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춤·도예·조각을 넘나든 통섭의 예술, 시대정신의 구현”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21) 김원주 예술인“서양화로 시작해 춤·도예·조각을 넘나드는 예술을 해왔죠. 생계 때문에, 사회운동 하느라 그리됐는데, 깨달은 바 커요. 삶이 분절되지 않듯 예술도 하나로 통한다는 거죠. 선조(선비)들이 예·학(藝·學)을 섭렵, 전인(全人) 학습을 했듯이요. 분출 형식은 다르지만 같은 신명(희열)에서 비롯된 거죠. 그런 예술을 지역사회에 좀 더 전파하려고 해요.”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 스물한 번째 주인공 김원주(62·남) 예술인의 말이다. 30일 여주 북내면 증골(상교리) 작업장에서 만난 그는 서양화, 춤, 도예, 조각 장르를 섭렵한 이른바 ‘종합’(통섭) 예술가라 할 수 있다. 독특한 이력만큼이나 그의 삶은 인식 뒤집기의 연속이다.
“학교에 가면 전인·인성 교육을 외치잖아요. 그런데 종국에는 저마다 분절된 속으로 들어가죠. 일제강점기를 거쳐 서양 철학과 제도가 정착돼 그런 것 아닐까요. 우리 전통 예술과 인문은 하나였거든요. 시서화(詩書畵)·악가무(樂歌舞)의 예(藝)와 문사철(文史哲)의 학(學)을 두루 섭렵했으니까요.”
그의 이른바 ‘통섭’ 예술은 미대(서양화)에 입학하고 풍물굿패 활동을 하며 시작됐다. 봉산탈춤, 고성오광대춤 등을 배우고 익혀 춤꾼이 돼 갔던 것. 그렇게 오랜 세월 수많은 시위 현장을 다니며 민중의 삶을 춤으로 표현했다. 신명이랄까. 즉흥 춤을 출 수 있게 된 것이다.
“춤을 출 때면 머릿속을 비우죠. 몇 개 화두만 떠올려요. 만신무당굿 할 때처럼 무아지경에서 몸을 움직이는 거죠. 대부분의 길거리 춤은 그렇게 이어졌죠. 삼성궁 가을천제, 2022년 여주 아트스페이스 ‘다스름’(시민 80여명 참여)에서 열린 도예전(공동) 춤판은 공식 무대 행사였어요. 조명을 받으며 달라진 시선에 애를 먹었지만요.”
그림을 그리며 춤꾼을 하던 그가 도예에 발을 들인 건 생계곤란 때문. 대학시절 서울민족민중미술운동연합 활동으로 좌경세력으로 몰려 몇 개월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그 뒤 이른바 ‘노동미술’이 여의찮아 ‘농민미술’을 하겠다고 여주로 내려왔는데, 목구멍이 포도청. 92년 도자공장 화공으로 취직했다. 3년여 밥벌이 뒤 직접 도예에 뛰어들 생각에 95년 증골로 찾아들었다.
“처음엔 ‘민중그릇’ 옹기로 시작했죠. 소품 생활자기도 했고요. 먹고 살아야 해서요. 제가 도예 2세대쯤 되는데 당시에 생활자기(상업)를 하는 이가 그리 많지 않았어요. 한데, 돈벌이와 멀어지는 찻사발 달항아리(백자) 등으로 빠져드는 거예요. 찻그릇 등이 왜색이어서 우리 것을 찾으려는 노력도 있었고요. 경남 일대를 뒤져 옛 가마터와 흙을 찾아 재현했죠. 하지만 상업성은 없었죠.”
도예를 계속하려고 2002년 대체 생계수단으로 다시 강구한 게 조각이었다. 삼성궁에서 단군·환인·환웅이나 동물상 등 석조를 시작한 것. 지금도 하고 있고, 생계에 도움을 받고 있다. 앞으론 도예와 조각을 결합한 도조 예술도 시도하려고 한다.
“그렇게 연결하고 건너는 예술을 했죠. 얻은 결론은 내 예술엔 장르 경계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맘속에 신명 또는 희열이 생기면 생각이 멈추죠. 장르가 뭐든 표출해 내는 거예요. 그리고 무성영화 보면 소리 없이 동작이 이어지듯, 춤·그림·도예·조각으로 분출된다고 할까요.”
‘달빛’(베르가마스크 모음곡)을 작곡한 프랑스 피아니스트 클로드 드뷔시. 음악, 시, 춤, 회화, 건축, 의상까지 섭렵 ‘총체예술’을 추구했던 리하르트 바그너의 영향을 받아 인상주의 미술과 상징주의 문학을 결합한 인상주의 음악을 창시했다. 혁명이념을 공부하고 무정부주의 잡지에 시와 칼럼을 썼고, 동양 음계·리듬을 서양음악에 접목했다. ‘가장 유능한 사람은 배우려고 가장 힘쓰는 사람’이라 했던 괴테도 문학가·철학자·정치인·식물학자였다. 종합예술가 김원주가 잡은 큰 줄기 ‘통섭’, 그 가치를 어찌 평가할까?
“처음으로 수채화를 연습했는데, 그릴 줄을 모르니 색을 입히고 그 위에 또 덧칠하다 종이가 불어 터질 정도였죠. 방법을 몰라 그냥 막 그리기만 한 것이죠. 기법을 터득하고부턴 달라졌죠. 누구보다 잘 그리게 됐고요. 그리고 미술대 진학을 했죠.”
강원 고성이 고향인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이사왔다. 대학 다니며 사귀던 같은 과 후배(장순복, 서양화가)와 결혼, 아들(김준하 판화가)도 낳았다. 독재정권의 탄압을 피하고 때마침 농촌 미술운동을 해보고 싶은 생각에 91년 여주 북내면 장암리로 내려왔다.
“차를 몰고 여주를 지나다 한 할머니를 태워 드리게 됐어요. 그분이 지금 제가 거주하는 증골에 사셨던 거죠. 그때 처음 와봤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제가 좋아하는 걸 보고 할머니가 빈집을 하나 소개해 줬어요. 흔쾌히 수락, 짐을 싸 들고 바로 이사 온 거죠.”
그림을 그리며 농민회 활동에 참여했다. 먹고살아야 하기에 미술학원 강사(여주 시내)도 했다. 증골 이주가 특히 반가웠던 건 밥벌이 화공을 그만두고 직접 가마를 차릴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 돈이 별로 없었는데 길이 열렸던 것. 지상권만 구매해 가마를 설치하고 작업공간을 꾸렸다.
“산 밑이라 자연이 좋고 조용해 작업하기 최고의 장소였어요. 텃밭 채소를 가꾸고 꽃도 키우고요. 물질적으론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늘 풍요로웠죠. 학교 다니는 아들은 좀 불만이 컸어요. 그 애가 서울서 학업을 마치고 예술활동을 하다 2년전 옆집으로 이주해 왔어요.”
여주로 오고 농민미술, 도예, 길거리춤, 조각 등을 맘껏 할 수 있었다. 여주민예총 창립에 참여해 지역예술운동을 해오고 있다. 도예(개인전 3번, 공동전 50여번), 서양화(공동전 30여번) 전시회도 가졌다. 10여명의 미술인들이 모여 여주미술인협회(대표 임진숙)를 결성해 농촌 민중미술의 길을 찾고 있는데, 최근 공동작업실 ‘예술창고 숲’을 개설하고 지역사회 시민예술공동체 사업을 시작했다.
“빈집(창고)을 얻고 개조해 이제 막 문을 열었어요. 5명의 회원이 입주했죠. 시민갤러리도 운영할 겁니다. 회원과 외부 작가들이 전시회를 할 수 있게 하고 그들 생계에 도움도 주고요. 시민미술학교도 열 예정입니다. 작가 역량을 키우고 일반시민도 예술을 배울(도제식) 수 있게 하려고요. 예술정책도 개발해 행정에 제안하고요.”
그와 아내, 그리고 아들까지 참여했으니 어엿한 ‘예술가’를 형성했다. 특이한 게 없냐고 물으니, 여느 가정과 다르지 않단다. 예술을 할 때는 각자 세계에 열중하고 방해가 되지 않도록 노력한다고 했다. 서로를 존중하는 질서가 엄격하다고 한다.
그에게 계획 같은 건 없다. 연 닿는 대로, 접점이 생기는 대로 예술을 해갈 것이란다. 물 흐르듯이. 살아갈 날이 그리 많지 않은 데, 거창한 계획이 무슨 소용이냐는 것. 느끼고 생각하는 대로 소박하게 살고 또 그렇게 예술을 하겠다고 했다. ‘예술창고 숲’을 통해 지역시민의 문화예술에 기여하고 픈 바람이 크단 얘기만 덧붙였다.
미술인으로 시작해 거리의 춤꾼을 거쳐 도예·조각을 해온 작가. 노동자·농민의 아픔과 민주주의 염원을 통섭의 예술로 보여준 예술인. 소변기를 ‘분수’로 둔갑시킨 뒤샹의 개념예술에 힘입어 환경파괴와 기후위기 등 사회적 문제를 소재로 한 ‘동시대예술’(컨템포러리아트)을 발전시켰던 이들. 그들의 시대정신과 창의력에 힘입어 진보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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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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