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돌담길 따라 피어난 좌절과 희망”

광화문단상 “고궁길 벗어나자 아기집을 벗어나 혼돈세상으로 나온...”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07/03/29 [12:51]

“덕수궁 돌담길 따라 피어난 좌절과 희망”

광화문단상 “고궁길 벗어나자 아기집을 벗어나 혼돈세상으로 나온...”

최방식 기자 | 입력 : 2007/03/29 [12:51]
소중한 만남이 있어 서소문 배재학당 옆 어느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우산이 없었는데 다행이도 식당에 들어서자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고소한 자장면 한 그릇을 후딱 먹고 나오는데 비가 그쳤습니다. 어찌 갈까 잠깐 고민 끝에 덕수궁 돌담길을 생각해냈습니다. 촌놈이다 보니 덕수궁 길 추억이 그리 많은 건 아니지만 이 정겨운 길을 기억합니다.

배재학당 앞 작은 언덕을 넘어서니 멋진 건축물이 하나 둘 보입니다. 교회, 대사관, 그리고 무슨 클럽... 나름대로 고풍스럽고 창연합니다. 조금 지나니 사거리. 또 잠시 머뭇거립니다. 덕수궁 정문 쪽으로 갈지, 아님 경향신문 쪽으로 향할지를 결정해야 하니까요. 돌담길 정취를 좀 더 오래 즐기려고 정문 쪽으로 걸음을 뗍니다.
 
▲덕수궁 돌담길. 꽤 아름답게 꾸며놨습니다. 연인과 손잡고 함께 걸었던 추억의 길입니다.     © 최방식

▲덕수궁 옆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행사중인 르네 마그리트전. 창 안에 '회귀'(1940년)라는 작품이 보이는 군요.     © 최방식


자장면 후딱 먹고 정겨운 길로...

이 사거리에 오면 항상 불만스러운 게 하나 있습니다. 한 길이 막혀있다는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막혀있는 게 아니고 경찰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미국 대사관저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언젠가 허바드 대사 시절 그를 인터뷰 하겠다고 그 길로 한 번 간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돌담길과 한옥들이었습니다.

오른 쪽에 옛 대법원 건물이 보입니다. 지금은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죠, 아마? 건물주변이 깃발로 뒤덮여 있어 읽어 보니 ‘르네 마그리트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작가죠? 관습을 거부하고 자유와 도전, 그리고 환상을 작품에 담은 아티스트로 알려져 있죠?

‘승리’, ‘보이지 않는 선수’, ‘대화의 기술’, ‘겨울비’, ‘회귀’ 등 그의 유화와 드로잉 120점과 친필서신이나 사진 150여점이 전시돼 있답니다. 15일까지 전시일정을 연기했다고 하니 후회하지 않으려면 가보시길 바랍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수천명으로 복제된 스미스요원 모습, 가수 존 레논의 ‘애플레코드’(사)가 모두 르네의 작품 ‘겨울비’와 ‘사과’가 들어간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죠.
▲돌담길을 돌아서는 데 목각 작품들이 쭉 늘어서 있습니다. 격언들과 그림이 혼합된 예쁜 목재품들입니다.     © 최방식

 
▲아름다운 여인을 새겨놨군요. 색감까지 넣어서. 욕심났지만 돈이 없어 그만 뒀습니다.     © 최방식


골목길을 막 빠져나오는 데 기분이 묘합니다. 정문 앞은 야외수업을 왔는지 중고생들로 시끌벅적합니다. 시청 앞 대로는 수많은 차량들이 어디론지 어지러이 달려갑니다. 궁궐 담장위로 고즈넉하던 하늘도 그 끝을 지나치자마자 마천루로 뒤덮입니다. 엄마의 아기집에 있다 혼돈의 세상으로 나온 느낌이었을까요? 저도 몰래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경쟁에 찌든 타락한 자의 본능일까요?

정동교회(성공회)로 걸음을 옳기는 데 돌담을 따라 전시해놓은 목각 작품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경구와 그림을 새긴 것들입니다. 보왕삼매경, 효경, 기도문 등이 새겨져 있군요. 주인공이 누군지 둘러보니 저만치 한 사람이 목각에 열중입니다. 가까이 가보니 오른 쪽 손에 장애를 가진 분이군요. 놀랍습니다. 목각화가라니.

가슴을 후벼파는 ‘보왕삼래론’
 보왕삼매론을 잠시 읽으며 조각가의 속마음을 알았습니다.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성찰의 계기다”는 첫 문구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곤란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친구 사귈 때 나만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지 말라”, “공덕을 베풀 때 과보를 바라지 말라”, “억울해도 변명하려들지 말라”. 읽을수록 가슴을 후벼 팝니다. 하나같이 내 얘기고요. 불도(佛道)에 무식한 기자지만 감동이 밀려옵니다.

▲조각 작품의 주인공이 보입니다. 헌데 오른손 장애인입니다. 불편을 극복해 저 아름다운 작품을 만든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 최방식

 
▲강남의 최고 부자들이 산다는 포이동 '타워팰리스' 옆 빈민촌 사람들이 화가 단단히 났습니다. 오래전 도심에서 보기싫다고 변두리로 내쫓더니 이젠 그 땅이 노른자위 땅이 되니 다시 딴 데로 나가라한다며 분통을 터뜨립니다. 주민등록까지 말소해버렸다는군요. 한국의 행정 현주소입니다.     © 최방식


정동교회를 지나는 데 조금 소란스럽습니다. “빼앗긴 주민등록을 돌려 달라”는 현수막 글귀가 보입니다. 아, 강남 최고의 부자들이 산다는 포이동(타워팰리스 옆)의 이방인 빈민촌 사람들이 시위 중이군요. 박 정권 말 도시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강제 수용됐던 이들. 그 땅이 황금알을 낳으니 나가라는 겁니다. 말을 안 듣자 주민등록까지 없애버린 모양입니다. “죽일 놈들 같으니라고.”

정동교회는 한국 민주화운동사에 중요한 곳입니다. 87년 시청 앞 시위 때 경찰에 쫓기다 교회 담을 넘어간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지금 어느 장관 하시는 분이 당시 이곳 신부를 하셨을 겁니다. 최루탄을 얼마나 마셨던지 담장 곁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눈물 콧물 흘리며 기침을 해대던 모습이 선연합니다.

돌담길이 끝나면 한국 언론권력자들이 으스대는 곳입니다. 하늘 높이 나선형의 미려한 한 일간지 건물이 위풍당당합니다. 청계천이 시작되는 곳이죠. 조금 지나면 호텔, 그리고 언론권력의 절정인 자칭 ‘1등 신문’사가 나옵니다. 건물 외벽 큰 그림엔 “행복을 주는 신문”이라 써놨군요. 그들의 논지에 동의하지 않는 ‘삼류 기자’에게는 불쾌감뿐입니다.
 
▲자칭 '1등신문'이죠. 회사 벽엔 큰 글씨로 '행복을 주는 신문'이라는 글귀를 새겨놨습니다. 헌데 '삼류 기자' 눈엔 그리 보이지 않으니 어떡하죠? 부, 권력, 냉전, 수구, 호도 등을 떠올렸습니다.     © 최방식

▲서울 도심 하늘 높이 신문사가 하나 보입니다. 광화문 하늘을 덮고 있는 큰 언론이죠. 하지만 덩치 만큼 제 역할을 하는 지 의문을 갖게 합니다.     © 최방식

 
‘1등 신문’과 ‘삼류 기자’

이번에는 초록 손수건이 이채롭습니다. 옛 국제극장 앞 광장이죠. 나무 가지마다 초록 손수건이 어지럽게 흩날리고 있습니다. ‘희망의 손수건’이라고 합니다. 옛 국제극장 자리에 들어선 감리교단측이 그 곳을 ‘희망광장’으로 선포하고 초록손수건을 나무 가지가지에 묶었다는 군요. 아르헨티나 오월광장 어머니들, 한국의 민가협 어머니들이 독재정권에 아들·딸을 잃고 광장 나뭇가지에 내 걸었던 ‘민주화 희망’의 ‘노란손수건’을 떠올렸습니다.

돌담길에서 멀어지자 재미가 없습니다. 매연, 차, 인파, 간판의 홍수가 오늘 따라 더 부담스럽습니다. 세종문화회관 뒤편을 지나는데 전에 없던 소나무들이 눈에 띕니다. 주차장을 개조해 작은 숲을 만든다는 군요. 장한 일입니다. 하지만 주차장 곁 ‘뜨락 축제’를 하던 분수대까지 다 파내고 나무를 심었군요. 좀 아쉽습니다.

▲광화문 네거리 한 귀퉁이엔 초록 손수건이 나무 가지마다 가득 걸려있습니다. '희망의 손수건'이라는군요. 좀 의아했지만 '오월광장 어머니회'의 '노란 손수건'을 떠올리며 이해했습니다.     © 최방식

 
▲세종문화회관 뒤뜰이 숲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벌써부터 한쪽엔 소나무들이 들어섰군요. 아름답긴 합니다만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갑니다. 생태조경인지 전시행정인지 궁금해서요.     © 최방식


소나무를 도심에 옮겨 심는 걸 잘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소나무는 공해에 약할 뿐 아니라 도심으로 이식하면 오래 버티질 못한답니다. 우선 보기 좋은 전시행정이라 의심하지만 전문가는 아니라서 그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오늘 한 신문에 강릉의 어느 소나무 마을 이야기가 나왔더군요. 도시에서 조경용으로 멋있게 생긴 시골 소나무를 모두 파간다고. ‘송00’마을인데 소나무를 다 파가 이제 동네 이름마저 무색케 됐다고 합니다. 쯧쯧, 도시조경이 환경파괴라니...

서울경찰청 울타리만 돌면 사무실입니다. 막 사무실 앞으로 다가가는데 길가 은행나무 가지들이 손짓하며 반갑다고 인사합니다. 아직은 앙상한 가지뿐이지만요. 흐릿한 날이어서 그런지 가지가지 마다 한충 부풀어 오른 ‘움’들이 눈에 더 선명합니다. 긴 추위를 견디며 준비해온 ‘희망’입니다.

▲서울경찰청 담을 돌아서니 길옆 작은 화단엔 벌써 새싹들이 세상여행을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맑아집니다.     © 최방식

 
▲사무실 앞 은행나무 가지들은 '세상여행'을 앞둔 작은 움들을 잔뜩 부풀리고 있습니다. 저 '희망'이 터져나오는 날 맑고 깨끗한 세상이 될 것을 믿습니다.     © 최방식


모듬살이의 ‘희망’이 피어나고...

황사비지만 움에게는 ‘희망 여행’을 재촉하는 꿀물입니다. 따사로운 햇볕 한줌이면 금방 두툼한 껍질을 뚫고 기지개를 펼 태세입니다. 고통과 괴로움이 가득한 세상, 파괴와 오염이 뒤덮인 세상, 모듬살이가 불가능한 절망의 사바세계가 뭐 그리 좋다고... 기다리고 피워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도약대에 선 박태환 선수처럼 그 환희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겠죠? 그 ‘작은 희망’들이 피어나 이 오염된 세상을 다시 맑게 해줄 그 날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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