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아들' 가수에서 싸움꾼 목사로, "노래로 설교로 시대정신 전하죠"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13) 가수 이동순 목사

인터넷저널 | 기사입력 2023/06/02 [10:50]

'건아들' 가수에서 싸움꾼 목사로, "노래로 설교로 시대정신 전하죠"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13) 가수 이동순 목사

인터넷저널 | 입력 : 2023/06/02 [10:50]

“노래를 좋아해 노래만 하며 살려고 했죠. 하지만 그리 안 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불의에 기득권이 판치는 세상에서는 더더욱. 목사가 됐고, 세상의 부정부패에 맞서는 싸움꾼이 됐네요. 때론 목회로 때론 노래로 사회정의를 외치고 있죠.”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 열세 번째 주인공 가수 이동순 목사(66·남)의 말이다. 1일 오후 여주에 있는 교회(천성교회)에서 마주한 그는 환한 웃음 뒤 잠깐 회상에 잠기나 싶더니 ‘마이 웨이’(미국의 유명 대중가요, 프랭크 시나트라 노래) 얘기를 꺼냈다.

 

“‘건아들’ 2기를 이끌며 대학 졸업 뒤 밤업소 일을 할 때였어요. 새벽 3시쯤. 6~7명이 공연하는데, 손님이 딱 1명. 취객 앞에서 ‘마이 웨이’를 부르는 데, 어머니 생각이 떠오른 거예요. 내 인생 최대의 ‘회심’(종교적 회개)이었죠. 이튿날 그룹 리더 자리를 내놓고 말았어요.”

 

▲ 이동순 가수 겸 목사.  © 최방식


'건아들' 밤업소 공연중 떠오른 어머니

 

말년 삶을 되돌아보며 ‘늘 내 방식대로 살았어’라고 고백하는 ‘마이 웨이’의 조용한 절규. 고요 속 공연이 끝났지만, 그의 맘 속 일렁임은 그치지 않았다. 음악으로 모든 걸 채울 수는 없다는 걸 절감했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그렇게 목사가 됐다.

 

‘딴따라’(과거 대중음악인을 낮춰 부르던 말)에서 목사로 변신한 주인공. 여주 시민사회운동의 터줏대감. 부정부패와 불의를 쫓아내는 데 빠질 수 없었다는 여주 시민사회운동의 산증인. 노래로 설교로, 시대정신을 전하고 구원론을 설파하는 그는 용을 쓰고, 노려보다, 마침내 무심(無心)에 이르니 허세를 이긴다는 장자(壯者)의 목계지덕(木鷄之德)을 이뤘을까.

 

왜 가수가 됐냐고 물으니 ‘그냥 좋아서’란다. 부모 모두 교사생활을 했던 여주(양평 개군면은 당시 여주 소속)에서 태어났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이사했다. 명문 중학교 시험을 준비하던 차, 이른바 ‘뺑뺑이’로 바뀌었다. 박지만(박정희 아들) 때문에 입시정책이 뒤바뀌었다고들 했는데, 싫었다.

 

“추첨으로 성수중학교에 갔죠. 깡시골이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정말 밉더라고요. 때마침 공부도 싫어 놔버렸죠. 1학년 때 등록금으로 기타를 사고 말았거든요. 담임이 노래 잘한다며 성악하라고 했었거든요. 안 죽을 만큼 맞았는데, 제 반항의 시작이었죠.”

 

가출, 싸움, 땡땡이(학교 안가고 놀기)가 일상이 됐다. 친구들이 대부분이 청계천 판잣집에 살았는데, 어느 날 광주대단지(성남)로 강제 이주됐고, 친구들을 찾아 그는 성남에 다니며 놀았다.

 

“만화방을 전전했죠. 형들이 시켜 구두닦이와 아이스께끼(앵벌이)를 팔러 다녔어요. 밤이면 패싸움이 일이었죠. 여름방학 때는 해수욕장을 전전하기도 했죠. 등록금으로 산 기타는 놓지 않아, 여기저기 다니며 돈벌이를 할 수 있었어요.”

 

인천동산고(야구로 유명)로 진학했다. 공부가 싫을 때니 저녁이면 가발 쓰고 업소에서 노래 알바를 했다. 3학년 때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선배 무용담(락음악 저항정신) 흉내로 대마초를 손댄 것. 그는 잘 도망 다녔는데 친구들은 붙들려 가기도 했다. 선생님의 간곡한 권유와 노력으로 간신히 졸업장은 받을 수 있었다.

 

▲ ‘갑돌이와 갑순이’ 뮤지컬 공연(여주) 중.  ©이동순


서울보건대에 입학했다. 시작은 반강제(?) 군입대. 논산 신병 훈련소에서 만난 게 가수 김만수(‘하늘과 땅 사이에’ 노래). 육군연예대 활동을 같이 했다. 그러다 하사관학교로 강제 입학했고, 경남지역 군부대에 배치돼 문선대(주로 공연)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등록금으로 기타 사고 죽도로 맞아”

 

“군복무 때 정말 고통스런 일을 겪었어요. 79년 부마항쟁 진압군으로 투입된 거죠. 박정희 정권이 싫었는데, 학생과 시민을 두들겨 패라니 꺼림칙했죠. 10·26까지 터져 전쟁 대기상태라 휴가도 못썼죠. 다행히 광주항쟁 때 투입되지는 않았고, 81년 초 제대했죠.”

 

복학하며 ‘건아들’ 2기 맴버가 됐다. 3년여 전국의 거의 무든 대학축제를 다니며 공연했다. ‘옥슨80’, ‘송골매’와 함께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때다. 서울예전 축제 때도 출연했는데, 최병서(개그맨), 이용(가수) 등도 그 때 알게 됐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건 후배 길은정(가수 방송인). 학교 내 가요제 심사위원장을 맡았는데, ‘잃어버린 우산’을 부른 그에게 대상을 줬다 곤욕을 치른 일이죠. 자작곡이 아니면 대상을 줄 수 없었기에, 큰 홍역을 치러야 했죠.”

 

그렇게 대학 졸업 뒤 그룹을 이끌었고, 8개월여 나이트클럽 공연을 하다 그는 그룹 리더 자리를 내던지고 말았다. 그에게는 일생일대 인생 전환점. 노래로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무너지면서다. 아들을 위해 늘 기도하던 어머니의 서원이 먹혔을까.

 

“어머니 제자인 한 목사 권유로 대한신학교(현 안양대)에 입학했어요. 졸업 뒤에는 합동신학원(대학원 과정)에 갔는데 더 이상 학업을 유지할 수가 없었지요. 전 민중신학자 안병무 교수를 존경했는데, 그를 이단 빨갱이 취급하는 걸 용납할 수 없었죠.”

 

학업을 그만두고 결혼을 택했다. 전도사 생활을 2년여 했다. 그러다 기장(진보)교회에 다니던 이모부가 횡성의 한 시골 교회 목회자 자리가 비었다며 천거했고, 거기서 3년여 목회를 했다. 그리고 한신대(진보) 대학원에 입학했다. 문익환 목사를 따르던 시절.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2000년 금토교회(경기노회) 목사를 하던 땐데 주민교회(성남, 이해학 목사) 출신의 한 진보 인사가 야당 시의원에 출마한다고 부탁해 예배 때 인사를 시킨 게 말썽이 나고 말았다. 선거법 시비로 번졌고, 결국 그는 사퇴하고 말았다.

 

2007년 찾아든 곳이 여주의 천송교회. 여기서 그는 세월호 사건, 4대강(이명박 정권)과 국정교과서(박근혜 정권)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여주환경연합 활동을 앞장섰고, 여수 민주시민단체협의회(환경연합 민예총 전교조 등 참여)를 결성해 대표를 맡기도 했다.

 

싸움꾼 목사에게 또 한 번의 고난. 5·18과 세월호 등 추모제 행사를 교회에서 개최했는데, 살풀이(미신이라며) 프로그램을 장로들이 걸고넘어진 것. 안식년이라서 해외에 있을 때 일. 법적 쟁송을 이겼지만 교회는 양분되고 말았다.

 

“마이웨이였죠. 저는 부끄러운 길을 간 적이 없기에 확신했죠. 목사로서 말 앞세우지 않았고, 언행일치를 실천했고, 사회정의에 침묵한 적 없었으니까요. 기득권과 불의에 저항한 예수를 따랐고 그 진보정신을 잊거나 배반한 적이 없으니까요.”

 

▲ 지난달 19~21일 ‘바우가마 시를 굽다’ 시화전 공연.   ©하현주


‘수꼴’ 기독인들이 거리정치를 하는 것에 대해 그는 예수의 진보정신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 그렇다고 단언했다. 원주민을 내쫓은 뒤 주인행세 해온 미국의 기독교가 한국에 전파되다보니 한국기독교 문제가 심각하다고 강조했다. 한국 보수(수꼴)의 문제는 박정희 쿠데타를 옹호, 시작부터 잘못됐다고 덧붙였다.

 

집 어수선할 땐, “얀 스테인 집 같구먼”

 

노래를 그만 두고 목사가 됐는데, 왜 노래를 계속하냐는 질문엔, 역할론과 시대정신을 들었다. 때론 설교(설득)로 때론 노래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그는 믿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와 세 아이 모두 참여하는 가족밴드(가족선교단)도 만들었다. 아내는 피아노·보컬, 첫째 딸은 피아노, 둘째 딸은 베이스키타, 아들(막내)은 드럼, 자신은 기타와 보컬을 넘나들며 구원의 노래를 부른다. “아빠를 제일 존경한다”는 아이들의 칭찬에 용기 내면서.

 

네덜란드에 “얀 스테인 집 같구먼”이란 말이 있다. 집이 어수선할 때 내뱉는 말이다. 얀은 3백여년 전 유럽장르화(풍속화)가. 정물 풍경 인물 등 그림을 잘 그렸는데, 한 분야 최고가 되기에는 좀 부족하다는 평에, ‘다 그리면 되겠네’라고 했다던 화가다. 렘브란트(빛의 화가)나 베르메르(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못지않게 사랑받는 그는 서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되 웃음과 반전을 담았다. 매를 든 선생과 우는 아이를 바라보는 학동 모습을 담은 단원(김홍도) 풍속화 ‘서당’처럼. 조금 부산스러울지 모른다. 하지만 전 가족이 협력하고 참여하는 밴드와 연주. 신명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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