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배고픔·결핍 아닌 배제 때문”[동남아일기20-태국] 4일부터 엿새간 ‘세계 인간정주 날’ 집회어제 오후 아시아 주민조직 활동가 워크숍 행사장에서 게스트하우스로 옮겨 짐을 풀고 잠시 낮잠을 잔다는 것이, 눈을 뜨니 이튿날 아침 10시가 넘었다. 장장 20시간을 점심, 저녁밥도 거르고 잔 게다. 침대 매트리스가 별로 좋지 않아 온 몸이 뻐근한데, 거울을 보니 눈이 팅팅 부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무리를 한 겐가.
10월 3일 오전 11시 30분. 방콕의 훨람퐁 기차역에 도착했다. 제프(Jeff)가 마중 나오기로 했는데, 보이지 않는다. 전화하니, 보통 태국 열차는 제시간에 도착하는 경우가 드물어 예정 시간보다 1시간 정도 늦게 나올 예정이었다고 한다. 1시간 후에 만난 제프는 4개월 전 인도네시아에서 봤던 것보다 더 수척해 보인다. 아마도 행사 준비하느라 많이 바빴던 모양이다. 중국계 미국인인 제프는 10년 전 박사논문을 위해 태국의 시민운동을 조사·연구하러 왔다가 학위과정을 포기하고 태국의 빈민단체에서 활동하는 활동가가 되었다.
제프가 아니었더라면 이번 ‘아시아 주민조직 활동가 워크숍(LOCOA Young Community Organizer Workshop)’에 참여해 아시아 빈곤문제뿐만 아니라 빈민조직 활동가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들을 들을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낮잠 잔다는 게 그만 20시간... 제프가 행사기간 방콕의 한 빈민단체에서 무료로 지낼 수 있도록 해주어 그 곳에 짐을 풀었다. ‘인간정주연합(Human Settlement Foundation)’이라는 곳인데, 태국 빈민운동의 대부인 수윗 왓누(Suvit Watnoo, 2007년 54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으며, 장례식 때 2만여명의 태국시민 조문행렬이 이어질 정도로 존경받는 인물)가 세운 빈민운동단체다. 통역을 해주던 제프가 일 때문에 떠나고 나니, 태국친구들과 대화할 길이 막막하다. 인도네시아에서 이미 한번 겪었지만, 그래도 인도네시아 친구들은 기본적인 영어 단어 몇 개씩은 알고 있어 손발짓 섞으면 어느 정도 소통할 수 있었는데, 태국 친구들은 정말 영어에 대한 지식에 거의 제로다. 지구촌 어디가나 알아듣는 ‘굿 모닝’도 모르고 있으니...
인도네시아에서보다 태국어를 배우는 것이 더 힘겨울 듯한 불길한 예감. 헐~ 10월 5일 ‘세계 인간정주의 날’ 기념집회를 준비하느라 분주한 활동가들과 주민들을 한쪽 구석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그런 내가 신경 쓰였는지, 여럿이 “괜찮냐”고 물으며, 이것저것 먹을 것을 가져다준다. “괜찮다, 신경 쓰지 말라, 배 안 고프다”고 말하지만 못 알아듣기에, 그저 그들이 잡아끄는 대로 다 할 수밖에 없다. 괜히 신경 쓰게 하는 것 같아 미안스럽네. 10월 4일 일요일, HSF 사무실에서 닭죽으로 아침식사를 해결하고, 활동가들과 함께 LOCOA 워크숍 행사장으로 가니 인도, 방글라데시, 캄보디아, 필리핀의 참가자들과 한국에서 온 활동가들이 기다리고 있다. LOCOA(Leaders and Organizers of Community Organization in Asia)는 ‘아시아빈민조직활동가연대’로, 그 역사는 1970년 대 빈민조직운동이 아시아지역에 확산되기 시작한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초 LOCOA 사무국은 필리핀에 있었는데, 작년부터 서울로 옮겨와 한국의 빈민·주민조직들의 후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 한다.
제프 덕에 'LOCOA' 참여해 이번 워크숍은 젊은 주민조직 활동가들의 교류를 활성화하고 세대교체를 도모하기 위해 준비된 것인데,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서도 시민운동진영의 젊은 세대가 잘 영입되지 않아 세대교체에 대한 고민이 많다고. 나라별로 2명씩 젊은 활동가들이 참석했는데, 한국에서는 인천에서 공부방을 운영하는 친구와 ‘용산참사’를 알리기 위한 활동가가 참여했다. 오랜만에 한국 활동가들을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다. 10월 4일부터 10월 9일까지 총 6일 동안 태국 빈민지역 방문, 유엔관계자와의 대화, 세계 인간정주의 날 기념집회, 각 나라의 빈민 조직운동 현황 및 과제에 대한 토론 등이 진행되었는데, 매일 오전 9시부터 저녁 6~7시까지 빡빡하게 짜인 일정에도 참가자들의 흐트러짐 없는 집중도가 놀랍다. 2중, 3중의 통역으로 답답하고 지칠 만도 한데 누구 하나 짜증내는 사람 없이 서로를 배려해 가며 열심히 소통하려는 그들의 열의와 열정이 인상 깊다. 전체 인구의 절반(약 5억여명)이 빈곤선(poverty line) 이하라는 인도, 수도 다카(Dahka)의 빈민촌 1㎢에 20만 여명이 산다는 방글라데시, 정부의 감시·위협으로 주민조직 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캄보디아, 빈민 및 노숙자 대부분이 농촌·산간 출신인데 주민등록증이 없어(출생 당시 정부에 신고되지 않으면 그 후엔 주민등록을 할 수 없음) 어떠한 권리도 행사할 수 없는 상태라는 태국, 개발사업시 본래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철거민 정착촌을 재조성하도록 하는 법이 올해 제정되어 법이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필리핀, 세계 13위의 경제부국을 자랑하지만 여전히 비닐하우스촌과 쪽방촌이 있으며 지난 1월에는 정부의 강제철거로 무고한 철거민 5명이 사망한 대한민국. 저마다 다른 상황, 다른 조건의 이야기였지만,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배제되었다는 점에서 ‘빈곤’이라는 모습은 똑같은 것 같다.
아, ‘용산참사’ 활동가 만나니... 서양인의 관점으로 세계에서 가난한 나라라고 일컬어지는 부탄의 국민들은 자신들이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배고프지 않고,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 수 있기 때문. 어느 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다. 군주제 불교국가이자 농업국가로 소수에 의한, 소수를 위한 자연자원의 개발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가난’은 배고픔이나 경제적 결핍이 아니라 ‘배제’ 때문임을 이제야 알겠다. 매일 저녁, 일주일 동안 태국, 필리핀, 한국 친구들과 밤 1~2시까지 술자리를 가졌다. 말이 잘 안 통하니, 긴 말은 못하고 돌아가며 노래 부르며 중간 중간 건배를 외치는 게 다이지만, 하루가 아쉬울 정도로 즐겁다. 오랜만에 한국에 있는 것처럼 맘이 편하다. 헐~ 비록 아시아 각 지역의 빈곤문제를 다 듣고 이해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빈곤문제를 다시 들여다보고,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금요일 밤 마지막 술자리를 하고 잠자리에 드니 새벽 1시다. 토요일 오전엔 태국친구들의 안내로 시내관광을 하다가 점심경 카오산 근처에서 헤어져 치앙마이로 가기 전 며칠 동안 묵을 숙소를 찾아야 한다. 일주일 내내 밤늦게까지 술 마시고 낮에는 통역하느라 긴장을 했던 탓인지, 숙소에 짐을 풀고 샤워를 하니 졸음이 쏟아진다. 양치질해야 하는데 몸이 침대에 붙어 떨어지질 않네. 음냐… <저작권자 ⓒ 인터넷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대초원에서 유라시아 환경보고서를 띄우던 경효. 인도네시아에서 시작해 말레이시아, 태국, 버마, 캄보디아로 1년여 장도의 동남아시아 자원봉사활동을 하며 기행문을 써온 제가 이번엔 영국 쉐필드에 왔습니다. 쉐필드대학 석사과정에서 공부하려고요. 이젠 유학일기로 관심을 좀 끌어볼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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