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 천안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의 미소, 자비는 이해에서

김성윤 기자 | 기사입력 2020/05/31 [11:14]

[부처님오신날] 천안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의 미소, 자비는 이해에서

김성윤 기자 | 입력 : 2020/05/31 [11:14]

 천안은 서울 기점 83.6㎞에 위치한 국토의 중핵 도시요, 충청남도 서부 지역의 관문이며, 교통 요충지다.


천안에는 봉선홍경사 갈기비(天安 奉先弘慶寺 碣記碑) 국보 제7호를 비롯한 보물 8건, 사적 1건, 천연기념물 2건, 도 지정유형문화재 8건, 도 지정기념물 13건 등 총 33건의 귀중한 문화재가 있다.

 

그중에서 오늘은 천안시 목천읍에 있는 용화사(주지 지용스님)의 석조여래입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 잘 정비된 천안시 목천읍에 있는 용화사(지용주지스님)로 올라가는 입구    © 김성윤 기자

 

목천은 고려시대 목주로 조선에서도 그 지명 그대로 목천이라고 불렀다.
1413년부터 목천에는 현감을 둘 정도로 나라의 중요지역이다.『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조선 초 목천읍의 호구 수는 404호에 2,286명이었다.


용화사는 목천 면사무소에서 병천 쪽으로 가는 길 왼쪽 산기슭에 있다
용화란 미륵보살이 장차 성불할 용화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미륵하생신앙과 관련이 있다.

불경에 따르면 미륵불이 용화수(龍華樹) 아래 내려와 설법하여 중생을 제도하고, 이 세상을 용화세계(龍華世界)로 바꾼다고 나와 있다.

 

원래 용화사가 있던 곳은 미륵당미륵이 있었던 곳이다.
현재는 이 용화사 안에 미륵이 2구 있다.
이 미륵이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이다.

 

▲  현재는 이 용화사 안에 미륵이 2구 있다, 화면의 오른 쪽 부처가 충남도 유형 문화재 58호인 석조여래입상 이다.   © 김성윤 기자

 

도유형(道有形) 문화재 58호인 석조여래입상은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시대 불상양식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고려 시대의 작품으로 추정 된다.


높이 385.4㎝, 어깨 폭 106.5㎝.의 거대한 원통형의 화강암에 불심을 불어 넣은 입상이다.
머리 위의 육계는 둥글 형이요, 나발은 선명하며 높게 얹혀 있다.
이마에는 백호가 양각되어 있으며 두 귀는 크고 길다.


목에는 삼도가 분명하고 전체적인 안상은 중후한 비만형이다.
두상은 갸름하면서도 복스러운 얼굴이다.
눈은 약간 감겨있듯이 아래를 내려 보고 있다.


콧날은 보수를 거쳐서 그런지 둥근 각선미가 없는 편이다.
작고 단정한 입은 단아하면서도 자비로운 인상을 준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고, 어깨는 둥글게 아래로 늘어져서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이다.


대의는 통견(通肩)으로 가슴이 둥글게 벌어지고 끝자락이 왼쪽 어깨 뒤로 반전되어 넘겨졌으며, 배 밑으로 둥근 옷 주름이 길게 늘어져 있다.


통일신라 시대의 미륵불은 대부분이 중후하고 비만인 것이 특징이다.

여래상이란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께서 깨달아 부처가 된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 여래상은 1000년을 넘나드는 세월의 풍파에도 중후하면서도 단아한 이목구비를 뚜렷이 간직한 채 사바세계를 내려다보면서 다시 한 번 진리를 일깨워 주고 있다.

 

▲ 충남도 유형 문화재 58호인 석조여래입상이 코와 눈이 훼손된 부분이 복원되었지만 원형과는 많이 다르다.    © 김성윤 기자

 

부처님께서는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의지하여라.
그리고 내 가르침을 중심으로 화합하고 서로 공경하여라.
함께 불법을 지키고 배우며 진리를 깨닫는 기쁨을 누려라.
내가 떠난 다음에는 내 가르침이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라는 말씀을 진리로 남겼다.

 

조선 시대에는 억불 정책(抑佛政策) 또는 배불 정책(排佛政策)이 국정의 중심정책이었다.
이 정책은 불교 교단의 세력을 강제로 축소시키고 약하게 유지하기 위한 조선의 주요 국가시책이다.


반면에 숭유정책으로 유교를 국가정책의 중심에 두고 숭상하였다.

유교는 가문을 이어가는데 장자가 우선이기 때문에 남아 사상이 강했다.


여자가 사내아이를 못 낳는 경우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 시대다. 사내아이를 못 낳는 여인들은 사내아이만 낳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였다. 숭유억불 정책이 낳은 또 하나의 부작용으로 부처님 얼굴을 다려먹으면 사내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소문이 퍼졌다.


이 때문에 석조여래입상은 아쉽게도 사내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무지한 여성들에 의하여  코와 눈이 많이 훼손되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미륵부처님 불두(佛頭) 일부를 떼어다 끓여 먹으면 사내아이를 낳는다는 나쁜 소문이 이 지역에도 있었다고 한다.


그 소문을 믿고 동네에서 아들을 낳지 못했던 여인들이 와서 징으로 미륵부처님 불두(佛頭)를 갈아서 가루를 가져갔기 때문에 현재처럼 눈과 코가 원형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 여인은 아들을 낳기는 하였으나 장님을 낳았다고 한다. 이 여인의 애착은 결국 고통의 근원이 되어 돌아왔다.

 

이 여인에게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해로운 애착은 문화를 파괴하고 자기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런 사연 때문에 1000년 된 미륵불의 훼손된 부분은 후에 보수하였으나, 원형과는 맞지 않게 엉성하게 형상만 맞추어 놓게 되었다.


명색이 충청남도 유형문화재인데 이렇게 관리가 허술해서야 되겠는가?

1000년 전 불심이 강한 어느 도공은 거친 화강암에다 불심을 불어넣어 자비로운 인상의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을 조각하여 많은 중생에게 부처님 말씀을 무언으로 전하여 주었다.

 

그 여래불은  지금까지 우리를 지그시 감은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단아하고 자비스러운 자태는 보는 불자의 번뇌마저 일거에 씻어 줄 것만 같다.

 

▲부처는 “근본오인(根本五印)"이라 하여 다섯 가지 대표적인 수인을 하고 있다. 선정인禪定印), 항마인(降魔印), 전법륜인(傳法輪印), 천지인(天地印), 여원시무외인(與願施無畏印) 이다     © 김성윤 기자

 

진정한 자비는 이해에서 온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진정한 사랑은 맹목적인 열정이나 애착에서 오지 않는다.
사랑은 누군가를 돌보고 이해하는 법을 아는 것이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영혼에 가까이 다가갈 용기와 힘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자비요,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올해 부처님 오신 날은 4월 30일이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확산을 막기 위해 봉축 법요식을 한 달 늦춰 5월 30일 하게 되었다.

 

이 석조여래 입상은 통일신라시대 아니면 고려 초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그 중 하나는 북쪽으로 산 등 넘어 안적 골에서 옮겨 온 것인데 아래와 같은 사연이 있다고 용화사 성오 총무스님이 설명해 주셨다.

 

어느 날 미륵마을에 살던 오관평 신도가 비 오는 날 꿈을 꾸었다. 그 꿈에 불보살이 저수지 근처에 나타나서 여기 있다.


그래서 저수지 근처를 뒤져보니 빗물에 씻긴 불두(佛頭)가 있어서 지게에 지고 와서 불신(佛身)만 있던 부처에 맞추어보니 한 몸이 되더란 것이다.


아마 온 마음을 다하여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불자에게 주는 부처님의 자비가 꿈에 나타난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부처의 불두(佛頭)가 저수지 근처로 까지 왔을까?
전해지는 말로는 일본 사람들이 저수지를 막으면서 액운을 쫓는다고 불두(佛頭)를 잘라서 저수지에 수몰시키려고 하자 일본 사람 중에서도 불심이 강했던 현장 소장이 이를 말린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처님의 불두(佛頭)앞에서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아무튼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오랫동안 불두(佛頭)가 없는 미륵불이 동리 안골에 반쯤 묻혀 있었다. 이 미륵불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온 후 비가 오고 홍수가 났다.
꿈을 꾸었던 불자가 물이 지나간 곳으로 가보니 불두(佛頭)가 있어 이를 용화사로 가져왔다.
그 불두(佛頭)와 불신(佛身)을 맞추어 보니 딱 맞아서 현재처럼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 미륵불이 용화사 석조여래 두 분 중의 또 한 분이다.

 

목적이 없는 불자는 흔들리는 떠돌이 영혼과 같다.
인간은 본인이 살고 있는 시대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목표, 삶의 목적을 가질 필요가 있다.
목적의식이 분명하였기에 불신에 맞는 불두를 꿈에 계시 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화를 낸다고 해서 누가 우리에게 벌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네 분노가 오히려 자신를 벌주지 않는가?

 

▲ 3층 석탑을 5층으로 층축 하였다. 그러나 원래와는 많이 다른 느낌이다.   © 김성윤 기자

 
부처님의 미소처럼 너그럽고 평화롭게 오늘을 집중해 사는 것이 이 땅에 부처님이 밝히고자 하는 등불이 아닐까?


오늘따라  1000년 동안의 갖은 사연을 안고 있는 석조여래입상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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