위도 참여 안 했고요. 군복무 중 바뀌었어요. 인문사회과학 도서를 읽기 시작했죠. 제대 뒤에는 그림패와 소모임을 만들고 학습과 민중미술(걸개그림 등)에 빠져들었어요.”
학교를 졸업하고 민미협(민족미술협의회) 활동에 참여했다. ‘그림마당 민’ 간사도 맡았다. 그림 공부를 더 하려고 대학원에 갔지만, 작품활동 보다는 민미협 활동이 주였다. 그러다 돈벌이가 그나마 괜찮은 M조형연구소(민미협 출신이 만든 영리활동 그룹)에 객원작가를 거쳐 정직원으로 취업했다.
그때 같이 활동하던 친구가 비슷한 일(조형 등 환경미술로 돈 버는)을 하는 사업체를 직접 차리자고 해 독립했다. 사업장도 양평으로 옮겼다. 하지만 사업이 여의찮아 그만두고, 후배 제안을 받아 목수(목조건축)로 취업했다.
“7채쯤 목조주택을 지었을 거예요. 2015년 건축 일을 하다 2층에서 떨어졌죠. 척추를 다쳐 하반신이 마비됐어요. 1년6개월여 치료와 이어진 1년여 재활치료를 했죠. 나다니는 게 불편하니 그림에 전념할 밖에요. 핑곗거리 없는, 딱 전업작가가 된 거죠.”
사고의 아픔을 딛고 작품활동에 열중한다. 2019년부터 5년간 6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그해 2월 ‘들어가기’(경인미술관) 전시회가 성황을 이뤘고, 작품 판매로 빚도 좀 갚았다. 2021년 11월 ‘신호’(경인미술관), 2023년 10월 ‘녹는, 점’으로 이어졌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에 3점(미술은행), 오산시립미술관 1점, 양평군립미술관에 1점 들어가 있다. 그는 미술대전 등 경선에는 일절 응모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자기의 작품을 소유한 특별한 고객 한 분을 잊지 못한다.
“2019년 11년만에 개인전을 했어요. 전시회를 막 마쳤는데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이 의자(주제) 그림 2개 팔렸냐고 물어요. 자기가 사겠다면서요. 얼마짜린데 니가 사냐고 했더니, 엄마가 보관중인 명절 세뱃돈으로 살 수 있다는 거에요. 농담인 줄 알았는데, 이튿날 엄마와 함께 은행서 수백만원을 입금했더라고요.”
미래 구상은 소박하다. 지금 하는 ‘서사 있는’ 미술을 계속할 거란다. 개인과 사회에 던지는 질문을 소재로 한 미술이 계속될 텐데, 이제 대답이 담긴 작품이 늘지 않을까. 장애나 주거(집) 주제의 작품을 구상중인데, 찍어놓은 사진을 놓고 씨름 중이다.
양평 삶은 친구와 환경미술을 하겠다고 내려온 때부터 시작됐다. 그 사업을 곧 그만두고 건축(목수)일 다니며, 서너군데 이사도 다녔다. 쥔 돈이 적다 보니 허름한 집에 사느라 아내와 아이가 고생을 꽤 했단다. 이젠 미술 외 활동은 거의 그만둔 상태.
아내는 문학을 공부하고 서울에서 시민사회운동을 했는데, 양평으로 내려오고는 형편이 여의찮아 사회복지 관련 일(생계)을 하고 있다. 양평 가자고 설득할 땐 애 좀 먹었다. 어찌어찌 내려왔는데, 곰팡이 슬고 물새는 집 등을 옮겨다닌 게 미안하다고 했다.
“후배가 소개해 결혼했는데, 얼마 안 돼 이러더라고요. ‘사기결혼을 했나봐, 화가인 줄 알았는데, 그림도 안 그리고.’ 농담인 줄 알았지만, 집안 형편이 어렵더라도 작품활동을 이어가길 바라는 마음인 걸로 이해했죠.”
물고기를 잡으면 통발은 잊는다(得魚忘筌)는 말이 있다. 참 진리를 얻으면 도구가 쓸모없게 된다는 말. 고대 철학자 장자(莊子, 외물편)의 말이다. 박 작가의 미술은 구도의 길이다. 작품이 모두 질문인 까닭이다. 군더더기 없는. 언제쯤 그 답을 화폭에 담을까. 그의 구도(求道)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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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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